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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topian Nov 17. 2024

정치와 명상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오늘, 우리, 주변

 장군인 막시무스가 지쳐있는 군인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대열 중간으로 걸어갑니다. 

그들은 장군을 발견하자 일어서는 병사도 있고 그냥 지친 채로 앉아서 “Genaral”이라는 존경의 표시를 보냅니다

큰 소리로 관등성명을 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진심을 담은 듯한 존경의 한마디를 ’ 장군‘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서로 눈을 마주칩니다. 그리곤 전쟁이 임박하자 장군인 막시무스는 말을 타고 숲 속에서 기다리는 다른 기병대와 함께 참전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What we do in life, echoes of eternity!


“3주 후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 곡식을 키우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것이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소망이 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싸우다 혼자 말을 달리며 따스한 햇살이 느껴진다면 두려워 말 것이다. 이미 천국에 와있는 것이니…. ”

 그리곤 2편에서도 막시무스의 명언처럼 등장하는 “삶의 영광(우리의 삶)은 영원할 것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그 신념과 신뢰는 그를 로마 최고의 장군에서 황제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만큼 우대받으나 명민하고 나약하며 사악한 권력에 중독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코모두스에 의해 사형이 될 뻔하다 그렇게 글래디에이터가 되어 고난을 겪으며 결국엔 코모두스를 콜로세움에서 대중 앞에서 복수하고 올바른 로마를 기원하며 죽어갑니다. 

정치란 권력을 따르는 법이죠


영화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극적인 연출을 통해 서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1편의 배경은 서기 180년경 최근 개봉된 2편은 210년경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되며 영화상의 배경과 삶의 방식만 다를 뿐 잘못된 통치가 만드는 삶의 비참함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선거 공약과 유세동안의 주장하는 바는 상대 후보의 비방을 제외하면 국민을 위한 애절한 봉사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정치인이 된 이후 권력이 물들게 되면 오직 그 권력의 뒤를 따르는 것에 서슴없습니다. 분명 황제를 죽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가진 집정관임을 알면서도 군대를 이끄는 장군은 그의 말에 병력을 움직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재산을 잃게 된 정치인은 권력이 된 채권자의 뒤를 빨아주는 개가 됩니다. 결국 사람들을 위하려는 어떤 정치의 형태라도 결국 권력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황제는 또 다른 환각에 빠지고 그 뒤에서 황제를 조정하는 권력은  본인만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벽을 만들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폭압적인 권력으로 짓누릅니다. 부끄러움, 가치관, 양심은 사라지고 그 옆에서 혼을 팔아버린 정치인들과 국민을 조롱하는 것에만 정신을 팔아버립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어마어마한 건축적, 수학적, 과학적 결과물이 이로 인해 발전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피로 물들인 욕심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축하하는 많은 지난날의 유물들은 어쩌면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사람들의 윤택한 삶을 위해 그리고 사람다운 삶을 위해 이룩해 낸 사회체계도 이런 아픔의 결과들입니다. 지금은 그 유물들을 지난 시간의 문화의 산물이라 하지만 당시 사람들을 위한 문화라는 의미로서의  유물은 삶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엄청난 제국을 이뤄가는 동안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던 황제는 현실의 어려움을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는 글로 기록합니다. 원문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당시 로마인들이 쓰지 않는 그리스어로 써졌다고 합니다. 대제국의 황제지만 전쟁의 과정과 통치의 과정에서 마주한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현실에 대한 성찰을 했다는 부분은 그의 인간됨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줍니다. 

 2천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작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조정하는데 쓰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가치, 부모 자식으로서의 인감 됨,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규칙을 모두 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연료 삼아서 악행에 기뻐하는 지난 시대의 폭군으로 살아가는 것들이 넘쳐납니다. 계속 반복되는 이 역사의 아이러니에 오히려 원망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시대 그리고 오늘 이 모든 시간대에 동일한 아첨꾼과 폭군과 무지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과거의 반성과는 상관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부끄러운 그리고 잔인한 일들에 오직 자기 자신을 지키려 매 순간 다른 거짓을 말하고 핑계를 대고 가식적인 표정을 짓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래서 중학시절 이미 오래전, 어쩌면 어떤 삶의 슬픔과 부당함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도 그 답답함이 저 책을 읽게 만든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일상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지금 오늘의 세상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데 도대체 인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온 것일까요?

오늘의 명상은 좌절감에 훼손된 듯합니다. 


다행히 영화의 마지막은 부패한 권력의 파괴로 마무리됩니다. 이전영화에서도 그랬듯이 순간의 악한이의 명석함이 지속가능한 지혜를 가진 의로운 사람에게 박살 나게 됩니다. 다행입니다. 무한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그래도 오늘이 지나 악행의 결과는 심판을 받는 것이 다행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악행의 결과는 심판을 받는 것으로 결말이 나길 바라며 명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러한 어리석은 역사의 반복을 조금이라도 줄여가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것과 함께 이 부패된 정치의 얽매임을 벗어나는 명상을 하기를 바랍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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