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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topian Nov 03. 2024

건축과 명상

거주공간의 차이가 주는 인간성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전철을 타고 역에서 내리면 생각보다 높은 계단을 오른다.

살짝 지치긴 하지만 운동삼아 한다는 생각이면 무리가 없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한 정거장을 지나 내리면 큰 사거리가 있다. 여기에서 걸어서 집까지는 300미터 남짓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이른다. 또는 자동차를 타고 지하 1층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내리면 50여 미터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이동하는 운송기기를 타고 오른다. 한 명 두 명사람들이 타고 내리지만 어색하기도 하고 어차피 자주 볼사람 아닌데 하고 딴 곳을 쳐다본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양쪽으로 있는 현관문 좌우로 나뉘어 있거나 혹은 여러 곳으로 나뉜 아파트의 거주환경은 현대를 살아가기에는 가장 편리한 구조가 되어있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독일에 살 때는 도시 외곽에 있는 도펠 하우스라는 하나의 집이 두 채로 나뉘어 집주소가 1, 1-1 등으로 나뉜 집에 살았다. 프랑크프루트라는 도시 내에 사는 것보다 좀 더 자연을 느끼고자 그랬던 것이고 그만큼이나 거리는 있지만 정원과 벽난로가 있는 이상적인 집이라는 형태를 가졌다.

 어차피 몇 년 살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니까 그 동네의 부동산에 대한 투자는 생각지 않고 실제로 회사에서 그런 부분은 권장하지 않기에 아예 재산의 가치보다는 삶의 가치를 따르며 선택한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더 삶의 모습 자체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는 오랜 고민의 답이 결국 아파트가 최선이었다. 그렇다면 삶의 모습이 아닌 현실의 모습을 따른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두 가지가 뭐가 다른가? 하나는 거주한 집에서 느끼는 나의 만족감에 대한 것일 테고 하나는 실질적인 투자가치와 교육의 가치일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오래 머물 곳인데 오히려 삶의 모습은 더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집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통한 나를 위한 명상이 아닌 실질적인 현실에 맞는 희생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용기가 없거나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 우리나라에도 전원을 끼는 환경이 되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근교 지역으로 나가면 되지 않은가? 질문은 같지만 대답은 다르다. 난 왜

 왜 우리나라는 이런 주거 형태를 띠게 되었을까?

삶의 가치를 판단 기준으로 하는 것은 아예 없었던 것일까?

아니 아파트의 삶의 가치가 낮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 더 좋아지려고 갖가지 커뮤니티 시설과 더 높은 층수와 아파트 브랜드가 여러 나라의 말들로 알 수 없는 이름을 지어가며 더 우수함을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복합 주거를 제안했던 그의 의도롤 연구한 자료를 본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핵심 원칙:

1. 빛과 공기의 자유로운 순환

   필로티를 통한 지상공간 확보

   수평창을 통한 충분한 채광

   옥상정원을 통한 자연과의 조화

2. 복합 커뮤니티 공간

   건물 내 상점, 레스토랑, 체육시설 등 생활 편의시설 통합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교류 유도

   수직 도시의 개념 구현

3. 인간 척도의 건축

   모듈러 시스템을 통한 인체 비례 적용

   효율적이면서도 쾌적한 실내 공간 구성


분명 최고의 거주에 대한 효율적인 제안이다. 심지어 수직적 구조에서도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중요한 부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실재 유니테다비타시옹에서 위의 그림처럼은 아니라도 원하는 바를 최대한 구현하고자 했다. 현재 프랑스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도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도 돌아볼 의미가 있을 부분이다.

 그러면 우리의 아파트들은 어떤가?

APART:MENT

최근 아파트노래가 다시 활용되면서 아파트라는 말이 더 많이 들리는데 그 원래의 단어를 보다가 이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언어학을 잘 아는 분들은 이미 정의했거나 혹은 말도 안 될 수도 있지만 명사인 apartment자체가 아파트를 뜻하는 것인데 앞쪽에 있는 APART는 무언가로부터 떨어진 것의 의미하고 A PART로 A를 부정관사처럼 만들면 부분인 것이 되는데 아파트라는 말 자체에 이미 서로 떨어진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 뒤에 붙어 있는 ment는 어떤 상태나 특징에 대한 접미사가 붙어 있는 것이니 결국 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설픈 생각일 수 있지만 해석하게 된다.

 아무리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 떨어지는 것인가? 붙어있는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의 거주의 형태를 통한 삶은 그로 인해 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인가? 그러면 유니테다비타시옹에 대비한 한국의 아파트는 어떨까?


