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수필>
찰칵찰칵. 우리는 스마트폰에서 미세한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찰나의 순간을 담아낸다. 1초가 75 등분된 순간의 조각 '찰나(刹那)'. 이것은 불교용어다. 찰칵찰칵 찰나를 담아내는 이들은 더 이상 현상소를 찾지 않는다. 아날로그필름에 빨간 사인펜으로 현상할 사진을 체크하지도 않는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갤러리 폴더에는 총천연색의 디지털 사진으로 순간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가락을 쓰윽 움직여 삭제해 버리면 그만이다.
오늘도 우리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 렌즈만큼이나 깜빡깜빡 거리며 찰칵찰칵 무수히 동영상을 촬영하는 기관이 있으니 곧 우리의 '눈'이다. 스마트폰은 어디까지나 전기로 구동되는 탓에 아무리 첨단의 장비일지라도 '발열'이 발생한다. 저장에도 GB, TB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어떤 광학렌즈보다도 섬세하면서도 어리석다. 용량에는 한계가 없다. 필요한 것만 저장하고 불필요한 것을 지우는 것도 빛의 속도인데 그렇다고 발열이 발생되는 것도 아니다.
독자 분의 눈에 칼라렌즈나 콘택트렌즈가 착용되어 있을지, 아니면 라식과 라섹의 흔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경을 쓰거나 아니거나 독자 분의 눈은 오늘도 무수한 광경을 스치고 또 스쳤을 것이며 그것의 일부를 뇌에 기록하였을 것이다. 박 연암도 마찬가지였다. 일신수필(馹迅隨筆)을 통해 그의 동공에 맺혔던 상들의 필름을, 잔영을 볼 수 있다. 혹자(或者)는 이를 오늘의 렌터카 업소 같은 역참(驛站)을 지나며 쓴 에세이라고도 풀이했지만 <일신수필>은 '말에 올라타 지난 듯이 쓴 수필'이라는 뉘앙스를 담아낸 타이틀이다. 쏜살같이 스치며 남긴 기록이라는 것이다. 성격도 급하셔라! 10시 10분을 가리키는 듯한 자화상 속눈썹 각도만큼이나 가파르게 지나간 풍경들. 대체 연암 박지원은 <일신수필> 속에서 무엇을 스치고 지났으며 무엇을 머릿속에 남기셨던가? 그의 동공셔터가 연신 찰칵찰칵 촬영한 중원 땅의 풍경에는 어떤 상징과 의미들이 있었던가 살펴보자.
연암에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어떠하였을까? 선생은 애*폰을 쓰셨을까 아니면 겔*시폰을 쓰셨을까 이런 게 궁금하지는 않다. 여하간 덩치 큰 사내는 스마트폰 대신 붓으로 순간을 적셔 남겼다. 곱게 간 먹을 흠뻑 빨아들인 연암의 붓은 획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재치 있게 방대한 정보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일신수필(馹汛隨筆) 序
한갓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이들과 학문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의 평생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에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일 어떤 이가 성인이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말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를 보살핀다 하면 그는 곧 환망된 일이라고 배격할 것이며, 태서(泰西: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을 둘러 다녔다 하면, 그는 괴이하고도 허탄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함께 천지 사이의 크나큰 구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1』, 올재, 2017, 206쪽.
