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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Jan 17. 2024

조선시대의 은밀한 발걸음, 밀수

潦澤裡得萬金寶 외 1편

글/ 체동


  얼마 전 한국에는 《밀수》(Smugglers, 2023)라는 영화가 개봉하였다. 유학생인 나는 아직 접하지 못하였지만 ‘밀수’를 소재로 재미난 이야기를 엮은 작품일 것이다. 514만명의 관람객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한국 사람들에게 ‘밀수’는 흥미의 소재인 것 같다. 이러한 흥미가 오늘날 한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가 보다. 『천예록』에는 뜻밖에 보물을 얻어 부자가 된 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인공인 두 역관은 모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는 도중 우연히 세상에 보기 드문 구슬을 얻었다. 용골에서 정통주(定痛珠)를 얻은 역관은 중국 현지에서 만인에게 팔았고, 또 만인에게서 교환 받은 보석을 조선으로 운반해서 만금으로 벌었다. 다른 이야기 속 역관은 섬 위에 갇혔을 때 구렁이의 배에서 구슬 두 섬을 발견하여 조선으로 가져가 팔아서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의 끝 자락에 두 역관이 보물을 파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역관은 백금과 2천 냥 값으로 준 여러 보물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 보물들은 다시 동래의 왜관에 팔았다. 산호, 마노, 유리 등의 보배는 모두 빼어난 등급의 최상품으로 세상의 드문이라 남만의 상인이 정해준 값보다 두 배, 네 배를 훨씬 뛰어넘었다."

(象官持白金眾寶而歸國, 一眾寶賣於東萊倭館, 如珊瑚樹, 瑪瑙, 琉璃等寶品皆奇絕, 世所罕有, 價一蠻商所定, 不翅倍蓗.)


  "역관은 마침내 이것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구슬을 꺼내 일부는 나라 안에 팔기도 하고, 또 일부는 왜관에 팔았다. 대부분 대단한 가치가 있는 보석이라 셀 수 없을 정도의 돈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나라의 거부가 되었다." 

(象官乃得載還於家, 出其珠, 或賣於中國, 或賣於倭館, 多是至寶, 獲價無算, 遂爲中國巨富焉. )


  보물을 가득 싣고 돌아온 역관들은 상인으로 변신했다. 조선 사람들은 물론, 조선에 있는 일본 사람들도 그의 무역 대상이다. 게다가 상품은 온통 명나라나 이름조차 모르는 섬에서 가져온 희귀한 진보들이다. 오늘날에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국제무역의 모습이 아닌가? 

  여기까지 쓰면서 나의 출국 전야가 생각났다. 나는 그저께 2년 만에 다시 모국으로 들어갔는데, 한국에서 있는 마지막 사흘은 지난 2년 동안 내가 겪어온 어떤 날보다도 바빴다. 친구가 부탁한 화장품도 찾고, 부모님과 친척한테 줄 선물도 챙겨야 하고, 특히 이번에 고향에서처음 만나게 될 조카딸의 선물도 골라야 했다. 수많은 면세점 앱을 파도타듯 돌고 돌며 골머리를 태우기까지 했다. 그렇게 끝내 짐을 정리하며 캐리어에 밀봉조차 안 되는 상품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귀국 전에 묻던 질문을 나 역시 친구에게 보냈다. “나 세관에서 압류되는 것 아니겠지?” 