유사점:

1. 수직적 개발

   고층 주거를 통한 토지 활용

   표준화된 평면 설계

   공용 시설 제공

2. 커뮤니티 중심 계획

   단지 내 편의시설 배치

   주민 공용공간 확보


차이점:

1. 공간 구성

   유니테 다비타시옹:

    복도형 구조로 사회적 교류 강조

    2개 층 복층형 설계(Duplex)

    유닛 내 천장고 차이로 공간 다양성 확보

   현대 한국 아파트:

    계단실형 구조로 프라이버시 강조

    단층 평면 위주

    표준화된 천장고

2. 커뮤니티 시설

   유니테 다비타시옹:

    건물 내부 수직적 복합화

    옥상 운동시설, 어린이집 등 통합

    내부 쇼핑가로 설계

   현대 한국 아파트:

    단지 내 수평적 분산 배치

    지상/지하 주차장 중심

    외부 상가 분리

3. 환경 고려

   유니테 다비타시옹:

    자연채광과 통풍 극대화

    발코니와 차양으로 기후 조절

    필로티로 지상층 개방성 확보

   현대 한국 아파트:

    에너지 효율성 중심

    발코니 확장 선호

    지하 주차장 활용

4. 사회적 맥락

   유니테 다비타시옹:

    다양한 계층 혼합 거주 지향

    예술적, 실험적 가치 중시

    건축가의 철학적 비전 반영

   현대 한국 아파트:

    경제적 계층화 뚜렷

    실용성과 투자가치 중시

    시장 수요 중심 설계

 어쩌면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아파트라는 내 나름의 단어에 대한 해석을 더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나눠질 수밖에 없는 구조로 거주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의 아파트들은 더 고급화를 표방하고 더 고립을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면 어차피 서로 볼 것도 아닌데 옆에 서 있는 차를 보곤 대출이 꽉 차있음에도 다시 딜러로 향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단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완전히 분리된 벽으로 둘러져 있는 단지의 특정 문을 통해 들어간다. 어떤 새로운 단지가 들어서면 그곳은 그 지역의 차별화되는 누군가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억지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프라이버시와 사유 재산의 인정과 사고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을 위한 장벽이라 하지만 마치 극장에서 맨 앞줄에 있는 사람이 일어서면 그 뒤로는 모두가 일어설 수밖에 없는 함께 잘사는에서 모두 힘들어지는 지금의 현상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두 가지 아파트 형태를 겉으로 슬쩍 봤다지만 시사점은 있다.

1. 지속가능성 측면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자연 친화적 설계 원칙 재조명 필요

현대 한국 아파트의 에너지 효율성과의 융합 가능성

2. 커뮤니티 활성화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사회적 교류 증진 설계 참고 필요

한국형 공동체 문화에 맞는 재해석 필요

3. 미래 발전 방향

양측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주거 모델 개발 가능성

친환경, 커뮤니티, 효율성의 균형 모색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현재는 건축적 가치로는 모듈러 시스템의 선구자적 역할, 대규모 집합주거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2016년)의 의의를 가지고 현재 프랑스에서 여전히 주거공간으로 사용하며 일부 유닛은 호텔로 전환하여 건축 투어리즘 활성화하고 건축학도들의 필수 연구/견학 대상이며 현대 프랑스 공공주택 설계에 영향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1952년 우리나라가 한참 전쟁의 폐허가 되고 있을 때 지어진 이 건물은 이미 70년도 더 지난 아파트이지만 재건축을 할 생각도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 가치는 여전하다. 지금 40년 된 많은 한국의 아파트들은 더 빨리 무너뜨리고 다시 철저하게 폐쇄적인 환경으로 다시 지어달라 아우성이다. 건축비가 올라 분담금을 낼 자신이 없으면 그때는 오히려 짓지 말자고 떠든다. 집은 집이 아니고 돈이다. 옳지는 않지만 맞는 말이다. 안타깝다. 이미 Apartment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비교 욕심의 사슬에 묶여 있다. 욕심이 만든 명석함은 지방에 사는 사람과 서울에 사는 사람의 같은 수입을 가진 사람이라도 몇 배의 부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심지어는 지방사람들을 똘똘하지 못하게 거기서 살다가 부를 얻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 취급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든다.   

 자신들의 개성을 살린 재능을 키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돈 더 벌려면 어떻게든 서울로 들어가야 한다는 한 가지 가치관만 살아남는다. 뭐를 하더라도 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라 한들 재정적 여유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아닌가… 답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고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수도를 옮기고 아무리 기업을 옮긴다 하더라도 의식의 깊은 곳에서 박혀있는 비교우위의 세상에서는 모든 결론은 하나에 이른다. 그래서 우월감과 자책이 만연해진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이런 문제를 많은 사람이 고민했을 것인데 답이 안나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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