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고민이 눈처럼 쌓인다.
그런데 법륜스님의 이야기는 그것을 순식간에 녹이는 따뜻함이 있다.
사실 말씀 자체가 따뜻하지는 않은데 아니 다소 섭섭하게 들리거나 꾸짖는 수준이기도 한데
어느새 가슴속에 고민은 녹아있다.
일요일 오후 갑자기 늘 유튜브나 책에서 뵙던 분을 만나러 가자고 한다.
마침 즉문즉설을 하는 날인데 망설이고 있다가 나에게 물어보는데 나는 당연히 가고 싶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라 차를 타고 나선다. 다만 엄청난 교통체증이 있는 곳이라 1시간여의 여유를 두고 출발했다. 송파역 사거리는 지나 대치동 방향으로 나서니 이내 길은 꽉 막혀 있다. 학여울역을 지나 은마아파트를 지나면서 생각 외로 정체가 풀린다. 마치 연예인을 만나는 듯한 설렘이 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하는 생각과 지금까지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셨던 말씀들이 머리를 떠다닌다.
정토회 서초본당은 예술의 전당 근처 큰길에서는 한 블록 뒤에 위치한 곳에 있다. 강의장은 꽤 넓은 공간에 마치 극장과 같이 좌석이 배치되어 있고 봉사를 해 주시는 분들이 너무나 일사불란하게 입장 절차와 신청 절차를 알려주셔서 많은 사람이 모였음에도 복잡한 것 하나 없이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모인 사람들도 서로 양보하는 모습들에서 극장에서 자리 자리를 찾아가는 것보다 편안하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강연을 듣는 날은 북연주가의 사전 공연이 있었고 그간에 있었던 정토회의 활동들을 엮은 영상을 보여준다. 최근에 있었던 튀르키예의 큰 지진현장에서 새롭게 학교를 지어주는 상당히 큰 규모의 지원에 대한 내용들에는 상당한 놀라움도 있었다. 이 분의 마음의 진심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나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가 이야기한다.
“어쩌면 저 모습이 진정한 주지스님의 모습이 아닐까?”
“아! 선행의 모습은 한 곳에 머물러 높은 수준의 정신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기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는 것, 갈등이 없는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
법륜 스님의 모습은 그것을 실천하는 가장 이상적인 종교적인 모습이 아닐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멈추어 있지 않고 나가서 베푸는 것. 며칠이라도 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움직여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종교라는 근 본적인 업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의 고민은 반려동물이 떠난 이후의 공허함, 가족과의 의견 충돌, 끈기 있게 삶을 살아가지 못한 자신, 스스로를 혁신하지 못하는 조바심, 신체적 장애에 대한 편견등의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를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구나’로 전환하는 많은 힘듦이 있다.
그중 마음을 끄는 한 정신장애를 가진 아빠의 눈물은 지금의 나의 삶이 얼마나 축복받았는지를 깨닫게 한다. 비교에 의해서 나는 그 보다 나으니 괜찮은 것이 아닌 그 사람에 대한 연민과 그렇게 꿋꿋이 살아가는 그의 용기에 오히려 위로받는 나를 느낀다. 그러나 그가 처한 삶의 고단함은 만만치가 않을 것인데 법륜 스님의 말씀은 그 모든 고단함을 씻어낼 수 있는 비누와 같은 말씀이다.
“혼자 그것을 감당하려 하지 말라”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계속되겠지만 우리 사회의 인식은 점점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있고 지금 당장의 자녀의 모습에 매몰되지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만드는 것이 나라는 자책에서 벗어나 그의 삶을 인정하고 그것을 돕는 사회적인 시스템을 활용하며 부모인 스스로부터 자녀에 대한 아량을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가져라.
그래야 더 잘해줄 수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니 함께 풀어가는 방법을 맘 편하게 받아들이라.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든 생기게 되면 “왜 나만 이런 일이 생기지”, “나는 너무 괴롭다 “ 이렇게만 생각하면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어떤 일에 앞에 서서 “나는 이제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를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나에 대한 주인 된 자세로 삶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한다는 관점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건 어떤 환경에 처해 있건 나는 행복할 수가 있다. 내가 주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원래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었던가…
당연한 것을 무시하고 있는 나에게 다시 말한다
너는 네 삶의 주인인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