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꽃잎 006. 이미 걷고 있는 나만의 길,

<도강록>

by 용신선


지금 걷고 있나요? 뛰고 있나요? 아니면

멈춰 있나요?


뚜벅뚜벅, 저벅저벅, 또각또각, …….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그 혹은 그녀는 지금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글을 적고 있는 저자도 늘 어딘가를 향하면서 걷곤 한다. 이렇게 목적지가 정해진 걸음이라면 그 걸음걸이는 행선지의 공간과 장소에 따라, 가는 목적과 뜻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한다. 같은 걸음이라도 종종걸음, 잰걸음, 뜀박질 등 속도도 다를 것이다. 경사에 따라 가파른 걸음이 있고, 완만한 걸음이 있을 것이다. 보폭에 따라, 발을 옮기는 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고, 신발의 유무, 종류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자세에 따라서도 걸음걸이는 달라진다. 스스로 물어보기를, 나는 지금 걷고 있는가? 뛰고 있는가? 아니면 멈추어 있는가?이다. 그런데 내 걸음에 대해서 묻기 전에 살펴야 할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길'이다. 길의 방향과 길의 종류에 대해서, 길에 대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길’ 위인가요? 아니면

길 바깥인가요?


사람들은 대체로 '길 다운 길'을 걷기를 바라는 것 같다. 길 답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많은 이들이 걷는 길이다. 그 길은 이미 나 있는 길이며, 제도의 길이라 하겠다. 질 닦여진 평평대로의 길인 것이다. 포장도 예쁘게 되어 있어 걸음을 옮기기가 편한 길. 분명히 목적지가 뚜렷한 노정(路程)으로의 여정을 바라는데 누구든 그 길 위에 있거나 아니면 길 바깥에 있을 것이다. 여기, 분명 길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 바깥에 있는, 경계의 길 위에 있는 사내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짙은 구름이 꽉 덮였고 빗기운이 산에 가득했다. 소쇄가 끝나자 행장을 정돈하고, 가서와 모든 곳에 보낼 답장을 손수 봉하여 파발 편에 부치고 나서, 아침으로 죽을 조금 마시고, 천천히 관에 이르렀다. 모든 비장은 벌써 군복과 전립을 갖추었는데, 머리에는 은화, 운월을 달고 공작의 깃을 꽂았고, 허리에는 남방사주 전대를 두르고 환도를 찼으며, 손에는 짧은 채찍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모양이 어떻소.” 하며 떠든다. 그중에 노 참봉은 첩리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우람스러워 보인다. 정 진사가 웃음으로 맞으면서, “오늘은 정말 강을 건너게 되겠죠?” 하자, 노 참봉은 옆에서, “이제 곧 강을 건널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둘에게, “옳지, 옳아.” 했다. 거의 열흘이나 관에 묵어서 모두들 지루하여 훌쩍 날고 싶은 기분이다. 가뜩이나 장마에 강이 불어서 더욱 조급하던 참에 떠날 날짜가 닥치고 보니, 이제는 비록 건너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멀리 앞 길을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하다.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매 운산이 아득하여 인정이 여기에 이르자 서글퍼서 후회할 생각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평생의 장유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번 구경을 해야지.” 하고,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실로 둘째에 속할 것이고, 그들의, “오늘에야 강을 건넌다.” 하면서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곧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일 뿐이다. 역관 김진하는 늙고 병이 위중하여 여기서 떨어져 되돌아가게 되자, 정중하게 하직하니 서글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1』, 올재, 2017, 44~46쪽)


지금 우리가 나들이를 나가려고 현관을 나서며 모자를 집어든다면, 장신구를 집어든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멋', '패션'을 위한 아이템으로의 착장(着裝)에 지남 아닐 것이다. 전근대 조선에서 모자는 곧 '신분'이었으니 단순한 장식이나 멋이 아닌 것이다. 전립에 공작의 깃이 꼽혀 있으니 그 신분을 알만하다. 연암의 머리에도 무언가 모자처럼 씌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연암의 갓은 벼슬아치로의 그것이 아니라 단지 양반으로의 표식일 뿐이었다. 지위를 과시할 만한 저들은 멋 내고 뽐내기 바쁘다. 몸이 더 좋아 보일만큼 꾸며 입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표식을 꾸미기 바빴는지 모르지만, 연암의 마음은 다른 것으로 바빴다. 난생처음으로 국경 바깥의 나라를 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행단의 마음은 또 연암의 심정과는 어딘가 달랐을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이들도 있다. 호랑이를 내쫓고 더위와 싸우며 험한 고행길을 떠나야 한다니 마음이 무겁다. 그러니 '소확행'처럼 의복을 갖추며 얻는 기쁨으로나마 그 무거운 마음을 덜어낼 까닭도 있을지 모른다.



지천명에 떠난 연암의 길 위

그리고 언덕 언저리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쫑긋한 품이 참으로 만 리를 달릴 듯싶다. 창대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다 한들 근심할 것이 없었다.

