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목표
무언가를 생각하자면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느껴야 한다.
난 누구인가?
난 무엇을 좋아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왜 이러고 있을까?
난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생각에 생각을 더해 생각이 넘쳐흐르고 있다. 누군가에게 쏟아부어 넣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 왜 사는 걸까? 나를 알고자 하는 과정은 지금 우리에게 닥친 재난에 대한 각자의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2000년, 고난을 지나 박차를 가할 때
2001년 봄 한세대가 바뀔 만큼의 오랜 일이지만,
팀 내에서 기업문화 점검을 위해 일종의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스케치를 하는 기간 동안 조용한 카페에서 집중하고 싶습니다."
물론 프로젝트에 맞는 디자인을 연구하겠지만 마치 내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 듯이 진정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그런 꿈을 적었다. 그런 것이 디자이너들이 할 일이 아닌가?
모두들 미래의 표본이라 느끼던 2000년대 자동차는 하늘을 날고 사람들은 모두들 깨끗한 환경에서 세련된 삶을 살아가는 곳. 아이들은 컴퓨터를 통해 학습하고 누구나 시험이 아닌 자율로서 각자의 개성을 살려나가는 그런 유토피아. 그 2000년, 밀레니얼의 세상은 우리에게는 IMF 구제금융으로 인한 엄청난 실업사태의 벼랑에 서있게 한다.
국가적인 금 모으기와 허리띠를 졸라매는 구태의연한 표현으로 국가는 드디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때였다. 많은 기업들이 사라지고 합병되며 마침내 문이 열리고 꿈에 그리던 디자이너의 삶을 시작한 그때, 아직은 신선한 아니면 당연할 수도 있는 새내기의 꿈의 세상을 그리며 기업문화를 어떻게 바꾸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순수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은 지나가는 나를 보고선 " 넌 꿈이 있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당연하지 난 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루어 내리라" 이런 막연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왔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만족감에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을 안고 자랑스러운 디자이너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늘 이때쯤이면 가슴 뛰는 서막을 지나 차츰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나오기 시작할 텐데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런 벽 앞에 서게 된다. 그 벽은 다름 아닌 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음의 벽. 내가 알고 있던 나는 기대하던 나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그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실력의 차이가 드러난 것. 차라리 모르고 있거나 눈치가 없어 그저 그런 줄로만 알거나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몰랐다면 차라리 나으련만 어중간한 실력과 어설픈 눈치와 충분치 못한 재능에 그간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그나마 콧대 높이 던 나는 프로의 세상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왜 가야 하는가?"
존재의 위협을 느끼고 주변의 애처로움을 받게 되며 열심히 하는 것으로 나를 만들어 간다.
누군가는 나를 "선수"라고 불러준다. 주어진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애쓰고 그것이 결실을 맺는 근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열심히는 한다는 의미였는지 선수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가 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들여 준다. 왜 그들이 나에게 왜 "꿈이 있어 좋겠다"라고 하고 그렇게 보고 있는지.
" 아무리 설문조사라 하지만 군대 다녀왔다면 알 텐데 왜 그렇게 순진하게 써서 다들 그렇게 너를 놀리게 만드냐~"
기업이 무언가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기에 변화를 위해, 발전을 위해 그 안에서 일하는 구성원의 삶을 고민하는 회사는 얼마나 건실한 것인가...라는 나의 순수한 마음은 눈치 없이 순진한 어리석음으로 통용되었던 것인가? 팀장들에게 참 꿈이 있는 젊은이가 한 명 들어왔고 그들의 커피 한 잔의 여유에 쓰일 농담거리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 설문지는 익명은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2020년이 되어 그 꿈을 다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순수한 꿈을 현실로 만들 기회.
드디어 창의력을 위한 그간의 꿈을 이룰 때. 뭔가 디자이너로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 디자인으로 삶의 가치를 높여 줄 수 있는 때, 스타일링에 취해 아름다움을 갈구하던 그날들을 우리 모두를 위한 삶의 가치로 진화시킬 수 있는 때.
그간의 꿈을 이룰 때가 왔다고 느꼈다. 디자이너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 스타일링의 아름다움을 넘어 삶의 가치를 높이는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때였다. 지난 20년은 나에게 용기를 가르쳤다. 창의력은 안전한 길을 버리고 모호함 속으로 뛰어드는 결단에서 나온다. 나는 이제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과 공감하며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플랫폼을 설계한다. 자동차 디자인을 넘어 그것이 활동할 공간을 제안하고 스마트한 생산방식을 통한 시스템의 디자인, 그리고 이러한 생산을 고객을 위한 의미 있는 서비스로 이어나가는 디자인. 브랜드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를 만드는 기획.
앞으로의 디자인은 자발성과 창의력이 이끌어야 한다. 한국은 패스트팔로워로 성공했지만, 이제는 미래를 여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크다.
나는 질문한다.
"어떤 디자인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까?",
"어떻게 하면 틀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여전히 모호하지만, 나는 그 모호함을 받아들인다.
불완전한 내 스케치를 꺼내고, 감히 상상하며 묻는다. "이게 가능할까?"
20년 전, 카페에서 스케치하며 꿈꿨던 그 순수함을 이제 실천할 때다. 나의 디자인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다. 모두를 위한 가치로 진화한다. 창의력은 용기에서 피어나고, 그 용기는 세상을 바꾼다. 나는 오늘도 스케치북을 펴며 묻는다. "내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곧 나의 디자이너 삶이다.
모빌리티라 불리는 새로운 운송기기의 제안, 이러한 제품을 생산하는 스마트 팩토리, 이런 모빌리티를 통해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서비스 환경, 이 서비스를 완성시키는 적절한 신기술 개발, 이타적인 삶의 가치를 공감하게 하는 브랜드 가치관의 형성.
본격적인 미래 인프라와 모빌리티의 이상적인 조화를 위한 구상을 시작한다.
이런 생각의 여행은 결국 더 나음 삶을 위하는 디자인이라는 업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나는 디자인을 단순히 직업의 방식이 아니라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나는 더 나은세상을 위하는 것을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방법으로 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