필자는 늘 입으로만 말하고, 팔랑거리는 얇은 귀에 들어온 소리들에만 의지하곤 한다. 그러니 연암선생은 나와는 대화를 나누지 않으시지 않을까 염려된다. 소위 '~카더라' 통신에, 페이크(fake) 뉴스에 온 감각을 집중하는 이들은 18세기의 조선에도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서양인들이 큰 배를 타고 80일간의 세계일주라도 했다 하면 편협하고 옹졸한 지식인들은 괴이하고 허탄한 이야기라고 꾸짖는단다. 아, 연암은 외로웠다. 대체 누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박지원과 코드가 통할 만한 이들은 백탑문인이 전부인가? 아니다. 우리들도 충분히 연암과 이야기를 나눌 만하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입과 귀의 두께를 두텁게 하면서 우선 연암 선생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이적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으려거든, 하물며 삼대 이후의 성제, 명왕과 한, 당, 송, 명 등 여러 나라의 고유한 옛것인들 어떨쏘냐.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힘을 분히 여겨서 중화의 숭배할 만한 진실 그것마저 물리친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이적을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를 열어서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 굽기, 풀무불기 등으로부터 공업, 상업에 이르기까지도 배우지 않음이 없으며,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인민들에게 이롭게 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은 하사(下士: 하류 선비)이지마는 이제 한마디 한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또 똥부스러기에도 있다.”고 하련다.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1』, 올재, 2017, 212~213쪽.
선생은 스스로를 '하류 선비'로 겸칭하였지만 그의 생각은 정말로 아래(下)의 바닥을 치고 올라와 용솟음친다. 그에게 장관은 태산의 정상에 있는 것도, 높다란 탑꼭대기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암의 시선은 늘 '아래'에 있으니 떨어져 나간 기와 조각과 짖뭉겨진 똥부스러기가 그것이었다. 기와 조각과 똥부스러기를 청인들이 어떻게 활용하는지 연암은 열심히 자신의 눈이 스쳐 지나간 풍경들을 랩송처럼 쏟아낸다.
거제(車制)
타는 수레는 태평차(太平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팔꿈치에 닿으며 바퀴마다 살이 서른 개인데, 대추나무로 둥글게 테를 메우고 쇳조각과 쇠못을 온 바퀴에 입혔다. (중략)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갈 수 있으나 먼 길을 가려면 말이나 노새 수를 더 늘린다. 짐을 싣는 것은 대차(大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태평차보다 조금 덜한 듯하며 바큇살은 입(廿)자 모양이고, 싣는 수량은 8백 근으로 정하여 말 두필을 메우고, 8백 근이 넘을 경우에는 짐을 보아서 말을 늘린다. (중략) 말 모는 사람을 ‘칸처더〔看車的〕’라 부르며, 그는 짐 위에 덩실 높이 앉아서 손에는 긴 채찍을 쥐고 길이 두 발이나 되는 끈 두 개를 그 끝에 매어서, 그것을 휘둘러 때리되 그중에 힘내지 않는 놈은 귀며 옆구리며 헤아리지 않고 때리고, 손에 익으면 더욱 잘 맞는다. 그 채찍질하는소리가 우레처럼 요란스럽다. 독륜차(獨輪車)는 뒤에서 한 사람이 칫대를 잡고 수레를 밀도록 되어 있다. 한가운데쯤 바퀴를 달았는데 바퀴가 수레바탕 위로 반이나 솟았으며, 양쪽이 상자처럼 되어 싣는 물건이 꼭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후략)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1』, 올재, 2017, 218~219쪽.
기와조각과 분양에 잠시 머물던 눈은 이제 궤도를 이룬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자동차를 만들고, 아우토반 부럽지 않은 도로를 닦고 초고속철마가 마음 놓고 달릴 레일을 전국에 깔아놓았다는 것을 선생이 보신다면 어떤 생각이 드실지 궁금하다. 청나라에서 선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퀴'와 '길'이었다. 우선 여기에서는 수레차에 대한 이야기를 한가득 늘어놓는다. 주행방법까지도 묘사해 두었다. 구범진 교수의 지적대로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연암의 위치를 생각하면 공식업무에서의 목격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었겠지만 비공식적 저잣거리에서의 목격은 생중계 라이브방송에 가깝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세단, SUV, RV, 스포츠카처럼 디젤, 가솔린, 하이브리드, 전기처럼 크기와 구동방식에 모델별로 차등이 있다. 마력(HP)의 세기도 엔진 배기통에 따라 다르듯 전근대의 수레도 다르지 않다.
