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풀 004. 동물에서 '이물'이 된 그,

<토끼전>

by 용신선




애완동물? 반려동물? 혐오동물?!


멍멍, 짹짹, 찍찍. 이 무슨 소리인가? 유년시절 우리 가족은 다양한 동물을 집안에 두었다. 어류, 조류, 포유류, 설치류 등 종을 달리 한 민물고기, 잉꼬, 요크셔테리어, 햄스터 등이 저마다 소리를 내며 우리 가족과 동거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대상으로의 애완동물(愛玩動物)은 사람과 더불어 지내는 동반의 존재인 반려동물(伴侶動物)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을 혐오하는 시선도 만만치가 않다. 이는 쉽게 동물학대로 이어져 눈살 찌푸리게 하는 미디어 기사로 보도되기도 한다. 인간도 지구라는 푸른 행성에 붙어사는 무수한 생물종의 하나이며 동물의 한 종이다. 우리 역시 유기체적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에 대한 시선을 달리하거나 같이하곤 하는 것이다.

동네방네 오래된 골목을 누비는, 흔히 '도둑고양이'라 칭하던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내는 무서운 소리에 놀라 도망간다. 무슨 소리인가? 재개발은 건설현장의 공사음이다. 이처럼 재개발 설비가 한동안 들어선 후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골목과 공터가 있던 자리를 대체한다. 단지 입주민이 늘어날수록 '목줄'에 묶여 산책하는 개와 강아지들이 들고양이처럼 자주 보인다. 단지 주변에는 동물병원과 동물용품점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보도블록 위에 방금 어떤 이의 반려동물이 흔적을 남겨 냄새를 피우기도 한다. 동물원 속 우리에 갇힌 동물부터,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서커스에 동원되는 동물들, 그리고 일상 주변에서 마주하는 반려동물과 혐오동물로 낙인찍혀 포획되거나 학대받는 동물들. 동물들의 생애도 사람의 인생 못지않게 피로하고 피곤한 것 같다. 그렇다면 옛사람들과 동물들은 어떠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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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학 속의 동물과 사람 사이,

서사 속의 동물과 만화 속의 동물


18세기 북학사상이 눈을 뜨기 전까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곧 사유 철학의 왕조국가로 오늘날까지 유명한 세 차례의 논쟁을 겪는다. 조선전기에 있던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쟁, 유학 심성론 중 마음의 양면성에 대한 학설을 논한 우계와 율곡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노론 선비들이 호학과 낙학으로 나뉘어 호락(湖洛) 논쟁으로도 불리는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이 x, y, z의 세 축을 이루며 유교국가 조선의 입체적 사유 면모를 이룬 것이다. 인성과 물성의 동과 이에 대해 논한 인물성동이논쟁은 16세기 중후반에 펼쳐졌던 사칠(四七)논쟁의 심화 버전이자 확장팩이다. 18세기 일원론과 이원론의 논쟁으로 낙학은 인물성동론, 호학은 인물성이론을 보여준다.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을 통해 귀와 신을 들여다본 귀신론의 학자 동봉(東峰) 김시습(1435~1493) 역시 애물의(愛物義)를 통해 끄트머리에서 사람과 동물 간의 우선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파한다.

17세기 서양에서는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는 자신의 동물기계론(bète machine)을 통해 동물을 오토마타와 같은 태엽장치 기계에 비유하여 생명현상을 기계론(mechanism)의 입장으로 보았다. 동물은 자동기계장치에 지나지 않으므로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이다. 동물과 인간의 '사이'를 두고 동 서양이 서로 자신들의 테제(These)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철학계에서 뜨거운 감자였던 동물은 서사계에서도 즐겨 초대되는 손님이 된다. 입말의 구전서사 속 동물이야기부터 산문체로 구성된 동물우화소설들이 그렇고,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즐겨보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속의 동물들이 그러하다. 4족 보행의 동물들은 2족 보행의 인간들의 상상 속에서 역시 인간과 동등한 2족 보행의 캐릭터로 재탄생되곤 한다. 고양이 톰과 생쥐 제리, 벅스바니, 로져 래빗, 장화 신은 고양이, 미키와 미니마우스. 이들은 본래 4족 보행(quadruped) 네발짐승 이어야 하는데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속에서 이들은 어디까지 바이패드(biped)의 두발 캐릭터이다. 심지어 먹이를 위해 존재하는 발톱 대신 사람과 다르지 않은 손가락이 등장하거나 손가락의 개수도 서 너 개가 될 때도 있다.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강제로 품종개량이 이루어져 오래 살지 못하는 반려동물의 일부 종처럼 허구에서 동물은 어디까지나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을 위한 존재로 조작되어 묘사되어 왔다.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이들이 '자동장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까? 인성과 물성을 달리 보는 이들조차 동물을 혐오하는 이들조차 허구화된 동물, 상품화된 동물을 소비하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열쇠고리 키링이 되어서 학생들의 가방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토템(totem)'처럼 주인의 보호정령이 되기도 하고 장식에 그치기도 하는 이들 동물을 선인들은 어떻게 그렸을까? 여기에서는 <토끼전>을 통해 보고자 한다.



