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사는 이야기
어릴 적, 한국에서 병원에 문병이라도 가게 되면 병원 특유의 냄새가 싫었다. 딱히 무슨 냄새라고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병원 밥 냄새, 환자 냄새, 약 냄새… 그런 냄새가 한꺼번에 뒤섞인 병원 냄새가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병원에는 그런 냄새가 없었다.
어제 하와이에서 제일 큰 퀸스 병원에 갔었다. Same Day Surgery (당일 수술)라고 쓰여있는 빌딩. 입원 없이 간단한 수술을 당일에 하고 살아서 돌아가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 참, 문 앞에 서니 휙~ 하고 자동문이 열렸다. 어, 잘못 왔나? 병원이라 하기엔 너무 잘해 놓았다. 폼 잡고 앉아 커피 한잔 하고 싶은 포근한 소파, 반짝이는 테이블, 스탠드, 깨끗한 카펫. 어느 특급호텔의 로비에 온 것인가? 아니면 인테리어 잘해놓은 강남의 카페에 온 것인가? 호텔 프런트 데스크처럼 생긴 곳에 앉은 안내원에게 “나 왔어요” 신고를 하니
의료보험 카드와 신분증을 달란다. 안내서에 사인을 하니, 신분증과 보험 카드를 얼른 복사하고 돌려준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그 포근한 소파에 앉았는가 싶은 순간, 안쪽에서 간호원이 금방 나오더니 들어오란다. 와이프가 같이 들어가도 되나 하니까 보호자도 같이 와도 좋단다. 안에 들어가니 가운데는 복도, 좌우로 소파들이 마주 보고 늘어서 있다.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앉으란다. 이 소파는 밖의 소파보다 좋은 거다. 양옆에 팔걸이가 있는 베이지색 가죽소파인데 흔들의자 기능까지 된다. 이런데 돈 쓰지 말고 병원비나 좀 내리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첫 번째 간호사. 40대 동양계 여자다. 중국계나 일본계와 하와이 혈통이 섞인 듯한 인종이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몸무게 재고, 키 재고, 혈압 재고, 체온을 순식간에 재더니 “오늘 손볼 곳이 오른쪽 눈 맞죠?” 물어보더니 오른쪽 이마에다 빨간 스티거 하나 틱 붙여놓고 간다. 이거 무빙 세일이나 거 라지 세일할 때 가격 표시해 놓는 스티컨데…. 졸지에 내가 거라지세일에 나온 물건이 됐다.
두 번째 간호사. 30대 백인 여자다. 키가 작은 것이 혹시 동양계가 섞였을지도 모른다. 자기 이름은 누구누구라고 말하며 인사하는 게 꽤 친절하다. 눈에 안약을 넣어준다. “이 안약은 검사를 위해서 동공을 확대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약간 쓰라릴 수도 있을 겁니다” “혹시 전에도 이런 거 해본 적 있나요?” 약간 따끔하다가 이내 괜찮아졌다.
그러는 사이 꽃무늬로 된 카키색 커튼으로 가려진 옆쪽에는 다른 환자가 와서 앉았다. 어떤 50대 여자는 금방 눈 수술을 받은 듯 눈에 흰 붕대를 하고 간호사와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며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앞쪽에는 30대 여자가 어디가 많이 아픈듯한 표정으로 보호자와 함께 앉았다. 그 옆에는 아기가 수술을 받은 듯 보호자에 둘러싸여 있다. 간호사가 아기에게 가더니 “오렌지주스 줄까? 과바주스? 파인애플 주스?” 묻는다. 이 병원에는 주스가 종류별로 다 있나 보다. 복도에서는 간호사들이 서로 아침 인사를 하며 마구마구 수다를 떤다.
세 번째 간호사. 40대 동양계 여자다. 필리핀계 같다. “아이고~ 눈이 작네 어쩌네” 하면서 온다. ‘아이고 나도 눈 작은 거 안다’ “좀 따끔할 거다” 경고하더니 어느 팔에 주사를 꽂을 거냐고 묻는다. 왼팔을 내밀었다. 혈맥을 찾아 주사 바늘을 꼽고, 눈을 보더니, “동공 확대가 잘 됐구나” 한다. 주사 바늘 꽂은 자리 굽히지 말라며 왼팔에 따뜻한 시트를 한 장 접어서 깔아준다. 아까 두 번째 왔던 간호사가 다시 왔다. 안약을 또 한 번 넣어주면서 지금 담당의사가 수술 중인데 예정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아 내 수술도 예정보다 빨리 시작될 거라고 한다.
