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ys Mr. Schreyer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고도 남을 시간 동안 자동차 디자인을 해왔다.
자동차 디자이너도 직업일 뿐이라 아름 답다 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저 일일뿐 감동은 없을 수 있으나 디자인작업은 아직도 여전히 가슴에 사무친다.
자동차 디자인의 역사에 길이 남을 그와 함께 한 10여 년의 시간은 나의 가치관과 직관적인 판단에 가능성을 만들어 줬다.
디자이너로서의 꿈은 오늘의 경쟁과 어제의 애석함과 내일의 기대에 서서 점점 희미해질 때도 있으나 10여 년의 그와의 시간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명한 나침반의 목적지를 가르치게 한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전공을 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디자인 전공자라 하더라도 입사를 하게 되면 다시 가슴엔 노란 딱지를 단 것처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연차가 얼마나 되었든 어떤 역할을 하던 어떤 디자인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신입디자이너라 해도 진진하게 대화를 했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디자이너들의 발표를 듣는 동안 표현이 서투른 경우가 있다면 본인도 영어 네이티브가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어렵게 말을 이어가며 더듬거리는 발표자의 영어에도 귀 기울인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안된다고만 하는 엔지니어나 타 부문의 사람들의 의견에는 “왜 안되는지”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 방법을 찾아오거나 방법을 논의하자고 큰 소리를 친다. 그래서 때론 어떤 타 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대하기를 어려워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를 조율해야 했던 나의 고민도 많았던 적이 여러 번이다.
그러나 그는 디자인을 더 디자인답게 사람을 위한 인간공학을 최우선으로 두고 디자인의 정수를 뽑아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그래픽에 매몰된 데코레이션 위주의 스타일링은 그에겐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늘 강조하는 그의 생각 “ Precision “ 독일인 특유의 고집이거나 가치일 수도 있지만 제품에 정성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아우디와 폭스바겐의 정수를 끌어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프랑스 브랜드의 감각과 미국 브랜드의 표현적인 부분에는 다름이 있었지만 자동차라는 그 꿈을 담는 기계로서의 가치에는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닌가 했다.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예술가로서 그리고 가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분명 한국 디자인의 수준을 월등히 향상한 사람이다.
독일 출장 중에 그가 운전차는 차를 타고 독일의 오솔길을 달린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마침 있는 로드트립행사라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왜 자동차 디자이너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그렇게 많은 차종을 디자인하고도 여전히 그는 이야기한다.
또한 그에 비하면 나의 이력은 너무나 보잘것없지만 그래서인지 더 디자인이 그립다.
결국 열정이라는 에너지는 제대로 달려보지 못한 결핍에서 더 맹렬하게 타오른다.
그와 함께 하면서 나는 보통의 자동차 디자이너보다 더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디자인 경영업무, 건축 디자인, 브랜드 디자인, 디자인컨설팅에 미래 연구까지 지나왔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자동차에 대한 디자이너의 꿈은 목마르다.
하루는 그에게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나의 성과에 하소연을 하게 된다.
분명 그와 함께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들에 대해서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지난날 현실에 맞지 않았던 주장으로 평가절하 받았던 제안들이 오늘의 현실이 되어 찬사를 받고 있다. 그래서 더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적극적인 반영을 해 줄 것을 제안드리고 있다.
그러나 결국 지금의 매니지먼트가 그 과실을 얻게 된다. 결국 그것은 이미 지금 빛을 발하는 이들의 영광이다.
아쉬울 것은 없다. 어차피 그 지난날의 고민과 생각들은 오늘의 나의 직관적인 판단에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있으니, 그렇다 해도 맘이 쓰이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그에게 묻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을 듣는다.
그의 역할을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자네가 가진 디자이너로서의 직관을 나는 이미 인정하고 있으니 슬퍼하지 마시게.”
한국을 떠나기 얼마 전 그가 보내준 편지에는 애석해하는 나의 맘을 달래주고 있다.
”지금 또다시 준비하는 자네의 그 열정의 에너지가 닳지 않도록 조금 쉬어 가시게. 어차피 어떤 권위와 인정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니 맘 졸일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부분을 꾸준히 하는 것이니.”
나를 다독인다.
“그에게 편지를 받지 않았는가.
그는 자네의 빛나는 성과를 격려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닿을 수 없을 자리에서 빛을 발하던 그가 인정한 성과를 잊지 말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착각에 빠진 생각은 놓아주고 앞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가치에 빛이 날 수 있도록 정성을 쏟으면 되는 것이다. “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는 것일까?
어쩌면 굳이 그런 건 애써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느 수준에 오르지 못했고 그래서 느끼는 끝없는 허기를 채우지 못해 무엇이라도 혹 상한 것이라도 먹으려 애쓰고 있는가.
얼굴은 노여움에 절어 있다. 웃으라. 미소 지어도 바보가 되지는 않는다.
특별할 것 없다.
최고의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식사를 하며 그들의 일상에도 함께한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그에게 어떤 존경을 표현하고 그는 또 얼마나 가족들을 위해 애쓰는지 지켜본다.
끝없는 비교로 나를 만들어 갈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일 것이다.
나의 가족이 바라는 것이 나의 조바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무친다. 지난 시간이.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 나를 만들어 왔다.
너희 들은 이러지 말아라.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좀 들려주고 싶다. 듣든 말든.
아직 좀 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게 나의 잠재의식에 쌓인 직관은 오늘 맞이하는 과거의 미래를 실천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미래상은 오늘의 현실이 된다. 그에게 배운 디자인의 가치는 은연중에 나의 디자인에 묻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