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ue Bird Apr 20. 2021

조깅하면서

하와이 사는 이야기

어제 갔던 마키키, 코스를 약간 달리하니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푸나호우 스쿨(Punahou School) 트랙을 돌고 있을 때 그녀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빨간색 바지. 흰색 티셔츠, 여지없이 굵은 테 안경을 쓰고. 바람처럼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기보다는 여유롭게 휙~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그래 오늘은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벌써 5바퀴째 트랙을 돌고 있었기 때문에 땀이 이마에서, 목에서, 등에서 가슴에서, 엉덩이에서 사정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땀이 팬티의 엉덩이 부근까지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나를 따라 마신 그녀를 다시 따라 마시기 위해 더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나의 팔다리는 뇌에 온갖 엄살을 떨었다. 목표치인 여덟 바퀴가 다 되어도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몸이 다시 축축 늘어지면서 한마디 내뱉는다. "우 씨 ~ 잰 육상선순가? 되게 빠르네..." 


(2004. 6.4)




그때는 거의 매일 저녁 푸나호우 스쿨 트랙에서 뛰었나 보다. 지금은 거의 매일 알라모아나 공원에서 걷기를 한다. 지금도 뛰라면 뛸 수는 있을 테지만 굳이 무리하고 싶지가 않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어폰으로 오디오북을 듣기도 하면서, 매일 보는 공원 풍경이지만 바다와 나무를 보면서 자연이 참 아름답구나 새삼 느끼며 걷는다. 이어폰으로 오디오북을 듣다가 어떤 생각이 나서 그 내용에 집중이 안되면 아예 끄고 생각에 집중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인생이 참 긴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하와이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어느새 24년이 지났지만 그 지난날들이 아주 오랜 옛날이 아니라 바로 엊그제 같다는 느낌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맞닥뜨리기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어려움을 용케 헤쳐나갈 기회가 늘 함께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내가 평균수명만큼 산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을 앞에 두고서 꿈만 꾸고 해보지 못해 아쉬워하기보다는 "이 세상에 와서 참 잘 놀다가 가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04.19.2021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18xx Punahou Stree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