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사는 이야기
어젯밤 프랑스를 거쳐서 이태리를 다녀오느라고 무척 피곤하다. 프랑스의 에펠탑이 생각보다 둔탁하고, 레드와인에 녹아있는 깊은 맛이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는 듯하다. 피사의 탑에 철근을 동여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듣고 하도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목 뒤쪽이 뻐근하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에 하와이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커피가 여독을 풀어주기에는 충분치 못한 듯하다.
새벽 1시 넘게까지 읽다가 내일이 걱정돼 덮은 코헨 가족의 세계 여행기. 재밌다. 아니 부럽다.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한줄기 생각이 머릿속을 휙 스쳐갔다. 나도 갈까...? 갔다 오면 뭐 어떻게 되겠지. 아이를 학교에서 1년만 빼내고 이것저것 팔아서 그냥 떠나볼까? 있는 거 없는 거 다 모으면 경비가 되지 않을까... 갔다 오면 또 뭔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남들이 부러워할까 미쳤다고 할까...
복잡한 생각이 짧은 시간에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출판사를 하는 40대 초반의 데이비드, 그의 와이프 데비, 8살짜리 아들, 7살짜리 딸, 2살짜리 아들. 이들 가족의 세계 여행기를 읽으며 나도 그들과 함께 짐을 쌌다 풀었다 한다. 다음 행선지를 슬쩍 보니 그리스와 이집트다. 빨리 가방 싸야지, 비행기 놓칠라.
(2004. 7.13)
17년 전에 "One Year Off"라는 David Elliot Cohen의 가족 여행기를 읽을 때 써놓은 글이다. 코헨은 A Day in the Life America를 시작으로 사진집을 발간해 성공시킨 편집자겸 작가다. 반복되는 똑같은 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그가 마흔쯤에 일을 그만두고, 집도 팔고, 차도 팔고, 어린아이 세명과 와이프를 데리고 떠난 세계 여행기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우연히 이 책을 반스 & 노블에서 발견하고 날새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그때 나도 그처럼 떠나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난달 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책이 버릴 책으로 분류되어 한동안 문 앞에 놓여있다가 버리기 바로 전에 한 두장 읽어보다 다시 한번 읽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운명을 달리해 다시 책장으로 들어갔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그때 내가 상상으로만 꿈꾸던 이태리에 2018년에 다녀온 것이다. 2018년 여행 때는 코헨의 책은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코헨처럼 다 정리하고 장기간 세계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다. 2주의 휴가를 내고, 막 대학을 졸업한 다 큰 딸을 데리고, 소피와 함께 간 것이다. 가는 길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4박을 했고, 이태리는 베니스, 플로랜스, 로마를 여행했다. 로마에서 마지막 날에는 당일치기 여행으로 갑자기 기차표를 끊어 폼페이에 다녀오기도 했다. 가고 싶다는 상상으로 쓴 글이 14년 만에 실현된 것이다.
지금은 유럽의 어딘가에 가서 최소한 몇 달간, 가능하면 몇 년간 살다가 오는 상상을 한다. 예전의 꿈이 이루어졌듯 계속 이런 꿈을 가지고 늘 생각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자. 인생은 짧다.
05.0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