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하와이 한인들의 종교활동에는 존 워드맨 (John W. Wadman) 감리사의 역할이 컸다. 워드맨 감리사는 한인들이 거주하는 농장의 매니저뿐만이 아니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 (HSPA)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기부를 받아 선교활동을 확대해갔다. 농장주들은 한인들이 도시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인 캠프에 교회 건축과 선교사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많던 에바 농장에서는 한인들이 300달러를 모금해 농장 측에 한인교회를 건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농장 매니저는 이에 감동해 750달러를 기부해 교회건물을 세우고 한인들이 모금한 돈으로 가구를 들였다. 에바 교회는 1905년 4월 30일 세워졌다.
워드맨 감리사는 하와이에 파견되어 온 1904년부터 1905년 떠나기 전까지 7개의 채플을 건설하고 한인 교인수를 늘려갔다. 워드맨 감리사 전임자인 조지 피어슨 감리사는 1903년에 호놀룰루에 한인 감리교를 조직하고 홍승하를 설교자로 지정했다. 1905년에는 워드맨 감리사의 통역으로 한국에서 온 민찬호가 첫 공식적인 목사로 선임됐다. 처음에는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1906년에는 펀치볼 스트릿 (퀸스 병원 근처)에 교회 건물을 세웠다. '코리안 컴파운드’로 불린 이곳에는 교회와 기숙학교, 커뮤니티센터가 들어섰다. 교인 23명, 주일학교 학생이 35명, 교사가 6명이었다. 1922년 포트 스트릿 (Fort Street)으로 이전하였다가 1948년 케에아우모쿠 (Keeaumoku) 스트릿으로 옮겼으며, 1950년 2월 이곳에 새 교회건물을 건설했다. 1952년에는 이중언어 목회가 가능한 이동진 목사가 부임했다.
1918년 12월에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교인들이 감리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한인기독교회 (Korean Christian Church)를 세웠다. 한인기독교회는 교파와 무관한 민족주의 성격의 교회로 독립운동 지원과 자녀교육에 치중했다. 한인기독교회는 릴리하 스트릿 Liliha Street)에 부지를 구입하고 1938년에 교회당을 세웠다. 첫 목사로 민찬호가 부임했다. 1918년과 1919년에는 와히아와(Wahiawa)와 힐로(Hilo)에도 교회를 세웠고, 1929년에는 한인양로원 (Korean Care Home)을 설립했다. 한인양로원은 처음에는 한인 남자 노인을 돌보기 위해서 설립됐으나 1931년부터 한인기독교회가 운영을 맡기 시작했고, 1972년부터는 여성과 타민족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한편 한인 종교활동의 다수를 차지하는 감리교와 급진적인 성향의 신민회에 반대하던 한인들은 성공회 핸리 레스타릭 (Henry Restarick) 주교의 도움으로 성 누가 (St. Luke) 교회에서(1905년 설립) 별도의 한인 예배모임을 갖고 천흥협회를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했다.
1940년 한인들의 종교 분포는 감리교 1천여 명, 한인 기독교 1천여 명, 성공회 200여 명, 제7일 성도교 200여 명, 천주교 100~300명, 불교 3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들의 높은 기독교인 비율은 타민족보다 빨리 미국 문화 적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남녀의 활동이 분리된 사회에서 이민 왔으나 기독교를 통해 남녀평등의 개념에 익숙해져 갔다. 또한 교회를 통해 영어를 배우고 2세들을 교육하면서 후에 도시에서의 직업적 성공과 자녀들의 교육에 큰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