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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Dec 18. 2023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에 관심 가지기

智異山路迷逢眞 외 1편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에 관심 가지기

하괴저


재능이 있음에도 이를 펼치지 못하는 자를 우리는 무어라고 부르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때로는 비판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동정의 시선으로 어루만지기도 한다. 그들의 끈기 없는 근성을 탓할 때도, 그들을 압박하는 사회를 탓할 때도 있다. 능력주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요즘에는 전자의 경우가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서울역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인들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는 많이 없을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재능을 뜻대로 펼치지 못하는 이들을 노숙인이라고, 사회적 약자라고 멋대로 부르고 있다. 반면 임방의 저서 『천예록』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걸인을 ‘신선’이라 불렀다.


볼품없는 거지가 신선이라니!

중종 때의 일이다. 서울에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못생기고 우악스러운 데다 지저분하기까지 하였다. 나이는 마흔쯤 되어 보였으나 아직까지 상투를 틀지 않았다. 자루를 둘러메고 저자에서 구걸을 하였다. 낮이면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녀 도성 안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밤이면 남의 집 문 옆에서 잠을 청했다. 대부분 종각[鍾樓] 근처 거리에서 지냈는데, 품팔이꾼이나 무뢰배 들고 날마다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그들과 친숙한 사이가 되어 함께 어울렸다. 그는 자신의 성을 장 씨(蔣氏)라 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장도령(蔣都令)’이라고 불렀다.


『천예록』의 첫 이야기 「지리산에서 길을 잃었다가 신선을 만나다 [智異山路迷逢眞]」는 장도령의 후줄근한 외모를 소개하며 시작한다. 그가 얼마나 초라하고 비루한지 꽤 공을 들여 설명한다. 독자들은 단번에 그가 비루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다음 단락에서 다른 정황이 드러난다.


이때 마침 도사 전우치가 괴상한 도술을 부려 자못 세상을 우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도 큰길에서 장도령을 만날 때면 굴러 내리듯 말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다가가 절을 올리고 감히 쳐다보질 못하였다. (중략)

“우리나라에 도령으로 세 신선이 계신데 장도령이 제일이고, 그다음이 정염(鄭磏)이며, 그다음은 윤세평(尹世平)이지.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나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네. 그러니 어찌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장도령의 신이한 능력을 부각하기 위해 거론된 사람이 꽤 된다. 우선 도사의 대명사 전우치다. 장도령을 보고 덜덜 떠는 모습은 흔히 알던 전우치의 것이 아니다. 장도령은 전우치조차 두려워한 인물이다. 그다음은 정염으로 실존 인물이다. 여러 언어와 의술에 정통하였는데, 을사사화에 휘말려 은거하게 되었다. 당대 도인으로서 꽤 이름을 날렸었다. 윤세평(尹世平)은 가상 인물로 역시 도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도사로 한 끗발 날리던 이들이 모두 장도령을 수식한다. 과연 장도령은 어떤 인물일까?


본래 호남 양반 집안 출신이었으나 부모가 모두 전염병에 걸려 죽었고, 형제는 물론 아는 친척도 별로 없는 혈혈단신의 이 몸, 의지할 데라곤 없는지라 유리걸식하며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로 서울까지 흘러들어 왔단다. 한 가지도 잘하는 일이 없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꼴이란다.


내막이 그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그는 본디 사대부 출신이었으나 양친을 잃고, 일가친척도 모두 없어 걸인이 되었단다. 양반임에도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능력한 몰락 양반이다. 한 벼슬아치가 그의 사정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를 도와주기 시작한다. 먹을 것과 술이 있으면 갖다 주는 등 잘 돌봐주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의 죽음에 벼슬아치는 진심으로 슬퍼해 주었다. 그렇게 장도령과의 인연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벼슬아치의 선행은 기이한 형태로 보답받게 된다. 호남에 볼 일이 생겨 지리산 아래를 지나던 그는 길을 잃어 샛길로 새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의 눈앞에 별천지가 펼쳐졌다. 벼슬아치가 인간 세상을 초월한 황홀한 정경에 취했을 무렵 어떤 이가 화려한 궁궐로 그를 이끄니 그가 바로 장도령이다. 과거의 비루하고 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풍채와 기품이 아주 빼어난 용모를 하였기에 그를 챙겨주었던 벼슬아치도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나아가 그의 거처, 식기, 수족 모두 선계의 것과 같았다.


