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1930년대에는 유아기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온 1.5세와 사진신부 이민 (1910-1925) 이후 하와이에서 태어난 2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한인들을 위해 처음 설립된 학교는 1906년 감리교단과 존 워드맨 목사가 호놀룰루 코리안 컴파운드 (Korean Compound)에 만든 것이었다. 워드맨 목사의 부인이 교장을 맡고, 5명의 미국인 교사와 2명의 한인 교사가 8학년까지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신발공장과 파인애플 캐너리,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 등에서 일하며 공부했다.
하와이 공립학교에 등록한 한인 학생들은 뛰어난 학업성적을 보였다. 한인 학생들의 학습능력은 북유럽계 학생에 이어 2번째로 좋은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고, 12학년까지의 진학률도 백인에 이어 2번째로 높았다. 1908년 농과대학으로 설립된 하와이대학이 1920년 종합대학이 되었는데, 1920년 하와이대학에 재학한 학생이 10명이 채 안되었으나 1930년에는 20여 명으로 늘었다. 1934년에는 한인 여학생 단체 보성회가, 1938년에는 한인 남학생 단체 백용회가 조직되었다. 하와이대학 졸업생으로 구성된 한인 동창회 무궁화클럽도 있었다.
하와이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한인 2세들은 이민 1세와 언어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달랐다. 한인 1세들은 한국어와 서툰 영어를 사용했으며 1.5세와 2세들은 한국어가 서툴렀다. 한인 1세들은 집에서 항상 또는 거의 대부분 한국어를 사용하고 자녀들이 한국어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말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태어난 2세들은 대부분 아주 기본적으로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자기 자신의 의사를 한국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개인주의와 평등의 개념을 배우고 영어를 사용하는 2세들은 나이와 성별, 서열에 따라 상하관계가 형성되어있는 한국어의 말하는 방식과 유교적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영어가 서툰 한인 1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가 어려웠다.
미국 본토에서는 아시안에 대한 차별이 적지 않았으나 하와이에서는 차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다 해도 백인들의 아시안에 비해 우월한 지위는 사탕수수 농장 시절부터 이어져내려 왔다. 백인들은 농장주와 자본가였고 한인을 비롯한 아시안은 노동자였다. 하와이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능력 있는 한인 2세들도 미국 정부와 군부대, 사설기업에 백인들에 비해 취업하기가 어려웠고 높은 직위로 올라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백인들은 한인을 아시안으로 생각할 뿐 한인, 중국인, 일본인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한인 1세들은 일본인보다는 중국인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한인 1세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매우 강했다. 그러나 하와이에서 태어난 2세들은 타민족을 모두 같은 미국 시민으로 대했다. 2세들은 미국이 내 나라이고 한국과 일본이 외국이었다.
이민 초기 한인 1세들의 이혼과 타민족과의 결혼은 일본이나 중국인들에 비해 높았다. 초기 타민족과의 결혼은 남성들이 주도했다. 사진신부가 오기 이전 한인 남자가 4천 명, 여자가 6백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혼할 한인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1920년 이후에는 타민족과 결혼하는 여성도 증가했다. 연령차이가 많이 나는 사진신부들이 남편과의 이혼을 원하는 경우도 있었고, 한국과는 달리 여성의 재혼이 어렵지도 않았다. 1920-1924년 사이 타민족과 결혼한 한인은 남자 150명, 여자 21명이었다. 1924-1928년 사이에는 남자 169명, 여자 71명이 타민족과 결혼했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10년간 타만족과 결혼한 한인은 남자가 전체의 18% 여자는 5%였다. 한인남성이 한인 여성보다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
한인 2세들은 타민족과의 결혼에 거부감이 없었다. 부모세대는 2세들이 한인과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2세들은 자신의 결혼은 자신이 결정하고자 했다. 1930년 한인남성 네 명 중 한 명이 타민족과 결혼했으며, 한인 여성 5명 중 2명이 타민족과 결혼했다. 1940년에는 한인남성 2명 중 1명이, 한인 여성 2/3가 타민족과 결혼했다. 한인 2세들의 타민족과의 결혼은 스스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2세들의 성향뿐 아니라 한인 여성의 수가 많이 부족했던 영향이 컸다. 1930년 15세-45세 사이 한인 남녀 비율이 162대 100이었고, 1940년에는 137대 100이었다. 1940년 한인 인구의 2/3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2세였다.
부모세대는 자녀가 일본계나 백인과 결혼하는 것에 적극 반대했다. 백인은 인종이 전혀 다를 뿐 아니라 결혼 연령기 백인의 상당수가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어서 이들이 다른 지역에 배치되면 신부를 버리고 가거나 또는 완전히 데려가버리는 것을 우려했다. 한인 1세들이 백인보다 더 싫어한 것은 일본계와의 결혼이었다. 일본계와 결혼하려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집안내 갈등뿐 아니라 한인 커뮤니티의 비판도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