  국제무역에 관한 법률이 정비된 오늘날, 이러한 문제는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천예록』에서 당대 통역을 담당하던 역관들이 살던 조선시대에 “밀수”라니! 이는 충분히 탐색할 만한 화제(話題) 대상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제부터는 경사(京師)로 나아가는 행차에 만일 몰래 매매를 행하여 모리(謀利)하는 자가 있다면, 율(律)에 비추어 논죄(論罪)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1417년 태종이 사헌부에게 내린 왕명이다. 그러나 1491년 권유(權瑠)라는 대신이 상소에서 “통사(通事)의 무리가 많은 화물을 가지고 중국 물건을 사사로이 무역하여 가고 돌아오는 사이에, 평안도(平安道)의 사람과 말이 고달파서 죽으니, 청컨대 엄격하게 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면 밀수는 여전히 그 당대 정치 이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밀수’는 언제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쌓이고 또 쌓인 사회 문제이다. 어느 시점이 되어서야 조선이 사신의 밀수 사업을 정식적으로 제한하는가? 이는 아마도 청나라 때이다. 1780년까지 조선 조정에서 귀국한 사신들이 가지고 온 물건에 관한 금지 명목이, 박지원의 말로 하면, 이미 “자질구레하고 알기가 힘든[瑣雜難悉]” 정도였다. 『열하일기』에는 “큰 물건은 황금, 진주, 인삼, 담비 가죽과 은전이 있다. 작은 물 것은 옛과 새로운 면목은 수십 종보다 더 많다[大者如黃金、真珠、人參、貂皮及包外濫銀,小者新舊名目不下數十種].”라고 기록했다. 1838년이 되면 이러한 경우는 보다 더 많아졌다. 『비변사등록』의 기록에 따르면, “북경 화물 중에 완호에 속한 물건들이 모두 금지 품목이다. 옥, 밀화, 금배, 산호, 호박, 마노, 수정 안경, 청강석, 금강석, 보석, 유리(거울 제외), 파리, 대모(생략)[燕貨中凡屬玩好者,一切通禁. 玉, 蜜花, 錦貝, 珊瑚, 琥珀, 瑪瑙, 水晶眼鏡, 青剛石, 金剛石, 寶石, 琉璃(面鏡勿論), 玻璃, 玳瑁(생략)” 『천예록』에서 역관들이 거래한 산호, 마노, 유리, 진주 같은 상품들이 완연히 들어 있다. 

  조선시대 밀수에 관한 여러 일을 훑어보았으니 다시 본래의 『천예록』으로 돌아와 임방의 평을 보자. 


  "부귀는 다섯 복 중에 둘째로, 이 복을 얻으려면 착한 일을 하고 어진 행동을 하면서 저절로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가능한 일이다. 백 개의 꾀를 쓰면서 부귀를 바라는 것도 모두 헛된 일이다." 

(富者五福居二, 欲得其福者, 積善行仁, 自獲神助, 可也. 百計求富, 都是妄耳.)


  임방은 '밀수'라는 사회 이슈에 대해 유교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관점을 제시한다. 밀무역 활동을 비판하는 동시에, 천명론과 도덕주의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재물을 추구하는 행동 자체를 권장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세종조에 이런 인물이 있다. 


  "군례의 아비 임언충(任彦忠)은 한족(漢族)인데, 역관(譯官)으로 개국 공신에 참예하였던 고로 (중략) 사람된 품이 욕심 많고 야비하며, 역관으로서 여러번 명나라에 사신을 따라가서 큰 부자가 되었다." 

(君禮之父彦忠, 漢人也. 以譯語得參開國功臣 (중략) 爲人貪鄙, 以譯語屢使上國, 以致巨富.)


  '개국 공신'으로 삼을 만난 정도이면 임언충은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인재인 듯하다. 그러나 실록에서 그에 대해 오직 “욕심이 많고 야비하다”라는 평어만 남겼다. ‘큰 부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부자에 이르게 된 연유를 기록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천예록』에 나타난 역관의 얘기와 임방의 평을 보면, 임언충 역시 적극적으로 밀수 사업을 참여한 탓에 당시 비판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임방, 혹은 그를 비롯한 양반 계층들이 중인 역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까지나 편협한 유교 도덕주의자의 시각에 머물러 있다. 기록자인 지배계급은 소극적 재물관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후세 사람들의 애도문 속에 “불치산업(不置産業)”이라는 말로 평가받는 것에 그치고 만다. ‘불치산업’은 자기 자신과 양반 계층을 바라본 중인계층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 상황을 반영한 말이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팔방 곳곳에서 밀수가 진행 중이고 이를 진압하려는 공무원들의 발걸음도 밀수꾼의 발걸음만큼이나 바쁠 것 같다. 방학 기간 고향에 머물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임방의 이야기들을 다시 ‘밀수(?)’해 보련다. 독자 여러분에게 보다 재미난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역관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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