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이런저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현실회피적은 생각이 비겁함일까 아니면 진정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꿔가는 시도일까요?
대체적으로 옳은 일과 선한 행동에 대한 호감이 있기에 이러한 미래에 대항 허무맹랑한 이상향이라도 그중 몇몇의 부지런함이 세상을 바꿔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물론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가에 따라 선이 아닌 악을 미래의 이상이라 생각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꿈을 꿀수도 있겠지만 대 부분의 경우 타인의 아픔을 고의성을 가지고 저지르지는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언젠가 유토피아 꿈꾼 토머스 모어와 구운몽의 김만중은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요?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은 현실의 도피인지 미래를 향한 다짐인지.
제가 가진 성격이지만 더 궁금해집니다.
결국 많은 어린 시절의 노력은 더 안정된 성인으로서의 삶을 위함이고 그 삶이 원하는 일 혹은 잘하는 일을 연속하는 것이면 더 좋을 것입니다.
간단한 것 같지만 삶은 욕심과 나태가 만들어 내는 이기심으로 약속된 공감대는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서로 간의 약속을 넘는 법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관할하는 기관과 실행하는 기관들이 생겨나며 이에 사람들의 의견을 받는 대표자와 그 모든 것들의 관계들이 생겨남으로써 사회를 이루어 돌아갑니다. 결국 생각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이상적인 생각은 소수의 꿈으로만 잊힙니다. 그래서 더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1/ 출산장려에 대한 생각 :
출산은 지금과 같이 아이를 낳는 그 순간에 초점이 맞춰져 돈으로 환산된 출산책을 장려하는 것은 누군가 성과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미봉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동물의 집단에서도 새끼를 낳아 키울 환경이 안되면 자연스럽게 새끼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이런 사회환경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뻔하기에 당연히 출산을 않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을 돈을 주고 장려하는 것은 어쩌면 낭비를 넘어 야만적인 강압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로 인한 가족의 형성이 과연 이상적일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랑을 넘어 이들과 함께 할 자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갈지가 기대되어서 그들에게도 삶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 자연스러운 출산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미 수십 년간 무지막지한 예산과 별만큼의 시도가 있었지만 지금의 우리의 실정은 저 조차도 저의 자녀들에게 장려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정세와 함께 세상의 변화도 많은 부분이겠지만 특히나 우리나라의 상황은 분명 지금의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각자의 자녀들이 더 좋은 삶 즉 더 많은 돈을 벌게 하기 위해서 경쟁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정성이 오히려 소외되고 치열한 사회상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발전된 온라인 매체로 발전된 비교사회의 가속이 더더욱 경쟁을 독려하고 결국 모두가 고된 삶을 사는 사회로 변해 버렸습니다. 일부에 집중된 부의 모습도 안정적인 삶이라기보다 탐욕스러운 삶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출산율의 증가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사회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만드는 사회보장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특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 의사가 고수익이니 모두 의사가 되어라 ‘는 MBTI 정도의 구분도 알 수 있는 개인의 성향을 ‘돈’이라는 가치에 쑤셔 넣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반대로 사람을 돌보는 것이 만족스러운 누군가에게 사람을 벌하는 법을 다루라고 하면 그 또한 곤욕입니다. 원하는 일 잘하는 일로 삶을 유지하고 그것이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의 대상이 되게 하는 부모님들의 의식의 개선 사회적인 시스템의 개선 국가적인 가치관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개선시키는 일이 결국 출산율을 높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2/ 교육제도에 대한 생각
교육은 분명 생산을 위해 필요한 훈련과정입니다. 또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과정입니다. 배우고 느끼고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의 과정을 충분히 준비시키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함께 살아가고 옳은 일을 이룰 수 있도록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남을 제치기 위한 수단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물론 치열한 경쟁이니 어쩔 수도 없겠지만 앞으로의 인구구조와 사회적인 발전의 수준에서 오직 하나를 위한 모두의 희생이 필요할까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원을 뛰어다니고 놀이터에서 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의 안에는 어떤 가능성이 숨어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아이가 모든 이로운 어른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고 환경적인 불합리로 인해서 변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교육, 학습, 훈련, 습득 어떤 형식의 배우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국가는 정성을 다해 이들을 깨우치게 해야 하고 그러면 미래의 예상되지 않는 불상사를 예방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이견과 다툼과 이해상충이 어느 정도는 논리와 이해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상식 혹은 양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옳음의 범위 안에서 다양성이 인정되고 스스로 이타적인 범위를 두고 차별성을 가지려고 할 것이기에 비논리의 논리가 지배하는 수준을 낮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교육을 해야 하는 과정에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준비를 해 주는 것입니다. 나만 잘 살라고 가르치는 이기심을 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생존을 넘어 욕심을 부추기는 줄 세우기가 만연해 있습니다.
어딘가의 봄처럼 비논리의 집단 이기심이 공감하는 사회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조직화하고 강압적인 독제를 만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이기심은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옳은 가치관이 자라나지 않은 채 권력을 잡고 또 그것을 남용하면서 세상은 모두의 지옥으로 변합니다. 또한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 있다 한 달 그것이 그들에게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만족과 기쁨일까요? 만약 그것이 교육된 착각이라면 그야말로 교육은 더 이타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선을 가르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옳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교육과, 학습과, 훈련과, 계몽과, 습득 그 어떤 배움이라도 성장기에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은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 가지고 필요에 따라 혹은 취향에 따라 활용되며 각자의 개성이 이타적인 조화를 이루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야말로 먼저 태어난 사람의 지혜를 전달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뉴럴링크를 통해 전달 받든 학습을 통해 전달 받든 지식은 어떤 형식으로든 체화하면 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여기에서 옳음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선생님과 배우는 사람인 학생이 있는 교육제도가 필요한 미래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