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사
한국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을 되찾았다. 그러나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12월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소련, 영국은 한국에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는 결정을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의 우익과 좌익세력은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좌익은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섰다. 우익과 좌익으로 극렬히 대립하는 가운데 1948년 7월 남한 단독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같은 해 9월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949년 미군이 유엔총회 결의로 군사고문만 남고 철수했다. 1950년 6월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믿고 전쟁을 일으켰다.
한편 해방이 되자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국민회와 동지회 인물들이 속속 귀국했다. 그러나 해방된 고국으로의 귀국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인들의 대다수는 하와이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하와이에 이미 뿌리내린 생활기반을 포기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하와이에서 태어나서 자란 2세들에게 한국은 생소한 외국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모든 하와이 한인들이 기쁘게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특히 오래전부터 이승만을 비판해온 국민회 계열의 한인들은 더욱 냉소적이었다. 한국에서 좌파와 이념갈등을 겪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이나 해외에 상관없이 자신에 반대하는 자들을 공산주의라고 몰아붙였다. 1952년 12월 미 이민법 개정으로 한인 이민 1세들도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고, 고국방문을 위해 비자를 신청했다. 그러나 국민회 관련 인사들 가운데에는 일부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비자발급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하와이 한인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국민회와 동지회를 대변하며 여론을 이끌던 두 신문, 국민보와 태평양주보의 구독자가 계속 감소했다. 1968년 결국 국민보가 발행을 중단했고 태평양주보도 1970년 정간했다. 1970년대 초반 국민회와 동지회 회원들은 각각 100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한인들은 정치적 문제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의제가 관심사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70년 하와이에는 한국어 신문이 없었다. 한국소식과 미국 소식은 1969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발행된 미주 한국일보에 의해 접할 수 있었다.
한인들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했다. 미군부대의 하와이 주둔으로 일부 한인 1세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세탁소와 수선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고, 사진신부들이 주축이 된 한인 여성들은 호놀룰루에서 부동산 투자와 식료품점 등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한인 1세들과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와 함께 온 1.5세 자녀들은 동양인도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1952년이 되어서야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미군으로 복무하면 시민권을 주는 제도를 통해 일부 한인 1.5세들이 시민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한인 2세들은 한국보다는 하와이 정치에 관심이 있었는데, 한인으로서는 1954년에 최초로 하와이 영토 하원의원으로 필립 민 (Philip P. Minn) 이 당선됐고, 1958년 로버트 원배 장이 역시 하와이 영토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와이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한인 2세들은 전문직으로 많이 진출했다. 한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많이 종사한 직종으로는 건축, 화학, 치과, 소셜워크, 부동산, 항공기계, 종교직, 법조계, 약사, 보험, 재단사, 디자인, 도시계획, 의사, 경찰 등이 있다. 하와이 한인 2세들의 타민족과의 결혼 비율은 매우 높았다. 1963년 조사에서 한인남성의 타민족과의 결혼은 71%로 전체 민족 중 하와이안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했으며, 한인 여성은 77%로 역시 하와이안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했다. 1960년대 한인 남녀 비율은 106대 100으로 한인 여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1세들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한인 3세들 가운데 부모가 모두 한인인 아이들의 수가 다른 민족에 비해 적었다. 1956년부터 1960년 사이 태어난 한인계 아이들 가운데 부모가 모두 한인인 경우는 27%에 불과했다.
한인 이민 50주년을 맞은 1953년, 첫 이민선으로 온 102명 가운데 9명이 생존했다. 1970년, 사탕수수 이민 한인 1세대는 대부분 사망했다. 사진신부들은 할머니가 됐다. 한인 인구의 90%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2세와 3세, 4세들이었다. 9천여 명의 한인 인구 중 2/3는 호놀룰루에 거주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백인을 포함한 전체 민족 가운데 소득이 가장 높았다. 한인들은 어느 민족보다 빨리 미국 사회에 동화되며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