‘이물’이 된 토끼 이야기, 〈토끼전〉:

"간 내놓아라"와 "간 두고 왔다"의 '사이'


화설. 대명 성화 년간에 용궁 광택왕 옹강이 즉위하였는데, 하루는 우연히 병을 얻어 병세가 점점 심하여졌으나 백가지 약이 효험이 없어 수궁이 몹시 당황하였다. 하루는 홀연히 도사가 이르러 말하기를, “대왕의 병환이 비록 삼신산 선약이라도 효험이 없을 것이니 육지에 나가 간을 꺼내어 환약을 만들어 잡수시면 곧 나을 것입니다.” 했다. 용왕이 도사의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하는데 한 사람이 나와서, “소신이 비록 재주가 없사오나 인간세상에 나가 토끼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하여 모두 보니 거북의 이성사촌 별주부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충성이 가히 아름답도다.”

(인권환 역주, 『연강학술도서 한국고전문학전집 6 토끼전』,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95, 17쪽.)


한동안 이날치 밴드의 노래 <범 내려온다>가 자주 들려오던 때가 있었다. 퓨전국악 열풍 속에 범은 자주 대중 곁에 내려오고 또 내려오곤 했는데, 이는 <토끼전>의 무수한 이본 중 하나인 판소리 창본 <수궁가>의 한 대목이다. 이 글에서는 토선생을 호 선생이라 부르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라. 서사를 들여다보려면 숨을 참아야 할 것 같다. 짠내 나는 바다 깊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 전문 스킨스쿠버 훈련을 받지 않은 독자들을 <토끼전>은 다짜고짜 깊은 물속으로 끌고 간다. 용왕님이 아프시기 때문이란다. 아쿠아 세계의 신비감을 오롯이 느끼기도 전에 용왕의 건강부터 걱정하게 생겼다. 토끼 간이 눈에 좋을 뿐 아니라 허약체질에도 좋다는 것이 저 수궁까지 소문이 뻗었으니 도사는 육지생물의 간을 처방한다. 처방전은 떨어졌는데 문제는 약재를 구할 이가 없다는 것. 이때 한 수중 동물이 나서는데 '자라'다.

거북은 전 세계 300종으로 척삭동물문 중 파충강에서 거북목(Order Testudines, 컴퓨터를 오래 해서 생기는 거북목증후군의 거북목이 아님)에 속하는 생물체이다. 주둥이 끝이 가늘게 튀어나온 자라는 세계각지에 25종 가량이 분포되어 있는데 한반도에는 오직 한 종만 있다고 한다. 거북의 이성사촌 주부관직의 자라[鼈] 별주부. 그는 이름조차 없이 그저 '별주부'이다. 나쓰메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속 고양이가 이름 없는 고양이였던 것처럼. 이름 없는 별주부 선생이 용감하게 나섰다. 정말로 그의 충성이 '아름다운' 지는 좀 더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별주부가 경개를 따라 올라가니, 갑자기 산중에서 한 짐승이 풀을 뜯어먹으며 꽃을 희롱하며 자신 있고 만족한 듯 내려오고 있었다. 별주부가 몸을 감추고 토끼화상을 내어보니 바로 토끼였다. 별주부가 기뻐하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저 토끼를 잡아다가 우리 대왕께 드려 병이 나으시면 내 마땅히 일등공신이 될 것이다.’ 하고 긴 목을 늘이어 토끼 앞에 나아가 예하고 말하기를, “토선생께 뵈나이다.” 하니 토끼가 자라를 보고 웃으며, “그대 어찌 내 성명을 부르는가? 남생이의 아들인가 목이 길기도 하다.” 했다.

