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ue Bird Aug 15. 2021

런던에서 보르도

하와이 사는 이야기

런던의 St. Paul Cathedral. 방문한 날이 주일이라 미사에도 잠시 참석.


런던에서 파리로 떠나기 위해 기차를 탔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내렸다. 아무래도 낯선 길이라 잘못탄 느낌이었다. 역무원에서 파리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역무원이 영국 사람인지, 프랑스 사람인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영어를 사용했는지, 프랑스어를 사용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역무원은 동그랗고 폭이 깊은 데다 좁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가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별표와 동그라미까지 그려가면서. 그 별표를 친 것은 앞의 별표 친 방법을 사용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가 말을 영어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종이에 써 내려간 내용은 분명히 영어였다. 그 설명을 듣던 나는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왜냐하면 정작 내가 가야 하는 곳은 파리가 아니라 보르도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 역무원에게 "미안하지만 내가 가야 하는 곳은 파리가 아니라, 보르도"라고 다시 말해야 하는 걸까. 파리 가는 방법에 대해서 저렇게 열심히 설명하는데.....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곤란한 상황에서 꿈에서 깨어나 그것이 꿈이었음을 깨달을 때는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꿈이 아니었다면 저런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내가 왜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꿈을 꾸게 됐을까. 소피, 세라와 함께한 여행도 아니라 나 혼자만의 여행이었던 것 같다. 유럽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하긴 해도 아직은 '언젠가는...' 수준일 뿐이다.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꿈에 나타났을까. 내 잠재의식은 나보다 더 유럽여행을 하고 싶은 걸까. 런던과 파리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가는 곳이라 꿈에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보르도는 어떤 이유로 내 꿈에 등장했을까. 내가 보르도와 관련해 알고 있는 것은 와인뿐인데. 그리고 꿈에서 와인은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자유로운 잠재의식이 부럽다. 언제든 가고 싶으면 유럽여행을 훌쩍 떠나버리는 그 자유로움이 너무 부럽다.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세라를 학교에 픽업, 드롭하지 않아도 되고, 모게지 내지 않아도 되는 잠재의식. 그런 잠재의식과 나의 생활을 한 1년만 바꿨으면 좋겠다. "어이 잠재의식, 나 딱 1년만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로 여행 갔다 올 테니까 회사 잘 다니고, 세라 학교에 잘 데려다주고... 잘 지내게. 그럼 수고하게나..."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간단하게 챙겨 훌쩍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세라가 대학에 가는 2년 후면 그럴 수 있을까. 세라를 본토 학교로 보내고 소피와 둘이서 짐 꾸려서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유럽여행을 하며 살 수 있을까. 그냥 꿈으로만 꾸지 말고 지금부터 계획을 짜 볼까. 영국, 프랑스, 스페인, 또는 이탈리아에서 일을 하며 틈틈이 인근 나라를 하나씩 하나씩 여행하는 계획을 세워볼까...


(2011. 9.21)




꿈은 이루어진다. 10년 전 내 잠재의식이 얼마나 유럽여행을 가고 싶었으면 꿈에서까지 나타났을까?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유럽여행을 두 차례나 다녀왔다. 첫 유럽여행은 2018년 5월에 다녀왔다. 세라가 201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면서 우리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2주일 정도 일정으로 떠났다. 호놀룰루에서 뉴욕을 거쳐 터키의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탄불 4박 후 이태리에서는 베니스 - 플로랜스 - 로마 - 폼페이를 구경했다. 오늘 길에 다시 뉴욕과 라스베이거스를 거치는 여행이었다. 처음에 소피와 둘이서만 갈 예정이었으나 세라가 그 사실을 알고 자기도 가겠다고 해서 합류했다. 한번 다녀오니 다시 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2019년 10월에도 한번 더 2주 일정으로 유럽에 갔다. 이번에는 호놀룰루 - 보스턴 - 영국 런던 - 체코 프라하와 체스키 크룸로프 -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키츠부헬, 인스브루크 - 독일 뮌헨 -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쳐 다시 런던에 도착한 후 라스베이거스 - 호놀룰루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2주간의 짧은 일정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긴 했지만 아침을 호텔에서 먹고 천천히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식으로 하루 일정 자체는 그리 빡빡하게 짜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세라와 함께 한 가족여행이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 유럽에 가볼 수 있을까 생각했고 2011년에는 꿈까지 꾸었던 일이 7년 후에는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세한 여행기는 블로그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현재의 상황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어렵더라도 꿈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순간이 어느 순간 오는 것이다. 내가 하와이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것이 이루어졌고, 이민생활에 적응하며 빠듯한 생활을 하면서도 유럽여행을 하고 싶다는 꿈을 잊지 않은 것이 몇 년 후에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2013년 세라를 보스턴의 대학에 보내면서 과연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다 대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그 당시 우리 수입을 단순히 계산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면 1년 학비만 5만 달러가 넘었고, 기숙사와 생활비 등 다 따지면 1년에 10만 달러씩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4년이면 40만 달러니 4억이 넘는다. 일단 가고 싶은 대학에 가기는 하지만 만약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지면 하와이로 돌아오게 할 생각도 있었다. 물론 세라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이 없어 아이가 가고 싶은 대학에 가는 것을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다행히 장학금도 일부 받았고, 수입도 늘었고, 학생융자도 해서 무사히 졸업시킬 수 있었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 막연하게 꿈만 꾸어서는 안 되고 실제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08.14.2021   


            

매거진의 이전글 하와이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