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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온화한 기후에 풍족한 일자리

하와이 한인 이민사

by Blue Bird

한인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보내는 일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국 내에서는 이용익을 비롯한 일부 고위관리들과 장로교회가 없는 하와이로 교인들이 떠나는 것을 우려하던 미국인 장로교 목사, 그리고 일본인의 하와이 이민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일본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는 알랜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할 수 있었다.

하와이에서도 한인 노동자의 수입이 이민법 위반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즉, 한인 노동자들이 사전에 노동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 이들이 타고 오는 선박비를 빌려주는 것, 그리고 이민자 한 사람당 입국 시 지참해야 하는 50달러의 자금을 빌려주는 것은 모두 이민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들로 인해 1903년 8월 말까지 4개월간 한인 노동자들의 하와이행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들도 당시 하와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HSPA)가 무마시킬 수 있었다.


1903년 8월 말, 한인 이민선은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1903년 가을 동안에 새로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의 수는 6백 명으로 기존의 6백 명과 합쳐 1천2백여 명에 이르렀다. 1904년 상반기에 1천5백 명, 하반기에 2천 명이 더 도착했다. 1905년 상반기에도 2천8백 명이 도착했다. 이렇게 1903년 1월부터 시작된 초기 이민 행렬은 2년 6개월에 걸쳐 7천2백여 명에 이르게 됐다. 1905년 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이민자는 전체 사탕수수 이민자의 10% 에 이르렀다. 일본 이민자가 66%로 여전히 가장 많았고, 1882년 중국인 배척법으로 이민이 중단된 중국인 노동자는 9% 였다.


한편 대실러는 인천, 마포, 부산, 진남포 등 여러 항구로 이민 회사를 늘려 1905년에는 20여 곳으로 지점망을 넓혔다. 러일전쟁이 임박하던 1903년 하반기에는 북동쪽 해안의 성진항에 까지 지점을 설치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전쟁을 피해 돌아오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이민자를 모집했다. 동서개발회사가 써붙인 이민자 모집 안내문에는 하와이의 온화한 기후, 풍족한 일자리, 무상교육, 무료 숙소, 무료로 제공되는 연료, 물값, 의료보험, 그리고 한 달 15달러의 임금을 홍보하는 내용의 글귀가 이민 희망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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