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7. 중단된 이민

하와이 한인 이민사

by Blue Bird

1905년 봄, 순탄하던 하와이 이민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대한제국에서는 1905년 단 한차례 불법으로 진행됐던 멕시코 에네켄 노동자 1,033명이 노예 대접을 받고 있다고 정부 발행 신문이 보도했다. 이 신문은 멕시코에는 이들을 보호해줄 한국 외교관이 없으며, 하와이에도 이민자들을 보호해줄 정부기관이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하와이 이민이 중단된 결정적인 이유에는 일본 정부가 그 배후에 있었다.


1882년 중국인 배척 법으로 노동자가 부족해진 캘리포니아는 인력공급회사들이 철도건설과 과수원에서 일할 노동자를 하와이에서 모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70센트에 불과했는데, 캘리포니아에 가서 일하면 그 두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하와이 일본인 노동자들이 캘리포니아로 재 이주하기 시작했다. 1890년부터 10년간 캘리포니아로 재이주한 하와이 일본인은 1만 5천 명에 불과했으나, 1900년부터 1905년 사이 그 수가 7만 7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인 이민자 수가 급증하자 캘리포니아는 우려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배척 법과 유사하게 일본인의 캘리포니아 이주를 금지하자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외교부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캘리포니아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캘리포니아 이주를 금지시키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꾀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파업은 농장주들이 한인 노동자들을 파업 지역에 대체인력으로 활용하면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인들을 하와이로 보내던 일본 인력송출회사들도 한인 이민자들이 증가하는 만큼 일본인을 보내지 못하자 한인 이민을 중지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수차례 일본 외교부에 보냈다. 일본 외교부는 한인 이민이 중지되면 일본인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파업이 유리해질 것이고, 그 결과 일본인 노동자들의 캘리포니아 이주는 자연적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이민을 중지시키면 일본 정부가 크게 우려하던 일본인 배척 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한인 이민 중단은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서 시작됐다. 1905년 4월 1일, 대한제국 외교부 장관 이하용은 하와이 이민을 일시 중지시켰다. 이민 중단의 직접적 이유는 불법으로 모집한 멕시코 이민이 이민자들을 노예처럼 다룬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대한제국 외교부는 멕시코와 하와이에서 한인 이민자들을 보호할 적절한 조치를 마련한 후에 이민을 재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임시 중단 조치를 영구화시킬 계략을 갖고 있었다. 고종은 외무협판 윤치호를 하와이와 멕시코로 보내 한인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윤치호는 하와이를 방문해 한인 노동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는 1905년 9월 8일 하와이에 도착해 4주간 하와이에 머물며 30여 사탕수수 농장을 방문하고 한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교력을 압박하던 일본 정부는 고종의 특사가 멕시코까지 방문하는 것을 꺼려해 윤치호의 멕시코행은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이민 중단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실러는 이미 모집한 지원자를 하와이행 배에 태웠으며, 계속해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여권을 발행하던 인천의 감리는 여권 발행을 중단하지 않았고 다른 지역에서는 여권 없이 떠나기도 했다. 1905년 4월 15일 캡틱호(Captic)로 175명, 4월 29일에 시베리아(Siberia) 호로 329명, 5월 9일 몽골리아 (Mongolia) 호로 279명이 계속해서 하와이로 출발했다. 5월 한 달간은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노동자가 1천 명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인 이민을 통제하려는 일본 정부의 압박이 점차 심해지면서 이민자 수는 점차 감소해 6월에 92명, 7월에 109명이 하와이에 도착하는데 그쳤다. 이것이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의 마지막 행렬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 이민의 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