“우리나라에는 4대 명산이 있고 그곳에는 각각 선관(仙官)이 주재한다네. 나는 바로 이 지리산을 주재하고 있지. 일전엔 약간의 잘못을 저질러 잠시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내려와 있었네. 내려와 있는 동안 그대가 나를 정성으로 대접해 준 후의를 내 잊지 않고 있었다네. 그대가 나의 주검을 보고 애도하던 마음까지도 내 알고 있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유배의 기한이 찼기 때문에 시해(尸解)하여 선계로 돌아온 것일세. 오늘 그대가 이 산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예전의 은혜를 갚고자 한번 초청하여 자리를 마련한 것일세. 그대도 나와의 묵은 인연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에도 진상은 장도령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그는 단순한 걸인이 아니라 하늘에서 유배 온 신선이었다. 그의 죽음은 다시 천계로 돌아가기 위한 관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벼슬아치가 후하게 챙겨주었는데도 허망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장도령은 비루한 시절의 자신을 챙겨준 벼슬아치의 선의를 잊지 않고 이를 보은 하였다. 꿈같은 시간도 잠시 선계는 본디 인간이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기에 벼슬아치는 이내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벼슬아치는 현실로 돌아왔다. 장도령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선계의 쾌락을 잊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다시 그곳으로 가기 위해 표시를 해놓았다. 그러나 길을 잃어 들어갔던 곳인지라 다시 갈 수 없었다. 고의로 길을 잃을 수는 없는 법이다. 선계에 갔다 온 것만으로 벼슬아치는 늙지 않고 외려 젊어져 무병장수하다 90세에 생을 마쳤다. 이야기는 그의 독백과 마무리된다.


“장도령이 세상에 있을 때의 일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별반 이상한 행동은 없었어. 다만 조금도 변하거나 늙지 않은 모습에 남루하고 거친 옷 하나만 걸친 채 15년을 변함없이 하루처럼 지낸 것 말고는……. 그러고 보면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범속한 사람의 눈으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게 당연하지.”


거지를 도와주면 복을 준다네

위 이야기와 같이 거지를 도와주고 보답을 받는 줄거리는 우리나라 설화에서 많이 보인다. 이를 “거지 발복 설화”라고 명명한 논문도 있다. 논문에 따르면 거지가 복을 구하거나 복을 타인에게 주는 이야기, 거지 발복 설화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거지가 복을 받는 ‘수혜형’과 거지가 복을 주는 ‘시혜형’이 그것이다. 장도령의 경우 벼슬아치에게 복을 주었기에 시혜형 거지라고 할 수 있겠다.

수혜형 설화가 우연성과 운명에 초점을 맞춘 반면 시혜형 설화는 거지를 비범한 기인으로 그려내고 나아가 복을 선사하는 구원자처럼 보이게 한다. 추악하고 하잘것없는 거지가 사실 천상의 존재와 소통하는 초월적 존재라는 사유는 빈천한 이는 열등하다는 기존의 관계를 해체하여 걸인을 향한 인식을 새로이 구축한다. 재인식은 거지를 깔보고 무시하던 기존의 차별적인 사회 통념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서 작동한다. 요컨대 시혜형 거지 발복 설화는 기존 우열관계의 해체와 차별적 통념의 반성을 담고 있다. 시혜형 설화가 담은 고찰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바라보아 왔는지 재고하게 만든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임이랑,<거지발복설화의 유형과 의미>, 2018)장도령도 같은 결의 이야기인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벼슬아치는 그런 거룩한 마음으로 장도령을 보살폈을까?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의 진가를 아는 법: 관심 가지기

벼슬아치는 그가 사대부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더욱 안쓰럽고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슬아치는 장도령이 ‘몰락한 사대부’였기 때문에 도와주었다. 그가 벼슬아치의 호의를 산 이유는 그가 ‘사대부 출신’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장도령이 사대부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벼슬아치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벼슬아치가 다른 걸인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이와 날 때부터 사회적 약자인 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불편한 사실은 현대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소위 ‘고학력 걸인’들에 대해 더욱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다. 언론에 자주 포착되는 것 역시 장도령 같은 인물들이다. 우리는 노숙인을 보며 그들의 나약한 근성을 탓하지만, 고학력자였던 걸인들에겐 사회의 탓을 하기 마련이다. 같은 노숙인임에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고학력자, 혹은 사회의 요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적인 수혜를 베푼다면 진정한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
우리는 장도령의 재능에 주목하여야 한다. 추한 외모에 가리어 드러나지 않았던 잠재력을 보아야 한다. 사람의 잠재력은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몸짓과 말투, 습관 등에 은은하게 드러난다. 마치 15년 동안 한 옷만 입고 그대로였던 장도령처럼 말이다. 그의 추한 외모에만 집중했던 다른 이들은 그의 잠재력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심지어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벼슬아치조차 몰랐다. 그를 진정으로 알아주었던 것은 바로 앞서 등장했던 ‘전우치’였다.
적강한 장도령은 본디 자신의 잠재력을 펼칠 기회조차 받을 수 없었다. 다만 전우치만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어쩌면 장도령이 15년이라는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벼슬아치의 호의뿐만 아니라 자신을 알아 봐준 전우치의 안목에도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의 진가를 알아볼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세상을 그럭저럭 살만한 법이니까.
그렇다고 벼슬아치의 호의가 가식적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사회적 공감대에서 비롯된 연민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 요즈음에 많이 잃어버린 마음이다. 구세군 작은 냄비에 모이는 돈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장도령처럼 소외된,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이 여전히 많다. 벼슬아치의 공감력과 전우치의 지인지감력(知人之鑑力)이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주변부의 사람들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능력을 알아챔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타인이 포착하지 못하는 지점을 포착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요구되는 쉬운 일이다. 무한경쟁 사회에 접어든 지금 그런 자그마한 관심조차 타인에게 주지 못함이 현실이다. 일단 멈추고,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자. 안 보이던 것들을 눈에 넣을 수 있도록.



