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하와이는 1500년 전 폴리네시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발견해 문명세계에 처음 알려졌고, 1810년 카메하메하 1세가 하와이를 통일했다. 1820년에는 서양의 선교사가 처음 도착했다. 1835년 카우아이에 처음으로 사탕수수 농장이 생겼고 사탕수수 농장이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이민을 시작한 1900년대 초반 하와이의 경제는 사탕수수 산업이 이끌고 있었다.
백인 자본가들이 소유한 사탕수수 농장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노동자를 들여와야 했다. 사탕수수 노동자로 처음 하와이에 발을 들인 이민자는 1852년에 도착한 중국인이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처음엔 소규모로 들어오다가 1876년부터 1885년 사이 9년 동안 5만여 명이 하와이로 들어왔다. 중국인 다음으로 하와이에 들어온 노동자들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1885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1890년대 초반에는 그 수가 이미 중국인을 넘어섰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사탕수수 농장과의 의무 계약기간 3년을 마치자마자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더 나은 임금과 생활환경을 찾아 하와이의 도시지역이나 미국 본토로 떠나갔다.
1903년 1월 한국인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이전, 사탕수수 농장에 남아있던 중국인 노동자는 2만 7천여 명, 일본인 노동자는 7만 6천여 명이었다. 남태평양 섬나라들과 포르투갈, 독일, 노르웨이 등 유럽에서도 노동자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1901년에는 푸에르토리코에서 6천여 명의 노동자를 공급했지만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사탕수수 노동력으로 적합치 못한 것으로 평가됐다. 전체 사탕수수 노동자의 2/3는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1882년 통과된 중국인 배척법 (The Chinese Exclusion Act)의 영향으로 1898년부터 미국령이 된 하와이도 중국인 노동자를 들여오는데 제동이 걸렸다. 농장주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독점해 노동쟁의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 (HSPA; Hawaii Sugar Planter Association)는 1902년 대한제국 주재 미국 외교관 호러스 알랜 (Horace Allen) 이 미국에 들렀다가 다시 한국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던 기회를 이용,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한국인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호러스 알랜은 미국 의사로 조미수호통상조약 다음 해(1883년)에 장로교 소속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인물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시 민영익을 치료해준 공로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후 미국 공사로 일하며 조선 내 금광개발 등 미국의 각종 상업적 이권을 따낸 인물이다. 호러스 알랜은 같은 오하이오 출신으로 미국 내 정치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사업가 데이비드 대실러 (David Deshler)를 사탕수수 노동자 모집책으로 선정했다. 데이비드 대실러는 한국인 노동자를 하와이로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동서개발회사 (East and West Development Company)라는 이민 회사와 한국인 이민자들의 선박비를 지원하기 위해 대실러 은행 (대시라 은행)을 설립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는 팩손 비숍(E. Faxon Bishop)을 한국에 파견하고 한국인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운송할 배편을 마련하고, 2만 5천 달러의 자금으로 대실러 은행 설립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