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1895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통해 제국주의의 야심을 키워가던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선전포고 없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은 즉시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령 하와이는 계엄에 들어갔다. 미국 정부는 독일인, 이태리인과 함께 일본인을 적국인 (Enemy Alien)으로 지정했다. 하와이 한인들도 일본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 적국인으로 분류됐다.
1920년 이래 지지부진하던 독립운동이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다시 살아났다. 하와이에서 반목하던 국민회와 동지회를 비롯한 모든 한인단체는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UKC; United Korean Committee)를 결성했다. 국민회와 동지회는 1942년 1월부터 국민보-태평양 주보를 함께 발행하며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의사부를 호놀룰루에, 집행부를 로스앤젤레스에 두고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로 이승만을 파견했다. 상해 임시정부와 워싱턴 외교위원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하와이 한인들은 전쟁 채권을 팔고 펀드레이징을 통해 1943년 2만 6천여 달러를 루스벨트 대통령에 보내기도 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계엄사령부가 한인들이 일본인과는 다름을 인지하고 일본인에 대해 제한하고 있는 많은 조치에서 제외시켜주었으나 적국인 분류에서는 제외시켜주지 않자 끊임없이 제외 조치를 요구했다. 한국이 비록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1940년 외국인등록법(Alien Registration Act)의 통과로 미국 본토의 한인들은 적국인으로 분류되지 않았고, 사법부도 한인을 적국인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한인들은 1940년 인구센서스에서 처음으로 '한인'으로 분류되어 일본인과 다른 카테고리에 속했음에도 계엄하의 주지사는 반응이 없었다. 1943년 호놀룰루의 양대 신문인 호놀룰루스타뷰리튼 (Honolulu Star-Bulletin)과 호놀룰루 애드버 타이저 (Honolulu Advertiser) 도 영자판 한인신문 코리안 내셔널 해럴드-퍼시픽 위클리 (Korean National Herald-Pacific Weekly) 사설을 인용해 한인의 적국인 분류가 불공정하니 중지해야 한다고 지적했으나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1943년 동지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한인이 계엄 통금시간을 위반해 경찰에 체포되자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임시정부의 주미대사관 역할을 하던 외교위원부를 맡고 있었던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 국무장관, 하와이 대표 연방 의원 등에게 한인의 적국인 분류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이들 기관은 한결같이 군사적 필요의 따른 '내부적 보안’을 이유로 들며 거절했다. 결국 1943년 12월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하는 카이로선언과 함께 하와이에서도 계엄 정부의 명령으로 한인들에 대한 적국인 분류가 해제되었고, 1944년에는 적국인 분류가 완전히 없어지고 계엄령이 해제됐다.
1944년 이승만의 동지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다시 떨어져 나와 태평양 주보를 발간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동지회는 상해 임시정부와 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에 있던 이승만을 지지했으며, 이승만은 일본 패망 후 독립된 한국에서의 역할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54년에는 자신이 하와이에 설립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자금을 한국으로 보내 인하대학을 설립하는데 보태기도 했다. 동지회는 1949년 호놀룰루 총영사관 건물을 구입해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