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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이유: 이성과 감정의 충돌

15 소년 표류기를 통해 본 오늘

by Utopian


쥘 베른의 "15 소년 표류기"와 현대 한국사회의 혼란

쥘 베른의 "15 소년 표류기"는 뉴질랜드로 향하던 기숙학교 학생들이 태운 슬루갈 호가 폭풍을 만나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15명의 소년들(8-14세)은 어른 없이 무인도에서 생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브리앙트라는 리더십 있는 소년을 중심으로 그들은 처음에는 질서와 협력을 통해 생존을 모색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월콧을 중심으로 한 반란 세력이 등장한다. 이들은 즉각적인 욕구 충족과 권력 장악에 집중하며, 공동체의 규칙과 협력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점차 두 그룹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고, 이러한 갈등은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발전한다.

결국 외부의 위기(화재와 맹수의 위협)와 윌스 선장의 구조를 통해 소년들은 구출되지만, 이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 사회의 질서, 협력, 이기심, 권력의 본질에 관한 깊은 교훈을 배운다.


사회의 혼란과의 연관성

세대 간, 집단 간 분열과 대립: 15 소년들이 두 집단으로 나뉘어 대립했던 것처럼, 현대 한국사회는 이념, 세대, 성별 등 다양한 축을 따라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다. 이러한 분열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보다는 적대감을 키우고,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리더십과 가치관의 혼란: 브리앙트와 같은 지혜롭고 포용적인 리더십보다 월콧과 같은 감정적이고 분열적인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현상이 한국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의 분열된 메시지는 시민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가치의 충돌: 소년들이 즉각적인 욕구 충족과 장기적 생존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처럼, 한국사회도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부동산, 일자리, 환경 등의 문제에서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미래를 위한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 의식의 약화: 표류기의 소년들이 처음에는 강한 연대감을 보이다가 점차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된 것처럼, 한국사회도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극단적 개인주의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외부의 위기와 내부의 갈등: 소년들이 자연의 위협 속에서도 내부 갈등으로 더 큰 위험에 처했던 것처럼, 한국사회도 경제 불확실성, 저출산, 고령화, 기후변화 등 외부적 위기 속에서 내부 갈등으로 인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성과 감정의 충돌: 표류기에서 소년들이 처음에는 이성적 판단을 하다가 점차 감정과 본능에 휘둘리게 되는 과정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사실과 논리보다 감정과 편향이 담론을 지배하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


구원의 기대와 자구책의 필요성: 소년들이 윌스 선장의 구조를 기다리면서도 스스로 생존을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한국사회도 외부의 해결책(정부, 시장, 기술 등)을 기대하면서도 시민 스스로 문제 해결에 참여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처럼 150년 전에 쓰인 "15 소년 표류기"는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도전과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혼란과 놀랍도록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브리앙트와 같은 지혜로운 리더십과 모든 구성원이 공동의 미래를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정신일 것이다.



표류하는 이성의 배


"잠깐만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뉴질랜드 학교로 향하던 슬루갈 호에 탄 15명의 소년들처럼, 인간은 분명 이성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갖췄음을 전제한다. 처음 채어먼 아일랜드에 표류했을 때, 소년들은 지식과 상식을 모아 생존 계획을 세웠다. 브리앙트와 고든, 도니판은 지도를 그리고, 식량을 찾고, 대피소를 만들었다. 마치 우리가 환경을 파괴하면 결국 모두가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폭풍이 몰아치고 배고픔이 극에 달했을 때, 이성은 감정에 자리를 내주었다. 월콧과 크로스가 식량을 두고 다투고, 도니판이 자신만의 피난처를 만들려 했던 순간처럼,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 분노에 압도될 수 있다. 현대의 극단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내가 가진 것을 잃을 거야"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치 월콧이 다른 소년들의 식량을 훔쳤던 것처럼, 상식을 외면하고 파괴의 길로 나아간다.

