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1902년 11월, 고종은 마침내 마침내 하와이 이민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 고종은 호러스 알랜의 권유에 따라 유민원을 설립해 이민을 담당케 하고, 하와이 이민을 모집할 수 있는 독점권을 데이비드 대실러에게 주었다. 대실러는 항구도시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이민자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이민자 모집은 예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고종 치하의 대한제국은 1901년부터 지속된 가뭄과 홍수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유교적 개념이 지배적이어서 쉽사리 나라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랜의 지인인 감리교 인천 내리 교회 조지 허버 존스 (George Heber Jones) 목사가 신도들에게 하와이 이민을 적극 권유하면서 이민자가 하나둘 모집되기 시작됐다.
그는 하와이의 날씨와 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하와이에 가면 교회도 세울 수 있다며 하와이 이민을 적극 추천했다. 이에 따라 50여 명의 남녀 기독교인을 비롯 인천항에서 일하던 20여 명의 부두 노동자들, 수원과 부평 등에서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이 이민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총 121명이 제물포항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 '현해환'에 몸을 실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19명이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나머지 102명은 하와이로 가는 갤릭호로 갈아타고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2일 자정 호놀룰루 외항에 도착했다. 다음날 새벽까지 기다리다가 오전 3시 30분 마침내 호놀룰루항에 닻을 내렸다. 이날이 1903년 1월 13일, 한국인의 첫 미국 이민이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다.
첫 한인 이민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조지 피어슨 (George L. Pearson) 감리교단 감리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조지 하버 존스 목사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었다. 배에서 진행된 신체검사에서 8명의 남자가 눈병으로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들의 아내 5명과 어린이 3명 등 총 16명을 제외한 86명 (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이 마침내 호놀룰루에 상륙했다. 이들은 협괴열차 편으로 오아후 노스쇼어에 있는 와이알루아 (Waialua) 농장의 모쿨레이아 (Mokuleia) 캠프로 향했다.
첫 이민자들이 순조롭게 하와이에 입국하자 대실러의 이민자 모집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두 번째 그룹 90명은 2월 10일 인천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3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들은 오아후 노스쇼어의 카후쿠 (Kahuku) 농장으로 배정됐다. 카후쿠 농장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의 캠프는 20여 개의 작은 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임금은 노동자는 한 달 16달러, 통역은 한 달 25달러였다. 3월 19일에는 세 번째 그룹 83명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네 번째 그룹 124명이 3월 3일 한국을 출발했고, 다섯 번째 그룹 73명은 3월 24일, 여섯 번째 그룹 61명은 4월 21일에 각각 한국을 출발했다. 이렇게 첫 6개월 사이 약 600명에 가까운 수의 한국인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남자가 450여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여자와 어린이는 각각 6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