차라리 나는 길을 잃을래

하괴저

서브컬처를 뜨겁게 달구었던 소재가 있다. 트럭에 치여 이 세계로 간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 편의주의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라 얼마 안 가서 사그라들 줄 알았건만 이게 웬걸,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가 활약을 한다는 특징이 사람을 사로잡았나 보다. 비슷한 설화를 선조들도 공유하였다. 골자는 비슷하다. 선계로 들어가서 예쁜 처를 얻고 환란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개연성보다는 우연성과 통쾌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겹쳐 보인다. 왜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을까. 「관동 가는 길에서 비를 맞다가 선계로 들어가다」를 봐보자.

조선 시대 이세계 이야기

인조 가평군에서의 일이다. 향교에서 공부하는 한 유생이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로 아직 장가는 들지 않았으며 문장과 역사를 제법 알고 있었다. 마침 일이 생겨 관동으로 가게 되었다. 걸음이 느린 망아지를 타고 어린 종 하나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어느 산 아래 이르렀을 때다. 길에서 비를 만나 반나절을 흠뻑 젖게 되었다. 그 와중에 어린 종이 망아지 앞에서 쓰러져 죽었다. 유생은 놀랍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중략) 이번에는 자신이 타던 망아지가 땅에 고꾸라져 죽는 게 아닌가?

가히 호러 영화 도입부다. 점점 컴컴해지는 주변과 픽픽 쓰러져 죽어버리는 주변 인물들. 너무나도 불길한 상황이다. 유생이 꽁지를 말고 도망치지 않은 것이 대단할 정도이다. 주인공은 아주 기이하게 길을 잃는다. 조력자를 만남도 굉장히 기묘하게 이루어진다. 지팡이를 짚은 백발 백미 노인이 홀연히 등장한다. 노인은 대성통곡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노인은 유생의 길을 정해주었고 그렇게 유생은 이세계로 진입한다.
그들이 선계로 갈 것이라는 단서가 곳곳에서 보인다. 우선 비에 흠뻑 젖는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린다. 천상과 지상을 매개하는 존재이다. 유생 일행은 비를 만나고 맞는다. 천상에서 내린 옷을 입은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갑자기 죽는 것도 선계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다. 앞선 이야기 속 장도령의 시해(尸解)가 예이다. 길을 잃고, 비를 맞은 데다, 죽어버리기까지. 그들은 선계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 다만 이야기는 유생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그곳엔 굵직한 소나무와 쭉 뻗은 대나무가 안팎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숲을 이루었고, 그 너머로 과연 큰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시냇물 바닥엔 하얀 돌이 편편하게 깔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로 앞에서 저 멀리까지 모두 하나의 바위였다. 물빛은 옥과 같아 마치 흰 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중략)
누각 안에는 몇 자쯤 되는 흰 돌이 한가운데 놓여있다. 옥처럼 깨끗하고 매끄러운 데다가 숫돌처럼 편편하였다. 자세히 훑어보니 정말 티 하나 없이 말끔하였다. 이렇듯 세 칸 안에는 돌이 하나씩 있었다. 누각 위에는 달랑 돌로 만든 궤안(几案) 하나만 있었는데, 그 위엔 『주역(周易)』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궤안 앞에는 돌 화로가 놓여있어 한 가닥 향연기가 푸른빛을 띠며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선계의 풍경이다. 특이한 점들이 여럿 보인다. 우선 ‘흰 돌’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도 있겠으나 깊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주역』이 한 권 놓였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담은 책을 놔둔 느낌. ‘이 책 하나면 너도 선인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경내에 들어와 보니 웬 노인이 그에게 말을 건다. 생김새가 기묘하다. 체형은 거북이고 얼굴은 학이다. 옷은 매미 날개같이 얇은 청사포고 아홉 개의 마디가 있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외모가 아닌지라 보자마자 주인어른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주인의 생김새만큼 궁궐도 범속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노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이 집주인 늙은이요.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소.”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점이 궁금하다. 그와 도대체 무슨 인연이 있기에 주인은 그를 기다려왔을까. 사실 큰 인연은 없어 보인다.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자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자네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숙연(宿緣)이 있어서일 걸세.” ‘~일 걸세’라고 한 것을 보면 노인도 확실치는 않은 모양이다. 그의 선계 입문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여 이곳에 눌러앉은 지 이러구러 삼 년이 흘렀다. 어느 날 유생은 아내와 함께 별일 없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내는 영문을 몰라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나는 시골의 미천한 사람으로 이렇게 선옹의 사위가 되었으니 그 즐거움이야 지극하다 할 것이오. 다만 시골집에는 노모가 아직 계신데도 뵙지 못한 지 어느덧 삼 년이 되었소. 뵙고픈 마음이 사무쳐 이렇게 눈물이 나는구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내는 웃으며 위로하였다.
“당신이 어머님을 그리워하시는군요. 가고 싶으면 가시면 되거늘 어찌 우십니까?”