이는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다. 채어먼 아일랜드에서 고든이 말했듯이, "배고픔은 우정보다 강하다." 감정이 이성의 목소리를 묻어버리는 현상이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슬루갈 호의 선장이 이익을 위해 소년들을 위험에 빠뜨렸던 것처럼, 돈에 지배당한 결과일까?


불안과 두려움의 섬

그렇다면 이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서 올까? 소년들이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 가장 큰 공포는 불확실성이었다. 구조될 수 있을지, 식량은 충분한지, 위험한 동물은 없는지... 브리앙트는 지도를 만들고 탐험을 통해 이 불확실성을 줄이려 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로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 세계화, 기술 발전, 기후 위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던져준다. 극단주의자들은 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마치 월콧이 리더십을 두고 브리앙트와 다투며 "예전처럼 하자"고 주장했던 것처럼, 과거의 단순한 질서나 강력한 권위로 돌아가려 한다.

정체성의 위기도 있다. 소년들이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으로 인해 갈등했던 것처럼, 극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문화나 공동체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한다. 월스턴이 영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내세우며 프랑스 소년들을 무시했던 것처럼, 이들은 "내가 나로 남기 위해선 저들을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부끄러움도, 상식도 잊게 만드는 강력한 감정이다.


짐승과 사람

"짐승보다 못한"이라는 표현이 있다. 채어먼 아일랜드의 야생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추구한다. 하지만 소년들 중 일부가 집단에서 이탈하여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파괴적인 행동을 했던 것처럼, 극단주의자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마저 파괴한다.

왜일까? 채어먼 아일랜드에서 브리앙트가 깨달았듯이,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모두가 함께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의 의미를 찾았다. 반면 월콧의 무리는 "우리의 방식이 맞다"며 권력과 우월감이라는 의미를 찾았다. 이들에게는 죽음보다 패배가 더 두려운 결과였다.

이것은 부끄러움을 잊는 과정이기도 하다. 소년들이 처음에는 서로를 도우며 문명인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했지만, 점차 그 부끄러움의 감각을 잃었던 것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은 부끄러움마저 묻어버린다. 월콧이 자신의 불안을 다른 소년들 탓으로 돌리며 그들을 억압했던 것처럼,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불안을 세상 탓으로 돌리며 그것을 파괴하는 데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구조선을 기다리며

"왜 이해가 안 될까?" 어떻게 소년들이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데도 서로를 배척하고 다툴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사람들이 시설을 파괴하고 거짓말을 연속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인데도 지지를 보내는 것인지.

그것은 우리가 브리앙트처럼 이성을 중시하는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하지만, 그들은 월콧처럼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그 소용돌이는 상식도, 부끄러움도, 심지어 자기 보존 본능마저 삼켜버렸기에 이성적인 판단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소년들이 구조되기 전, 불을 피워 지나가는 배의 주의를 끌려했지만 일부가 그 불을 꺼버렸던 것처럼, 일부 사람들은 미래 세대가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지금 내가 옳아야 한다"며 현실을 외면한다. 이것은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다. 우리가 그들의 불안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윌스 선장이 나타나 구조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브리앙트가 가르쳐준 생존 지식을 키우고 불안감을 이겨낼 힘을 기르기보다, 누군가의 선동에 휩쓸려간다. 그렇게 스스로를 아무런 저항 없이 어리석음에 넘겨준 것일 수 있다.

불안과 두려움이 상식을 넘어설 때, 우리는 짐승보다 못한 괴물이 된다. 그 괴물은 어쩌면 15명의 소년 각자의 내면에 잠재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해 있을지도 모른다. 극단주의자들을 보며 "왜 저럴까"라고 묻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브리앙트가 소년들에게 가르쳤듯이, 그대로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글로 쓰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채어먼 아일랜드의 소년들이 프란체스코가 남긴 책을 통해 지식을 얻었던 것처럼, 책을 통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와의 대화도, 어떤 매체의 정보도 아닌, 스스로가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슬루갈 호의 15명의 소년들처럼, 스스로의 존엄을 가진 한 명의 소중한 존재이다. 그 존엄성을 지켜나가는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 스스로를 탐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스스로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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