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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Jul 16. 2021

액땜

하와이 사는 이야기

하와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플루메리아

2011년 새해 첫날 출근길에 죽을 뻔한 일이 발생했다. 평소처럼 세라를 학교에 내려주고 집에 와서 아침을 먹은 후 소피를 내려주고 회사 쪽으로 운전하던 중이었다. 사거리에서 한참 기다리다 신호를 받은 후 직진하는 순간, 왼쪽에서 오던 차가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급정거를 하고, 나를 따라오던 차도 급정거를 했다. 신호를 무시한 그 차는 그대로 사거리를 통과해 유유히 사라졌다. 과속이다. 만약 내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 이렇게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이다. 크게 사고가 나 적어도 중상, 운 나빴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사거리를 얼른 지나왔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린 그 차의 운전자를 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야만 속이 시원할 듯싶었다. 하지만 고작 나에게서 나타난 반응은 '뭐 저런 놈(혹은 년)이 다 있나...' 하는 단계에서, '어휴~ 큰 일 날 뻔했네' 단계, 그리고 채 30초도 못 가서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나마 운이 좋다'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욕심부리지 말고 좀 더 착하게 살자'는 단계까지, 또는 '이제 남은 생을 보너스처럼 여기며 살자'는 단계로 자꾸만 잦아들었다. 새해 첫날 이런 경험이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나에게 도움이 될 듯싶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하루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 수 있음을 감사하라는 메시지 아닌가. 어디 먼 곳에서 누군가가 이런 고마운 메시지를 보내준 걸까... 이렇게까지 비약하는 나를 보며 '이제 나도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지금 팔팔한 10대나 20대였다면 신호를 무시한 그 차의 운전자에게 무진장 욕을 해댔을 텐데.


지난해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보낸 것 같지만 돌아보면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지나간 것 같다. 부동산 에이전트를 고르고, 집을 사고, 수리하고, 이사하고, 가전제품 들여놓고... 집과 관련된 일이 가장 큰 변화다. 그 전 집과 새 집 사이의 거리가 차로 채 1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지만 이사로 인해 생활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소피는 직장에서 많이 따랐던 상급자 겸 동료가 캘리포니아로 이사 가면서 일의 비중이 더 커진 듯하다. 근 일 년 전부터 혼자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전에 하던 일에 비해 좀 더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니 일은 힘들어도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세라는 일 년 사이 부쩍 성숙한 느낌이다. 아직도 어린아이테가 많이 나고 집에서 여전히 어린양 도 부리지만 이제는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만든다. 차를 타고 어디갈 때 뒷좌석에 앉아있을 때면 전에는 항상 귀에 아이팟을 꼽고 있든지 뭔가 놀이거리를 찾는 눈이었지만 최근에는 눈여겨보니 멀리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경치를 보고 있는 눈이 어느 정도 어린 티를 벗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


문제는 나다. 나는 올해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며 어디를 지향해야 할까가 고민이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목표로 할까? 14년 가깝게 같은 직장에 다녀서 너무 지겹고 이제는 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 몇 년 들어 자주 한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런 생각은 사치일까? 아니면 지금 때를 놓치면 점점 더 시작이 어려울까?


연말연시를 어떻게 보냈나... 지난해 마지막 날. 회사에서 종무식 겸 마시던 와인이 너무 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이끌고 테니스를 친다고 나가서 헛손질만 수차례 하다가 집에 왔다. 음주운전만이 아니라 음주 테니스도 위험하다. 연말 마지막 날 자정. 폭죽놀이를 하는지 안 하는지 집에 와서 그냥 잤더니 새해가 이미 밝았다. 새해를 맞아 "오야가자~" 하며 소피와 세라를 태우고 노스쇼에 갔다. 파도 한번 보고 쿠아아이나 햄버거 먹고 다시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새해 첫날 오후 세라 학교 갈 준비를 위해 약간의 샤핑을 하고 저녁에는 다시 테니스 치러 갔는데, 음주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는지 지겹게 공이 안 맞았다. 2010년이 그렇게 갔다.


(2011.1.3)  




50대 후반이다. 60이 다가오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30여 년을 살았고, 하와이에서 20여 년을 살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기본적인 교육을 받는데만 16년이 걸렸다. 대학원까지 합치면 교육만 19년이다. 일한 햇수는 30년이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일 할 수 있고,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모든 일이 계획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계획은 최소한 8년간 더 일하고, 최소한 80세까지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이제 몇 년 있으면 그 75%를 지나는 시점이 금세 올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25%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 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항상 다른 곳이 궁금하다. 그래서 여행을 가는 것이지만 은퇴 이후에는 잠시 다녀오는 여행보다는 오래 머무는 주거형 여행을 하고 싶다. 이태리의 시골에서는 인구감소로 폐허가 되는 지방을 살리기 위해 오래된 집을 1유로에 판매하는 곳도 생겨난 지 오래됐다. 물론 1유로에 집을 사면 수년 이내에 수만 불을 들여 고쳐야 하는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10만 불 이상이 필요한 것 같다. 10만 불이면 그래도 미국에 비해 아주 싼 편이다. 이태리의 그런 집을 하나 사서 멋지게 고친 후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 집에 근거지를 두고 유럽의 각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다. 일부 미국인들이 이런 집을 사서 이주했다고 한다.


이태리든 다른 유럽의 어느 나라든 단순히 집을 산다고 이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에 장기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 장기거주 비자는 취업, 결혼, 투자, 학생 등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지금 나이에 가장 적당한 것은 투자비자나 은퇴비자가 아닐까 싶다. 지금 사는 하와이가 참 좋은 곳이지만 이대로 여기서 남은 25%의 삶을 변화 없이 보내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이태리나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같은 곳에서 장기거주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남은 8년여 동안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겠다. 그 후에도 갈 곳이 많다. 태국,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와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그리고 남아프리카, 케냐,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대륙에도 가봐야 한다. 그러고 보니 세계는 아직도 갈 곳이 많고 은퇴 이후에도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07.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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