(인권환 역주, 같은 책, 19~21쪽)


물에서 뭍으로 올라온 별주부. 숨고를 틈도 없이 부지런히 왕명을 따르고자 하는 충성심이 눈물겹다. 별주부의 다리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작가는 별주부에게 산행을 시킨다. 등산의 고생 덕분일까 별주부는 토선생을 만나게 된다. 별주부의 시선 속에 토끼의 첫인상은 어디까지나 '약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토끼를 만난 자라는 너무나 반가웠다. 오랜 친구와의 재회에서 오는 반가움이 아니다. '먹잇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별주부 '대가리'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저놈'을 데려가면 자라는 '포상'을 받는다. 수중세계에서, 수궁에서 일등공신이 되어 권력의 단맛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다. 토끼고기의 육즙이 어떠한지, 마블링이 어떠한지는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 별주부를 처음 본 토끼 역시 웃음으로 답한다. 그의 웃음은 어떤 웃음인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고찰하던 그 웃음(Le rire)인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 )의 유머(Humour)가 만든 파열인가. 토끼의 웃음은 어딘지 이때부터 '비웃음'이 아닐까 싶다.


별주부가 크게 기뻐하며, “그대가 가려한다면 물 걱정을 말게나.” 했다. 이에 토끼가 별주부와 함께 물가에 내려와 그 등에 업히어 눈을 감으니 별주부 물에 떠 만경창파를 순식간에 들어가 용궁에 이르렀다. 토끼가 눈을 떠보니 채색 구름이 어리어 있는 가운데 삼층누각 위에 ‘북해용궁’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수졸문들이 벌려 있었다.

(인권환 역주, 27쪽)


뭍짐승이 물짐승의 등에 올라 난생처음 물속으로 들어왔다. 지하국대적의 소굴만큼이나 수중 용궁도 화려 찬란하다. 바닷속에도 채색 구름이 어리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는 조종사들의 '비행착각'현상처럼 토끼의 눈에는 바닷속이 하늘 속만 같은가 보다.


용왕이 토끼에게 명령하기를, “내가 뱃속에 깊은 병이 들어 백약이 효과가 없었는데 뜻밖에 도사의 말을 들으니 너의 간을 먹으면 효험을 보리라 하여 너를 잡아왔으니, 너는 조그만 짐승이오 나는 수궁 대왕이라 너의 뱃속에 든 간을 내어 나의 골수에 든 병을 낫게 함이 어떻겠는가?” 하고 토끼를 동여매라 명령한다. 이에 좌우 나졸들이 달려들어 결박하니 토끼가 몹시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가만히 생각하기를, ‘내 별주부에 속아 사지에 들어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중략) 한참 앉아 있다가 문득 한 꾀를 생각하고 양천대소하니 용왕이 묻기를, “네 무슨 경황에 웃느냐?” 토끼 얼굴 빛을 고치지 않은 채 여쭙기를, “소생이 웃음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별주부가 한 일에 대하여 웃습니다.” (중략) 용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의 말이 극히 간사하구나. 지금 간을 내라 하는데 무슨 딴 말을 하는가?” 하고 호령이 추상 같으니, 토끼 망극하여 방귀를 잘잘 뀌며 반쯤 웃으며 아뢰기를, “세상 사람이 소생을 만나면 약에 쓰려고 간을 달라 하기에 소생이 이루 입막음을 할 길이 없어 간을 내어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고 다녔던 바 마침 별주부를 만나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저 들어왔습니다.”

(인권환 역주, 29~33쪽)


용왕의 첫마디에 토끼는 말 그대로 간 떨어질 뻔했다. 아니, 떨어진 게 아니라 두고 왔다고 해야겠다. 그래야만 이 소름 돋는 위기를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궁대왕 용왕은 크기로 대상을 대한다. 영화 <스타워즈> 속 요다는 "Size matters not! Judge me by my size do you? "라고 제다이 제자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크기'에 대한 깨우침을 주지만 용왕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다. 마치 공장 직원들의 안전과 위생은 뒷전인 공장장처럼, 근로자의 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아는 사장처럼 용왕은 토끼를 하대(下待)한다. 그러나 정작 이 에피소드에서 낮아지고 만 것은 용왕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후로 이런 군주는 오랜만이다. 용왕의 의심은 토끼의 꾀로 사그라든다. 용왕의 눈이 어두운 탓이며, 새빨간 토끼의 눈이 시뻘건 손오공의 눈만큼이나 밝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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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토끼가 전후의 사연을 다 말하니, 암토끼 이 말을 듣고 자라 있는 곳에 가서 자라를 꾸짖어, “이 끔찍하고 무서운 놈아. 전생의 무슨 원수로 남의 백년해로할 남편을 유인하여 간을 내려 하였으니, 우리 남편이 꾀가 없었더라면 죽을뻔 하였다. 네 심술이 그러하니 가다가 긴 목이나 뚝 부러져 죽거나 대가리나 터져 죽을 놈아. 간 먹고 살기는커녕 새로 병이 심해져 곱게 죽지 못하리라.” 자라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요년아 말을 그치고 내 말을 들어보라. 계집이 아무리 요사한들 그토록 매섭게 구느냐? 암상스럽고 발칙하다.” 하더니, 숫토끼가 내달아 와서 자라에게, “네가 나를 업고 망경창파에 왕래하였으니 수고하였거니와 네게 정표할 것이 없으니 낯이 없네 그려.” 자라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용궁을 욕만 하고 간도 안주고 빈 손으로 들어가라 하는가?” 토끼 앙천대소하여, “아무리 미련한 것인들 내 간을 못 얻어 저토록 애를 쓰는가? 만일 우리 친척과 친구들이 알면 틀림없이 네 자등이를 분질러 두 동강이를 낼 것이니 바삐 들어가라.” 하며, 암토끼와 둘이 토녀를 업고 숲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별주부 할 일 없이 탄식하며, “간특한 토끼에게 속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왕을 보겠는가?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글을 지어 바위 위에 부이고 머리를 바위에 땅땅 부딪히어 죽었다.

