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1905년 5천 명에 이르던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노동자들은 1909년에는 1천7백여 명만이 농장에 남았다. 한인 노동자들은 1909년과 1920년 일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때 대체인력으로 자원해 두배 또는 세배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등 일시적으로 농장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노동쟁의가 끝나고 원래대로 임금이 내려가자 더 나은 생활조건을 찾아 도시로 향했다. 사탕수수 농장을 떠난 한인들은 커피 농장, 담배 농장, 마카다미아 넛 농장 등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수의 한인들이 모인 곳은 파인애플 농장이었다. 파인애플 농장은 사탕수수 농장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위치적으로도 호놀룰루와 가까웠다. 이에 따라 파인애플 산업의 중심지인 와히아와에는 새로운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있었다. 게다가 1909년 스코필드 군기지가 들어서는 등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가 활기를 띠었다.
한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호놀룰루에 파인애플 캐너리(공장)가 생기고 농장보다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자 호놀룰루로 진출했다. 1915년 297명의 한인 남성과 106명의 여성이 파인애플 캐너리에서 일했다. 1930년대 말에는 7백여 명의 한인들이 파인애플 농장과 캐너리에서 일하며 호놀룰루에서 집값이 저렴한 릴리하와 팔라마 지역에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한인들은 또한 손재주가 뛰어나 옷, 신발, 가구를 수선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세탁업, 목수, 꽃 재배, 그로서리 스토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일부 한인들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하기도 했다. 1910년까지 호놀룰루로 이주한 한인은 전체 한인의 10%에 불과했으나, 1920년에는 27%, 1930년에는 40%로 증가했다. 호놀룰루 카운티로 확대하면 전체 한인의 2/3가 거주하고 있었다. 191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하와이 한인은 4,533명으로 하와이 전체 인구의 2.4% 였다. 남자는 3,931명, 여자는 602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 출생자가 4,172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