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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기 한인사회: 한인단체와 신문

하와이 한인 이민사

by Blue Bird


일부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은 더 나은 환경과 임금을 위해 중국인, 일본인들과 같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인 이민자 대다수는 하와이에 남았다. 1903년에서 1915년 사이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본토로 떠난 하와이 한인은 1,087명이었다. 1903년에서 1910년 사이 한국으로 돌아간 한인은 이보다 조금 많은 1,250명이었다. 초기 이민 행렬로 7천여 명이 하와이에 도착했으니 나머지 5천 명은 하와이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중국인 이민자의 50%, 일본인 이민자의 54%가 각각 제 나라로 돌아간 것과 비교할 때 고국으로 돌아간 한인 이민자의 비율은 매우 낮은 편이다. 이는 당시 조국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1910년에는 결국 일본에 합방된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한인 이민자들은 그러나 다른 어느 민족들보다 사탕수수 농장을 빠르게 떠났다. 전체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906년에 9%에 약간 못 미쳐 중국 이민자 수와 비슷했었다. 1907년에는 6%, 1909년에는 5%, 1910년에는 4%로 급격히 감소했다. 이들은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농장을 떠나 호놀룰루와 힐로를 비롯한 도시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한국에서 대부분 도시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일보다는 도시지역에서 사는 것이 이들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한인 이민자들의 하와이 적응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초기 이민자 7천여 명 가운데 다수를 구성하는 미혼의 젊은 남자들은 술과 노름을 하고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인들은 한인사회의 질서유지가 필요함을 느끼고 자체적으로 동회를 조직하고 단속에 나섰다.


한인단체와 신문


하와이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정치적인 한인단체는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1903년 8월 7일 호놀룰루에서 감리교도를 주축으로 탄생됐다. 1904년 대실러 은행 직원이 이민법을 위반하며 이민자에게 빌려주었던 선박료를 받으러 하와이에 왔을 때 신민회 내에서는 값아야 한다와 갚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기도 하는 등 끊임없는 내분을 겪기도 했다. 일본에 억압받는 대한제국의 상황을 우려하며 신민회 지도부가 안창호와 윤치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고 반대파가 이를 반역이라고 반기를 들면서 1904년 봄 신민회가 와해됐다. 1903년부터 1910년 사이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신민회 와해 이후 성공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갈라져 나온 친목회 (1907년 천흥협회로 개명)를 비롯, 실지회, 장강회, 부흥회, 국민 공동회, 신간회, 와이파후공동회, 의성회, 공진회 등 20여 개의 상호 이익과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1907년 9월 대부분의 한인단체들은 호놀룰루에 모여 단체들을 연합해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했다. 1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한인합성협회는 1907년 10월 22일부터 1909년 1월 25일까지 합성 회보(합성 신문, 합성 신보)를 발행했다.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2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안창호가 하와이 이민 초기에 본토로 떠났던 한인들을 중심으로 설립한 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와 통합, 대한인국민회를 탄생시켰다. 통합행사가 열린 2월 1일 1천여 명의 한인들이 호놀룰루에 모였다. 이날 모든 농장은 농장일을 하루 쉬게 해 주었고 하와이 정부에서도 축하하며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국민회는 하와이 한인들의 준 국가기관 역할을 했다. 입회비와 연회비로 모은 돈을 독립운동과 교육, 상조에 사용하고 일본인과 구분하기 위해 한인 신분증을 발급하기도 했다.

1913년 한인 여성들은 기존에 있던 단체들을 연합해 대한부인회를 조직했다. 독립운동 지원과 기독교 전도가 주목적이었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에는 대한부인구제회를 설립하고 김치와 대구무침을 만들어 파는 등 적극적인 기금모집을 해 한국의 삼일운동 가족을 지원하고 독립자금도 보냈다. 1928년에는 영남부인회(영남부인실업동맹회)가 조직되어 한인 상권 발전과 장학금 지금을 하였는데 이것이 1940년 한인상의로 발전했다.

하와이에서 가장 먼저 발행된 신문은 1903년 4월에 발간된 신조신문(1905년 5월까지 발행)이었다. 손으로 써서 등사판으로 찍는 형태로 한글로 발간된 신조신문은 하와이 한인의 지식계발과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했다. 1904년 11월에는 감리교에서 포와한인교보가 발간됐다. 포와한인교보는 1914년 제호를 한인교회보로 변경하고 1945년까지 발행했다. 그 밖에도 한인시사, 친목회보, 합성신보, 신한국보, 국민보, 태평양잡지, 태평양시사, 한인기독교보, 한미보, 힐로시사, 단산신보, 태평양주보 등이 발간되었다. 대부분의 신문은 교회나 단체의 필요에 의해 1년 내 외의 짧은 기간 동안 발행됐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 발간된 신문은 국민회와 동지회가 발간한 신문이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12일부터 1913년 7월까지 신한국보 (United Korean Weekly)를 발행했고, 1913년 8월 1일부터는 국민보 (Korean National Herald)로 이름을 바꾸어 1968년 12월까지 발행했다. 동지회는 태평양주보(The Korean Pacific Weekly) 를 발행했다. 태평양주보는 이승만이 국민회와는 별개로 1913년 9월부터 발간하던 태평양잡지를 1930년 제호를 태평양주보로 변경하고 1970년까지 2월까지 발행했다. 국민보와 태평양주보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1941년 하와이에서 외국어신문 발행금지 조치에 따라 일시 정간했다가 1942년 1월부터 국민보-태평양주보로 통합발행하였고, 1944년 2월부터는 다시 별도로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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