(인권환 역주, 41~43쪽)


정말로 간이 토끼네 집 어딘가에 고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은 '쓸개 빠진' 별주부는 토끼 부부에게 된통 당하고 만다. 다만 상명하복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인 별주부는 자책하며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아무리 토끼의 비웃음인들 독자는 더 이상 별주부를 비웃을 수 없다. <토끼전>의 비장미는 이 대목에 있는 것이다. '숭고(崇高)'의 미학. 깨어진 것은 자라의 대가리뿐이 아니다. 별주부의 등껍질처럼 단단하던 용왕의 욕망도 부서지고 깨진다.


왕이 말하되, “경 등의 말이 불가하다. 한고조는 인간의 임금이로되 병이 들자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과인은 신명이라 일컬으며 망녕되이 도사의 말을 듣고 저렇듯 하였다가 토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또 조그만 분을 참지 못하여 다른 행동을 하게 되면 이는 한번 잘못을 더함이라, 과인이 하늘 뜻을 모르고 조그만 토끼를 원함이 어찌 어리석음이 아니리오. 그대들은 다시 말을 말라.” 말을 마치고 일성장탄하더니, 태자와 좌우정승을 불러 안에 들어와 유지를 받게 하고 즉시 죽으니, 이때 나이 일천팔백 년이요 재위는 일천이백 년이었다.

(인권환 역주, 45쪽.)



우리는 토끼인가? 자라인가?

아니면 용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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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벙! 보글보글, 뽀글뽀글, 꾸루루루룩, 별주부 선생의 등딱지를 타고 토선생과 함께 수궁에 내려갔다 올라온 독자에게 <토끼전>은 어떤 서사로 다가오는가? 우리는 용왕일 수도 있고, 자라(유명 패션브랜드가 아님) 일 수도 있고, 토끼일 수도 있다. 토끼의 입장, 별주부의 입장, 용왕의 입장이 서로 다르니 이들이 소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불통으로 시작하여 불통으로 끝나고 만 서사가 <토끼전>이다. 셋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다. 말 사이의 행간도 동일했던 적이 없다. 물과 뭍이어서, 왕과 신하여서가 아니다. 셋의 대립구조는 단순한 이항대립을 넘어선 무엇이다. 별주부가 용왕에게 원하고, 토끼에게 원한 것과, 용왕이 별주부에게 원하고 토끼에게 원한 것이, 토끼가 수중세계에 바란 것이 제각기 달랐다. 다를 수밖에 없다. 퍼스펙티브에 따라 <토끼전>은 색깔을 달리한다. 서사가 전하는 의미가 달라진다. 물과 뭍이 정녕 다르던가? 질병과 완치가 다르고, 삶과 죽음이 다른가? 지혜와 어리석음이, 그 우현의 양갈래가 그렇게도 다른가? 티끌의 차이 아닐까? 좁은 골목의 세 갈래길에서 서로 자신들만의 입장을 고수하느라 대치하고 있는 세 차량을 보면서 나는 별주부와 토선생의 또 다른 버전을 본다. 오늘도 누군가는 꾀를 내고, 누군가는 알고서도 속고, 누군가는 대낮에 납치되고, 누군가는 머리를 박으며 자책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는 토끼인가? 별주부인가? 용왕인가? 여기는 물속인가 땅 위인가? 그게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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