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 비행기보다 낮 비행기를 선호한다. 밤 비행기는 밤 시간을 이용해 목적지에 데려다 주기에 시간과 호텔비를 절약해 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밤에 비행기를 타면 피곤함이 크다. 그래서 가능하면 하루의 시간이 더 들어가고 비용면에서도 효율이 떨어지는 낮 비행기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호놀룰루에서 아침 일찍 출발, 콜로라도 덴버에 밤늦게 도착하는 낮 비행기를 선택했다.
비행기는 제시간에 출발했다. 5시간 이상의 비행이라 기내 엔터테인먼트가 제공되는 줄 알았는데 스크린이 없다. 개인 디바이스, 즉 개개인의 전화기나 아이패드 등을 통해서 영화든 음악이든 들을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런데 내 삼성 갤럭시 s21 은 와이어리스 헤드폰만 가능하다. 준비해 간 소음방지 헤드폰을 사용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당황스럽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임시방편으로 전화기를 와이어리스 헤드폰에 연결한 후 그 위에 소음방지 헤드폰을 귀에 덮었다. 두 헤드폰의 합작으로 영화를 보거나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내에서 제공한 녹차에 집에서 준비해 간 계란말이 도시락을 먹는 사이 항공기는 LA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LA 공항에서는 샌드위치 하나 사고 화장실 다녀오고 하는 사이 금세 보딩 시간이 됐다. 덴버행 항공기를 탑승하는 게이트를 찾으려다 잠시 헤맸다. 안내판이 모호해서 반대편 게이트 쪽으로 한참 걸어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그 때문에 좀 걸었으니 오히려 잘됐다. 운동이 필요했으니. LA 공항도 예전처럼 만큼은 아니지만 여행객들이 적지 않았다. 코로나의 분위기는 오로지 마스크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LA에서 콜로라도 덴버까지 비행시간은 2시간 20분이다. 좌우로 세 자리씩 좌석이 있는 작은 항공기다. 나는 일부러 좌석을 뒤쪽 창가와 복도 쪽으로 잡았다. 가운데 좌석이 비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거의 만석인데 다행히도 그 자리는 비었고 소피와 나는 조금 더 여유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밤 10시 10분. 드디어 항공기가 덴버에 도착했다. 덴버공항은 상당히 큰 규모였다. 내린 곳에서 트램을 타고 베기지 클레임으로 이동했다. 가방을 찾은 후 밖으로 나가니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먼 거리를 이동했고 여기가 더 이상 따스한 하와이가 아님을 새삼 실감했다. 15분쯤 기다리니 호텔 셔틀이 도착했다. 승객은 우리뿐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10분 정도 가니 예약한 더블트리 에어포트 호텔이 나왔다. 밤늦은 시각에 도착이라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을 잡은 것이다. 내일은 공항에서 차를 랜트해 로키산에 갔다 올 예정이라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가는 셔틀 시간을 호텔 체크인하면서 예약했다. 공항 엔터프라이즈에 8시에 예약했으니 셔틀은 7시에 예약했다. 내일 아침 일찍 해 뜨면 바로 로키로 가는 거다. 호텔은 생각보다는 별로였다. 힐튼 골드멤버라 아침이 제공되는데 요즘엔 코로나로 인해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하루 24달러까지 크레딧을 준다. 우리는 이 크레딧으로 약간의 먹을 것을 샀다. 그리고 아침에 남은 크레딧으로 스타벅스에서 그린티를 하나 픽업했다.
공항에서 랜탈 카 셔틀을 타고 엔터프라이즈에 도착했다. 직원이 직접 랜탈 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어느 차를 타겠냐고 물었다. 내가 예약한 건 SUV라고 했더니 아~ 그렇구나 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선택한 차는 토요다 RAV4 였다. 보험을 들겠냐고 해서 내 보험으로 하겠다고 했다. 톨비는 지나가면 자동으로 계산된다고 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가져간 네비를 로키산의 입구인 에스테 파크에 맞춘 후 천천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약간 묵직하다고 할까, 차를 운전하는 느낌이 좋았다.
로키산맥은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와 앨버타주에서 시작해 미국의 몬태나, 아이다호, 와아오밍,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산이다. 지난 2009년 6월 캐네디언 로키 밴프를 다녀온 이후 이번이 두 번째고 미국 쪽으로는 처음이다. 2시간여 달려서 에스테 파크 부근에 도착했고 로키 산 입구에 다 달았다. 입구에서 25달러인가를 주고 표를 사야 했다. 매표원 하는 말이 로키산에서 가장 경치가 멋진 곳으로 유명한 Trail Ridge Road (12,183 ft)는 이미 3주 전에 폐쇄했다고 한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첫눈이 온 후 얼어서 이미 겨울 시즌에 들어간 것이다. 베어 레이크는 갈 수 있는데 호수 주변을 걸으려면 파이크 슈즈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베어 레이크로 방향을 잡았다.
잠시 후 도착한 베어 레이크는 이미 겨울이었다. 주차장이 꽉 찼는데 마침 한 대가 나가길래 얼른 그 자리에 세웠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이 차가웠다. 눈발도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가을에서 겨울로 불쑥 넘어온 느낌이다. 얼른 차에서 귀를 덮는 모자와 점퍼를 꺼냈다. 두 시간 거리인데 고도가 높으니 덴버와 기온차가 많이 났다. 눈이 조금씩 날리는 베어 레이크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호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파이크 슈즈가 없어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경사진 곳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하와이에 오래 살다 보니 이런 풍경이 낯설고도 그리웠다. 베어 레이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Glacier Gorge라는 곳이 있는데 잠시 내려보니 경치가 참 좋았다. 로키 산 비지터센터에 들렀다가 Trail Ridge Road는 못 가지만 폐쇄한 곳 바로 앞까지는 갈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한 바퀴 돌아 다음 목적지인 스탠리 호텔로 가기로 했다. 도로 옆으로 눈 덮인 봉우리들이 저마다 뽐내는 모습이 감탄할만했다. 그렇게 한동안 설산을 만끽하고 에스테 파크에 있는 스탠리 호텔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