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꽃잎 005. '하루'라는 강을 건너는 법,

<일야구도하기>

by 용신선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어릴 적 외조모께서 다니시던 교회에 가면 가장 익숙하게 들렸던 찬송가는 바로 이 흑인영가 <내게 강 같은 평화(I've Got Peace Like a River)>였다. 성경 구절에 기반을 둔 가사만큼이나 소리의 물결처럼 들려오던 이 찬송가를 듣던 시절에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이 영가를 곱씹어 보면 당시에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던 분들 중 몇 분이나 정말 가사만큼의 평화를 마음에 누리고 계셨는지 궁금해진다. 정말로 강은 평온하고 평화로운가? 강이 평화의 메타포였던가?



거센 물살의 호수와 강,

곤히 잠든 예수와 곤두선 조선인들



동아시아 서사계보에서 '강'은 흔히 백수광부와 그의 처가 처한 강가의 상황에서 시작되곤 한다. <공무도하가>가 그것이다.


公無渡河(공무도하)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그대 결국 물을 건너셨도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가신 임을 어이할꼬.


미친 사내[白首狂夫]의 처가 부른 오래된 노래에서 처는 남편에게 제발 물을 건너지 말라고 간절히 외치고 또 외친다. 그럼에도 백수광부처럼 미친 듯이 강을 건넌 사내들이 있었다. 저 건너편으로 가야만 했던 까닭이 있고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성경> 속에서 '호수'와 '강' 그리고 '강 건너', '배', '예수'는 빈번히 등장하곤 한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두고 늘 저 강 건너편으로 '물 위를 걸어' 가시거나, 풍랑으로 뒤집힐 듯한 배 위에서 곤히 잠들곤 한다. 지레 겁을 삼킨 것은 예수만이 아니었다. 외교의 임무를 갖고 공식 사행을 떠난 조선 사내들 역시 겁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들여다보자.


물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우러러 하늘을 보는데, 나는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쳐다보는 것은 하늘에 묵도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이 돌아 탕탕히 흐르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과 함께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가 나면서 물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늘에 비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함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랴.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모르는 것이다. 요하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귀와 눈이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누워 지내는 것 같았다. (중략) 소리와 빛은 외물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2』, 올재, 2017, 400~401쪽.)


'살'과 '몸'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가 연암과 함께 강을 건넜다면 무슨 말을 연암에게 건네었을까? <일야구도하기> 속 연암의 글은 '신체성'으로 가득하다. 워터밤(WATERBOMB) 축제 속 물총, 물대포 수준이 아니다. 놀이동산의 플룸라이드(Flume ride) 수준도 아니다. 연암의 몸과 살로 튀는 물은 그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것이다. 연암을 포함한 사행단 일행은 한밤 중에 강을 건너는 중이다. 일행들의 일부는 머리를 하늘로 우러른다.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사내여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쳐다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낮에 건너는 강은 눈에 시달리고, 밤에 건너는 강은 귀에 시달린다. 연암과 그 주변의 일행들의 외관(外官, äußerer Sinn)이 겪는 것은 거센 물결처럼 정신산만 한 감각으로 가득한 것이다.



하루에 아홉 번 방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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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는 두 사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 만 승과 전기 만 대나 전포 만 가와 전고 만 좌로써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우뚝 솟아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 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면 큰비가 한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와 포고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드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가 겸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과 우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지금 나는 밤 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박지원著 · 이가원譯, 『열하일기 2』, 올재, 2017, 399~400쪽.)


한밤 중에 강을 건넌다. 연암의 감관(感官 , Sinn)은 한층 예민해져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연암은 내관(內官, innerer Sinn)을 통해서 강을 건넌다. 연암의 마음이 강의 물결이 된다. 사행단의 정신이 물살이 된다. 연암은 '도로 눈을 감고' 귀를 통해서만 강을 건너는 이들 사이에서 심안(心眼)을 뜨고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 결코 강은 평화롭지 않다. 그런 거칠고 거센 강을 하룻밤 사이에 아홉 번이나 건넜다.



매일 건너야 하는 ‘하루’라는 강


중학교 1학년이던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강을 건너던 무수한 사람들이 부실시공으로 희생되었다. 강 위에 떨어진 교량의 일부 조각은 처참하고 비참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강을 건너던 것뿐이었는데, 그분들은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24시간, 1,440분, 86,400초라는 시간 단위가 곧 우리가 부르는 '하루'의 범위이다. 우리는 '매일'이라는 강을 나 스스로 알게 모르게 매일 매 순간 건너고 또 건넌다. 우리가 건너야 하는 강이 '낮'인지, '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눈과 귀에 속아 강물에 휩쓸리고 마는지를 깨달아야 할 뿐이다. 하루라는 강을 건너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데, 하루라는 강은 돌다리는커녕 징검다리조차 없는 듯싶다. 나의 감관은 정신 사나운 외관에 그만 내관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럴수록, 물살이 거셀수록, 내관의 지각을 깨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강을 건너는 중이다. 백수광부의 처가 건너지 말라는 '건너편'으로 자꾸만 자꾸만 깊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매일 이 강을 건너야 한다. 하룻밤 사이에 아홉 번을 건너야 할지도 모른다. 부디 오늘도 무사히 건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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