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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Jul 20. 2021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하와이 사는 이야기

쓰러져 죽은 나무 위에 또 다른 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마키키 트레일에서.


요즘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을 읽고 있다. 내가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소피가 도서관에서 그의 책 한 권을 빌려왔기 때문이다. 소피가 빌려온 책은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제목의 책으로 작가가 사는 이야기를 그냥 메모처럼 쓴 에세이다. 무심코 그 책을 펴보다가 파울로 코엘료라는 이름을 언젠가 들어본 듯한 생각이 났다. 작가 소개를 보니 <연금술사>를 쓴 사람이다. 연금술사라는 제목도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은 확실히 '있다'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없다'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애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그렇게 애매하다. 그래서 오래전에 본 DVD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또 빌려보고.. 하는 것이다.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그다지 재미있다고, 읽을만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책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파울로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할 수 없다. 내가 내 블로그에서까지 예의를 차려가며 "네 꼭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연금술사를 읽어본 사람들의 평이 좋아서 그다음 주 토요일 도서관에 갔을 때 파울로의 책을 두 권 빌려왔다. 그중 한 권이 <11분>이란 책이다. 제목으로서는 좀 특이했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아서 이제 몇 장만 더 읽으면 거의 다 읽는다. 나는 여기서 굳이 그 내용을 소개할 생각은 없다. 책을 읽어보든지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내가 소개하는 것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 책에서 흥미를 가지게 되는 부분이다. 과연 내가 그 책에서 흥미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다른 사람도 흥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브라질 출신의 마리아가 스위스에서 고급 창녀로 살아가는 얘기다. 그중에는 사디즘(Sadism; 육체적 학대를 가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욕)과 마조히즘(Masochism: 육체적 학대를 당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변태성욕)을 묘사한 장면도 나온다. 그런 부분을 묘사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별로 재미있다거나 동감이 가지 않는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브라질 시골에서 가진 것이라곤 젊음과 아름다움만 있는 마리아가 혼자 스위스에 와서 삶을 헤쳐나가는 부분이다. 고향에 돌아가면 가족이 있고 평범하게 결혼해서 브라질 시골 아낙네로 일생을 살 수 있지만 마리아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비록 스위스에서 창녀로 살고 있지만 나중에 돌아가서 농장을 운영하고자 하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 내가 마리아라면 어떤 쪽을 택했을까. 태어난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늙어 죽는 쪽과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새로운 곳으로 가서 삶을 개척하는 쪽. 후자 쪽이 아닐까. 창녀까지는 될 생각은 못하겠지만 스위스 어딘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뭔가에 도전하는 삶을 택하는 쪽일 것이다. 스위스라는 곳에 처음 도착한 마리아라는 주인공과 나를 동일화시키는 과정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진행되었다. 


(2011. 2.11) 




사람의 운명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 어느 인종으로 태어났느냐에 따라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지는 것 같다. 그다음에는 부모가 어느 계층이냐에 따라 달라지고,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또 길이 갈린다. 그래서 사실 한 개인의 인생을 결정짓는 데에는 그 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부분이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 물론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거나 또는 특별히 운이 좋아 어느 정도 정해진 듯한 인생을 반전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정해진 테두리 내에서 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 내가 한국에서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미국에서 백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다면? 이미 어떤 조건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런 상상을 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미국 동북부의 백인 상류층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이비리그 중 하나의 학교를 졸업한 후 좋은 직업을 갖고 코네티컷의 큰 하우스에서 백인 아들과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고, 에티오피아의 시골지역에서 태어나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직업을 구할 수도 없고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면서 굶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 하나의 지구 상에서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같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람들 중에도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좀 더 크게 보면 그건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한 것 같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인생은 단 한번뿐이다.   


07.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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