잠시 후, 의사가 왔다. 중국계 50대 남자다. 내 주치의가 소개해준 하와이 의대 출신의 망막전문의다. 반갑게 악수를 청한다. 이 의사는 내가 다니는 안과 의사이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사이다. 미국에서는 전문의가 보통 자기 사무실 (Dr’s Office)을 따로 가지고 있다. 수술을 하려면 날짜와 시간을 서로 수술이 가능한 시간을 맞추어 큰 병원에 장소 예약을 하고 의사와 거기서 만난다. 아까 그 세 번째 간호사가 안내하는 조그만 수술실로 의사와 이야기하며 나란히 걸어 들어간다. 와이프도 같이 들어오란다.
의사가 오늘 수술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해 준다. 15분이면 끝날 건대, 눈에 안약 두 번 넣고 나서, 팔에 꽂은 주삿바늘로 10분간 약을 넣을 거고, 그다음에 1분 30초간 레이저 수술을 하면 끝이다. 전에 찍은 눈 사진을 보여주면서 레이저 수술의 이유를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말 그대로 안약 넣고, 혈관에 10분 동안 약 넣고 레이저 수술 시작…
1분 30초 경과. 레이저 수술이 끝났다. 나보고 잘했단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앞으로 5일간은 햇볕에 나가면 안 된다. 간호사가 “선글라스 가져왔냐? 모자 가져왔냐? 장갑 가져왔냐?” 묻는다. 장갑은 안 가져왔다니까 흰 장갑을 하나 주고, 내 선글라스가 랜즈가 너무 작다며 마이클 잭슨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하나 주겠단다. 의사도 옆에서 있더니 “그 선글라스는 멋지긴 하지만 눈을 보호하기에는 별로다” 한마디 거든다. 손목에는 5일간 햇볕에 나가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적은 노란 팔찌를 채워준다. 놀이동산 자유이용권 같다. 모자 쓰고, 얼굴 반쯤 가린 마이클 잭슨이 돼서 1시간 반 만에 병원을 빠져나왔다.
(2003. 2.25)
하와이에서 병원에 가서 수술한 게 이때가 처음이다. 레이저로 피가 흐르는 곳을 멈추게 하는 간단한 수술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또는 이때 이후 미국에서도 수술하러 병원에 간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때 눈 수술을 한 것은 망막의 한쪽에서 실핏줄이 터져 피가 조금씩 흘러내려서였다. 아프지도 않았고 처음에 어떻게 알았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난다. 눈을 어디에 세게 부딪힌 것도 아니었다. 그전에 한국에 잠깐 들어갔다가 비자 변경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때 2주 일정으로 한국에 갔다가 비자 재발급 절차가 까다로워 본의 아니게 두 달 정도의 기간을 한국에 머물며 신경을 많이 썼던 적이 있다. 비자 진행이 안돼 거의 매일 하와이의 회사나 미 대사관에 전화를 했었다. 그런 와중에 연말이라 비자담당 영사가 휴가를 가서 더 늦어지기도 했었다. 최악의 경우 하와이의 살던 짐을 정리도 못하고 그대로 한국에 주저앉아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것 아니면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논문 쓴다고 거의 매일 밤을 꼬박 새우며 신경을 많이 써서 그랬을 수도 있다.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않아서 논문 초안을 쓰기 시작하면 새벽 3시, 4시, 어떤 때는 밤을 새우기도 일쑤였다. 논문을 영어로 써야 하니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리적으로, 문법적으로 맞는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가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밤새워 쓰고 지우 고를 반복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허탈해진다. 책상에 꼬박 앉아서 밤을 새웠는데 남아 있는 문장은 하나도 없고 컴퓨터 커서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래도 세월이 가니 해결이 됐다. 논문도 완성했고, 졸업도 했다. 졸업 이후에는 마음이 편해지고 잠을 잘 자게 되니 몸무게가 꽤 늘기도 했다. 요즈음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쉬고 있게 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몸무게는 평상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활동이 줄어 먹는 양을 줄이고 매일 1시간 반씩 산책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살다 보면 이따금씩 어려운 때가 불현듯 찾아온다. 그러나 어려움에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그 어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인 후,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를 하다 보면 어려움은 어느샌가 소리 없이 사라진다. 어렵다고 너무 낙담하지 말고, 잘 나간다고 너무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03.0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