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을사조약에 이어 한일합방으로 조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자 하와이 한인들의 반일감정도 높아졌다. 1913년 이래 하와이 한인들의 반일운동은 온건파인 동지회와 과격파인 국민회로 나누어졌다. 온건파는 외교적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이승만을 주축으로 했고, 과격파는 군대 양성과 테러활동 등 무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박용만을 중심으로 모였다. 포츠머스 러일 강화 회의를 앞둔 1905년 8월 미국 본토에서 학생 신분이던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대표로 간 윤병구 목사와 함께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주권 보장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국민회의 중심인물은 박용만이다. 미국 본토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 박용만은 1911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하다 1913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를 국민보로 변경하고 주필로 활동하며 군대 양성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박용만은 1913년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 경찰권을 승인받아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하고 한인 자치제를 만들었다. 1914년에는 오아후 카할루우지역 아후이마누에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기도 했다. 이곳은 국민회의 지휘부중 한 명인 안원규가 파인애플 재배를 위해 계약한 1,500 에이커에 이르는 땅이다. 그 수익으로 한인 젊은이들의 군사교육과 311명의 학생과 직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를 짓기도 했다.
이승만은 1921년 민찬호, 안현경 등과 함께 동지회를 설립하고 하와이를 중심으로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승만은 1919년부터 1925년까지는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을 하기도 했다. 1925년 3월 임시정부 재정지원을 위해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팔아 조성된 자본으로 힐로 남쪽 올라아(Olaa) 지역에 930 에이커의 임야를 구입했다. 여기서 사탕수수에서 일을 못하게 된 고령의 한인 40여 명을 고용해 목재소와 가구제작, 숯 공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1931년 문을 닫았다. 박용만과 이승만은 옥중 동지로 박용만이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으나 이승만이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박용만에 반대하면서 결별하게 됐다. 그러나 국민회와 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하와이 한인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