그렇게 그가 머문 지 3년이 지났다. 3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성대하게 결혼식도 올리고 여러 곳으로 유람 가기도 했다. 환골탈태도 하여 속세의 태를 벗어내기도 하였다. 3년이 지났음에도 인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버리진 못하였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라면 다시는 속세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할 것 같지만 아내는 시원하게 가도 된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막히는, 소위 ‘고구마’ 같은 부분은 전혀 없다.
‘3’이라는 숫자에 눈이 간다. 온 지 3년, 바다 위 3개의 섬 등등. 3이 계속해서 작품에 나온다. 3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그중 동서양이 모두 공유하는 의미는 ‘완전’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나 불교의 삼신불(三身佛) 개념 등이 예이다. 도교 역시 이를 공유한다. 『도덕경』에서 이르기를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으며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 [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라고 하였다. 3이 계속 나옴은 이와 관련 있다.
3년의 기간 동안 도교의 것들이 많이 나온다.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나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같은 곳, ‘옥호로(玉葫蘆)’ 같은 것들. 도교적 개념들이 많이 나타난다. 지금으로 따지면 판타지 용어와 비슷하다. 이 이야기가 당시에 어떠한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상상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우연성과 많은 도교적 용어. 이 이야기의 허구성과 환상성은 매우 짙다.

유생이 집에 돌아온 지도 다시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뜬금없이 선옹의 심부름꾼이 집을 찾아왔다. 두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선옹과 아내의 편지까지 조달하였다. 편지는 대략, ‘내년에 인간 세상에 큰 난리가 일어나서 조만간 네가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어육이 되고 말겠기에 사자를 보내니, 너는 사자를 따라 집안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중략)
온 식구가 모두 출발한 이때는 을해년(1635)이었다. 이후로는 소식이 뚝 끊기고 말았는데, 이듬해 병자대란이 발발하였다. 과연 유생이 살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사람들이 대부분 죽음을 당하였다.

마지막에 이르러 환상에 머물던 이야기가 현실로 떨어진다. 휘황찬란한 선계를 비추던 이야기가 갑자기 참담한 현실을 비춘다. 환상 속에 현실을 슬쩍 보여주어 환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드러낸다. 현실이 혼란스러운 만큼 환상성이 짙어진다.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부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계로 들어간 유생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 시대 민중의 바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선계로 오르는 존재들은 모두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문학과 역사에 조금 통달[粗通文史]하였고 아직 장가에 가지 않은 유생과 걸음이 느린 조그마한 관단마(款段馬), 어린 종[童奴]까지. 모두 미성숙한 존재들이다. 그러한 존재들이 길을 잃고 다른 세계로 가는 줄거리는 참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선계로 갈 수 있던 이유가 그들이 미성숙했기 때문이 아닐까. 초라한 존재들이 이계로 가 새 삶을 얻는 이야기를 민중들이 원했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팍팍했던 것이 아닐까.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은 차라리 길을 잃어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자 한다. 우연히 신선 세계로 들어가는 이야기는 그들의 욕망이 가득 담겨 있다. 민중들의 욕망은 시대의 표정을 반영한다. 지금의 우리도 그렇다.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 계발 서적에 몰두하고 소위 사이다형 웹소설에 열광하는 요즈음 경향이, 사회가 얼마나 힘든지를 방증한다. 차라리 길을 잃고 새로운 세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음을 보여준다.
정해진 길 위만을 걷지 말고 한 번 길을 잃어보자. 잠시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이 시작되고 새로운 세계가 드러난다. 삶은 트랙 위를 벗어난다고 하여 실격되는 레이스가 아니다. 무한한 갈래의 샛길이 나 있는, 그런 산책로이다. 우리는 그 위의 경쟁자가 아닌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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