(중략)

혼자 걸어서 문 루에 올라 성 밑을 굽어보니, 창대가 혼자 말을 잡고 섰고, 장복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 뒤에 장복이 길 옆 한 작은 일각문에 버티고 서서 위아래를 기웃기웃 바라보더니 이윽고 둘은 삿갓으로 비를 가리며 손에는 조그만 오지병을 들고 바람 나게 걸어온다. 알고 보니 둘이서 저희들 주머니를 털어서 돈 스물여섯 푼이 나왔는데, 우리 돈으로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터에 그렇다고 길에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술을 샀다 한다. 내가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둘은, “입에 대지도 못하옵죠.” 한다. 나는, “네놈들이 어찌 술을 할 줄 알겠니.”하고 한바탕 꾸짖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 위안하는 말로, “이도 먼 길 나그네에겐 한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 혼자서 잠자코 잔 부어 마실 제 동쪽으로 용만 · 철산의 모든 메를 바라보니 만첩의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스스로 이번 길에 아무 탈 없기를 빌고, 다시금 한 잔을 부어 다음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그러고도 병을 흔들어 본즉, 오히려 몇 잔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려서 말을 위하여 빌었다.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1』, 올재, 2017, 46~47쪽.)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에게 짐꾸리기만큼 바쁘고도 즐거운 것이 또 있으랴. 뛰어난 여행자라면 짐은 간소할 것이다. 아무리 나라 바깥으로의 초행길이라 한들 팔도 안에서 돌아다닐 때와 그 무엇이 다르랴. 노트북, 필기구, 거울, 책 몇 권, 스마트폰 충전기, 이 정도면 되었지. 아무렴 충분하다! 비밀번호로 여는 트렁크도 없고, 여권도 없다. 공항에 가는 것도, 항구에 가는 것도 아니다. 육로로 떠나는 사행길이다. 말 위에 앉아 갈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공항검색대가 부담스럽다면 무언가 짐이 잘못된 것이겠지. 연암의 짐은 바르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맨 정신으로는 경계를 넘지 못하겠다. 술의 기운에 힘입어 훌쩍 넘어보리라 경계. 못 마실 술이라도 그래도 한 잔 들이켜야겠다 싶은 일꾼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농을 건네는 연암의 마음이 푸근하다. 용만(龍灣) 푸른 압록강과 철산(鐵山), 고향 산천이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 이제 고향땅은 만첩의 구름 저편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제 '저곳'에서 새로운 구름과 산천을 만나리라.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공이 노력한 보람으로 살별과 번개처럼 배가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하여 하룻밤이 격한 듯싶었다. 저 통군정의 기둥과 난간과 헌함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것 같고, 정송 나온 이들이 모랫벌에 섰는데 오히려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내가 홍 군 명복더러, “자네, 길을 잘 아는가?” 하니, 홍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공손히 반문한다. 나는 도,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했다. 홍은, “이른바.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씀을 지적한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마땅히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일 것일세.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 마치 이 물가나 언덕이 있음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 찾을 게 아니라, 곧 이 물과 언덕 가에 있는 것이란 말이야.” 하고 답했다. 홍은 또, “외람히 다시 여쭈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또 답했다. “옛글에 ‘인심은 오직 위태해지고 도심은 오직 가늘어질 뿐’이라고 하였는데, 저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기하학에 있어서 한 획의 선들을변증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오히려 그 세밀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여, 곧 빛이 있고 없음의 가늠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에 불씨는 다만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였지. 그러므로 그 즈음에 선처함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 능할 수 있을 테니 옛날 정의 자산 같은 이면 능히 그러할 수 있겠지.” 이렇게 수작하는 사이에 배는 벌써 언덕에 닿았다. (중략) 이때 커다란 뱃목이 거센 물살에 떠내려 온다. 시대의 이름가 멀리서, “웨이.” 하고 고함친다. 이는 남을 부르는 소리인데, 저들을 높이는 말이다. 한 사람이 뗏목에 일어서서, “당신들은 어찌 철 아닌 때에 조공을 바치러 중국을 가시나요? 이 더위에 먼 길을 가시려면 오죽이나 고생되겠소.” 한다.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1』, 올재, 2017, 50~52쪽.)


"도를 아십니까?" 이 질문에 당황하는 것은 거리를 걷던 필자만이 아니다. 어쩌면 이 질문을 던진 이도 당황했을지 모른다. 본인도 모를 '도'를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고 단 한 번도 "모르겠데요?"라던가, "알고 있지요."라고 대답한 적이 없다.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그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다. 거리를 걷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나 받는 이나 서로 '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 그러나 연암의 기록 속 두 남자의 대화 사이에는 길이 놓인다. 선생에 의하면 길은 '언저리'에 있다. 이쪽과 저쪽의 언저리에 길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는 길이 무엇인지 알기에 보일 뿐이다. 길을 모르는 이에게는 대로가 펼쳐진들 길이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나침반은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 리처드 커니가 그랬듯이 지도조차 소용없다. 길 없는 길 위에는 온갖 괴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할 테니. 그러나 연암의 지남철(指南鐵)은 뱅뱅 돌지 않는다. 북벌을 외치는 이들에게 청국은 괴물천지일 것이겠지만 북학을 생각하고 품고 있는 연암에게 청나라는 문명국이며 '길'이었을 것이다. 하늘 뜻을 살피고도 남을 늦깎이 여행자여서 그랬을까?



내가 알게 모르게 걷고 있는 나만의 길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길 위에 있기도 하고, 길 바깥에 있기도 하다. 길 언저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내가 알게 모르게 이미 나는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넥타이를 고르느라, 모자를 선별하느라, 신발을 뒤적거리느라 엉뚱한 데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길을 잃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길을 잃어갈 것이 아니라, 길을 얻어가고, 길을 알아가야 할 것이다. 내 주머니에도 나침반이 있고, 지도가 있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이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다. 나침반 애플리케이션이 알려주는 동서남북이 아니다. 연암이 가리키는 길도 아니다. 오직 세상 나 만이 아는 길이다. 내 안에는 나 만 알아볼 수 있는 지도가 있고, 나 만의 동서남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언저리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헝그리 정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언저리 정신'아닐까? 자, 강을 건너야 한다. 도강의 기록이다. 강을 건너기에 앞서 길을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푸른 강이라 했지만 물살이 만만치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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