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삶을 바꾸는 순간
변화를 거부하는 기존 자동차 산업
목적기반 자동차, PBV(Purpose-Built Vehicle)의 등장은 지금 자동차 산업이 겪고 있는 거대한 변화를 상징한다. 내연기관 중심에서 전기차(EV)로의 전환, 그리고 자율주행 기술의 도입이라는 흐름 속에서 PBV는 단순히 새로운 차종이 아니라 전혀 다른 미래를 여는 개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레거시 자동차 제조사들이 이 변화 앞에서 적극적이라기보다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 질문은 단순히 산업 분석을 넘어, 우리가 어떤 미래의 모빌리티를 맞이하게 될지를 가늠하게 한다. 왜 소극적인가?
첫 번째,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의존
오랫동안 내연기관 차량을 중심으로 쌓아온 공급망, 제조 인프라, 수익 구조는 여전히 이들의 핵심 자산이다. 폭스바겐을 보자. 독일 볼프스부르크 본사 공장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 설비 대부분이 내연기관용이다. 엔진, 변속기 생산라인을 전기차용으로 전환하려면 수조 원의 비용이 든다. 게다가 수만 명의 엔진 관련 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전기차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기존 공장의 가동률을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급진적 변화는 단기 수익을 크게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요타는 더 노골적이다. 세계 1위 자동차 제조사인 도요타는 하이브리드 기술의 선두주자였지만, 순수 전기차 전환에는 유독 신중하다. 도요타는 배터리 전기차만이 해답이 아니라며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수소 연료전지차 등 다양한 옵션을 유지하는 '멀티패스웨이'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겉으로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존 자산을 최대한 오래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두 번째, 기술 격차의 벽
테슬라가 2012년 모델 S를 내놓을 때만 해도 전통 제조사들은 비웃었다. "자동차를 만드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웃음은 멈췄다. 테슬라는 배터리 관리 시스템, OTA(무선 업데이트),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GM의 경우를 보자. 2020년 야심 차게 출시한 전기 SUV 볼트(Bolt) EV는 배터리 화재 문제로 대규모 리콜을 겪으며 신뢰에 큰 타격을 입었다. GM은 LG에너지설루션과의 배터리 문제로 약 14만 대를 리콜했고, 이로 인해 18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배터리 기술 하나만으로도 이런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 중이다. 고급 브랜드답게 EQS 같은 럭셔리 전기 세단을 내놓았지만,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여전히 테슬라에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동차를 "바퀴 달린 컴퓨터"로 만드는 데는 100년 자동차 제조 경험보다 실리콘밸리 DNA가 더 유리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세 번째, 시장 불확실성
2023년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판매 증가율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충전 인프라 부족, 높은 차량 가격, 긴 충전 시간 등이 여전히 소비자들의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포드는 F-150 라이트닝 전기 픽업트럭에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예상보다 낮은 판매량으로 생산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유럽은 상황이 다르다. 노르웨이는 신차 판매의 80% 이상이 전기차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내연기관이 주류다. 이런 지역별 편차 때문에 글로벌 제조사들은 전략을 일원화하기 어렵다.
중국은 또 다른 세계다. BYD는 테슬라를 제치고 전기차 판매 1위에 올랐고, NIO, XPeng 같은 신생 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보조금 정책과 충전 인프라 투자 덕분에 중국은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이 되었다. 그런데 서구 제조사들이 이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현지 기업들과의 격차를 좁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네 번째, 규제와 정책의 엇박자
캘리포니아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 신차 판매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EU도 2035년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미국 텍사스나 중동 국가들은 여전히 석유 산업 중심이라 이런 규제에 소극적이다.
스텔란티스(Stellantis, 피아트·크라이슬러·푸조 통합 회사)의 CEO는 "유럽의 엄격한 배출 규제가 현실적이지 않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스텔란티스는 EU의 2035 내연기관 금지 정책에 대해 기술적·경제적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비판하며 정책 완화를 요구했다. 규제가 너무 앞서가면 산업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첫째, 하이브리드 전략: 양다리 걸치기
포드는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을 내놓으면서도 기존 가솔린 F-150을 계속 판매한다. 이런 '투트랙' 전략은 위험을 분산시킨다. 소비자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포드는 승자가 될 수 있다.