내 일찍이 담헌 홍덕보, 참봉 이성재와 더불어 거제를 이야기할제, “수레의 제도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한다. 이른바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 두 바퀴 사이에 일정한 본을 어기지 않음을 이름이다. 그리하면 수레가 천이고 만이고 간에 그 바퀴 자리는 하나로 통일될 것이니, 이른바 거동궤(車同軌)는 곧 이를 두고 말함이다. 만일 두 바퀴 사이를 마음대로 넓히고 좁힌다면 길 가운데 바퀴 자리가 한 틀에 들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제 천 리 길을 오면서 날마다 수없이 많은 수레를 보았으나, 앞 수레와 뒷 수레가 언제나 한 자국을 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쓰지 않고도 같이 되는 것을 일철(一轍)이라 하고, 뒤에서 앞을 가리켜 전철(前轍)이라 한다. 성 문턱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서 홈통을 이루니 이는 이른바 ‘성문지궤(城門之軌:<맹자>에 나오는 구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혀 수레가 없음은 아니나 그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하는 말에,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하니, 이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을 걱정하리오.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1』, 올재, 2017, 220~221쪽.
자동차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도로 사정이다. 비포장도로, 포장도로, 국도, 고속도로, 레일, 케이블, '길'의 종류에 따라 무엇이 그 길 위에 오를 수 있는지가 갈린다. 어떻게 갈 수 있는가도 달라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가 아니다. 길을 따라가면 어느새 서울에 가닿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애쓰지 않아도 한 길이 된다. 청국이 있던 곳에서는 오늘날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신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구상하고 있다지만 연암의 시절 청나라는 조선에서 온 중년의 사내에게 '도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수레의 실크로드였다. '전철(前轍'을 밟지 말아야 하는데 도리어 전철을 '제대로' 지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타이어'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조선의 바퀴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기 일쑤였는가 보다. 이런 바퀴는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런 바퀴로는 레일을 이탈하기 십상이다. 궤도를 벗어나니 행성이 되지 못하고 그만 혜성이 되고 만다.
연암의 시선이 포착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박지원의 글을 읽는다고 하여 우리의 눈도 기와조각과 똥부스러기와 수레와 바퀴자국에 머문다면 곤란하다. 그 시절에는 그곳에 눈을 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놓치고 있을 '무엇'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은 명승고적, 맛집탐방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면세점과 고가명품에 옴짝달싹 못할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선생은 오래된 수필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가고 싶은 데로 마구잡이로 간 것이 아니며, 붓가는데로 쓴 것 역시도 아니었다. 그의 눈은 함부로 굴려지지 않았다. 눈은 다만 순간을 붙잡을 뿐이다. 그 순간을 영원이 되게 하는 것은 좌뇌와 우뇌이다. 우리의 두뇌는 순간을 영원이게 한다. 오늘날의 기와조각, 오늘날의 똥부스러기, 오늘날의 수레, 오늘날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눈이 부지런히 읽어야 할 것은 간판과 메뉴가 전부가 아니다. 증권시세와 부동산시장만이 아니다. 환율과 경제지표만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며 무엇을 영원으로 담아낼 것인가? 선생은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세상천지에 가장 쓸모 있을 뿐 아니라 고부가가치가 있는 아이템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정말 긴요한 것이라고, 쓸모가 너무 많다고 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대상이 정말 그렇게도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시금 돌아볼 때가 아닐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이라는 멈추지 않는 야생마의 등 위에 올라타 있다. 말안장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채 무작정 어디론가 뛰어가는 야생마일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만 하여도 전철 안에서, 버스 차창 밖으로 무수한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여러 역참을 지나는데 한 두 개 지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라는 말안장 위에서 우리는 붓을 든다. 아니 태블릿 펜을 든다. 터치스크린에 스치듯이 남길 것이 무엇인지 멈추지 않는 시간이라는 야생마를 타고 정신없이 흐르는 풍경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붙들어 보려고 한다. 나의 눈이 머무는 곳, 찰나의 순간이라도 더 보려고 하는 곳. 그 시선의 끝에 나의 정체가 있고, 역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