혼다도 비슷하다. 순수 전기차 개발에는 조심스럽지만, 하이브리드 기술은 계속 강화하고 있다. 혼다는 2040년까지 전기차와 연료전지차 판매 비중을 100%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당분간은 하이브리드를 주력으로 유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둘째, 파트너십 확대
GM은 자율주행 전문 기업 Cruise를 인수해 로보택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202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Cruise 차량이 보행자 사고를 일으키며 운행 면허가 정지되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 GM의 Cruise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율주행 택시 운영 중 안전사고로 인해 2023년 말 캘리포니아 당국으로부터 운행 면허를 정지당했다. 첨단 기술이라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교훈이다.
반면 현대차는 앱티브(Aptiv)와 합작사 모셔널(Motional)을 설립해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리스크를 나누고 전문성을 결합하는 전략이다.
폭스바겐은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샤오펑(XPeng)과 협력해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폭스바겐은 2023년 샤오펑에 약 7억 달러를 투자하며 중국 전기차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기술 격차를 메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잘하는 기업과 손잡는 것이다.
셋째, 틈새시장 공략
GM의 BrightDrop은 전기 배송 밴에 집중한다. 아마존, 페덱스 같은 물류 기업이 타깃이다. 대규모 승용차 시장에서 테슬라와 정면 승부하는 대신, B2B 상용차 시장에서 기회를 찾는 전략이다. GM의 BrightDrop은 페덱스, 월마트 등과 계약을 맺으며 라스트마일 배송용 전기 밴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고급 전기 밴 'eSprinter'로 프리미엄 배송 서비스 시장을 노린다. 같은 전기 상용차라도 포지셔닝을 달리하면 경쟁을 피할 수 있다.
리비안(Rivian)은 전기 픽업트럭과 SUV로 아웃도어 마니아들을 공략해 성공했다. 리비안은 아마존으로부터 대규모 전기 배송 밴 주문을 받으며 초기 자금난을 극복하고 양산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틈새 전략의 좋은 예다.
넷째, 브랜드 재정립
볼보는 2030년까지 완전 전기차 브랜드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안전"이라는 기존 이미지에 "지속 가능성"을 더해 브랜드를 재정립하는 전략이다.
포르셰는 타이칸으로 전기 스포츠카 시장을 개척했다. "전기차는 느리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뜨리며 "성능"과 "친환경"이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포르셰 타이칸은 출시 첫해 2만 대 이상 판매되며 럭셔리 전기차 시장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재규어는 더 과감하다. 2025년부터 완전히 전기차 브랜드로 재탄생하며, 기존 모델을 모두 단종시킬 계획이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최초로 개발했지만, 필름 사업을 지키려다 파산했다. 노키아는 한때 휴대폰 시장 1위였지만, 스마트폰 전환에 실패해 무너졌다. 블록버스터는 넷플릭스를 인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고, 결국 사라졌다.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보면, 레거시 제조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는 단기적으로는 합리적인 생존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위험하다.
PBV는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다. 그것은 모빌리티 서비스와 도시 인프라, 공유 경제와 맞물리는 새로운 플랫폼이다. 도요타의 e-Palette 프로젝트나 우븐시티(Woven City) 실험을 예로 들자면, 일본 후지산 인근에 175 에이커 규모의 '우븐시티'를 건설해 자율주행, 로봇, AI 등을 테스트하는 실험 도시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PBV와 자율주행을 적극적으로 실험하며 시장을 선점하려 하고 있다.
반대로, 기존 모델에 안주하며 뒤늦게 추격하는 기업은 더 큰 비용을 치를 가능성이 크다. 닛산은 2010년 리프로 전기차 시장을 선도했지만, 이후 투자를 게을리하며 주도권을 잃었다. 지금은 도요타나 혼다보다도 뒤처진 상황이다.
결국 중요한 건 유연성이다. 기존 자산을 지키면서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완전한 혁신과 점진적 전환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질문
PBV는 단순히 새로운 차종이 아니다. 그것은 자동차가 아닌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생활 방식 자체를 다시 묻는 질문이다.
아마존의 리비안 배송 밴은 물류를 바꾸고, Cruise의 로보택시는 도심 통근을 바꾸며, 기아의 PBV는 움직이는 장소의 가치를 그린다. 이 질문은 레거시 제조사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고 있다. 미래의 모빌리티는 결국 누가 더 과감하고 유연하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물론 시행착오와 예상치 못한 리스크는 감안해야 한다. 결국 새로움은 완벽하게 준비된 미래를 기대하기보다 미래로 가는 여정 자체이다.
이 여정을 즐기는 기업이 다음의 모빌리티 세상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 시작은 PBV라는 작은 변화로 새로운 생활을 만드는 만드는 킹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