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945-1968년: 풍요의 이면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의 패권이 쇠퇴했다. 전 세계에 전략적, 기업적 이해 관례를 가진 미국이 소련과 직면하게 되었다. 소련은 독일의 위협에 대비해 폴란드와 동독에 우호적인 체제를 만들었다. 서유럽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공산당이 위협적이 되었다. 스탈린이 서양 제국주의를 맹렬히 비난하자 처칠은 소련이 유럽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을 쳤다며 이에 항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이 국제연합에서 원자력 사용을 제한하자고 주장하자 소련은 미국의 원자력 패권을 영속화하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2차 대전 중 연합국이 합동으로 통제하던 이란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소련이 1946년 철수했다. 1947년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을 원조하는 마셜 프랜을 발표했다. 유럽 재건과 공산주의의 활동을 막는 마셜플랜은 원조품을 생산하는 미국 기업에 큰 이득을 주었다. 또한 유럽이 다국적 협력을 하게 됨으로써 유럽연합(Europen Union)의 토대를 마련했다. Foreign Affairs에 실린 외교관 조지 캐넌의 <소비에트 행동의 원천>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근간이 되었다. 캐넌은 소련이 소련 주변부의 약한 지점을 찾고 있으므로 이를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서독 정부를 승인하려 하자 소련은 베를린과 연결된 육상 접근로를 차단했다. 1949년 소련이 봉쇄를 풀었고 미국의 후원으로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이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편입되었다. 소련은 공산당이 통치하는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을 수립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미국이 지원하는 장제스를 꺾었고, 중소 동맹이 결성됐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을 실험하자 트루먼은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을 승인했다.
충돌은 유럽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했다. 1950년 6월 소련의 승인을 얻은 북한이 38선 아래로 침략했다.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는 소련이 타이완 문제로 틈을 비운 사이 군사적 대응을 승인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펼쳐 북한군을 밀어내고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까지 올라가자 중국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트루먼은 중국 공산주의 체제 전복을 원하는 맥아더를 해고했다. 한국전쟁으로 3만 6천 명의 미군, 3천 명의 국제연합군이 사망했다. 한국인과 중국군의 사망자는 훨씬 더 많았다.
아이젠하워는 아시아와 중동에서 반공산주의 군사동맹을 조직해 1953년이란, 1954년 과테말라에서 좌파 정권이 전복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진압한 소련에 대응하지 않았으며, 팔레스타인과 아랍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국가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1958년 여러 나라에서 핵무기 반대를 주장하는 운동이 확산되자 미국과 소련은 일시적으로 대기권 핵실험을 중단했다. 1959년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친미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타도하고 소련과 동맹을 체결했다. 1960년 존 F. 케네디가 가톨릭교도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카스트로를 끌어내는 피그만 침공 사건을 펼쳤으나 실패했다. 소련은 쿠바에 미국 동부를 표적으로 한 미사일을 배치했다. 소련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서약을 받고 미사일을 철수했다. 미국에서 반핵운동이 거세지면서 미국과 소련은 대기권과 외기권에서 핵실험을 중단했다.
미국 내에서는 소비재가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1950년 도입된 신용카드가 경기 호황을 촉진했다. 미국인은 유복한 삶을 살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로 보였다. 전후 베이비붐이 경기를 부양했다. 디즈니랜드가 1955년 문을 열었고, 주간 고속도로, 모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가 여행을 쉽게 했다. 교회 신도수가 급증했고, 충성서약에 'Under God'가 화폐에 '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그러나 흑백의 뚜렷한 소득격차와 늘어나는 라틴 아메리카 이민자의 삶은 호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냉전의 불안은 적색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스파이가 검거되면서 서로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 1950년 미시간주의 공화당 연방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국무부에 침투한 수백 명의 공산주의를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론이 바뀌며 약자를 괴롭히는 매카시즘은 급격히 몰락했다. 1950년대는 인종분리정책에 대한 비판도 거세게 일어났다. 1948년 트루먼은 군대 내 인종분리를 끝냈고, 1954년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는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1955년 앨라베마 주에서 로사 파크가 버스 뒷좌석으로 가라는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했고, 1956년 대법원은 앨라배마주 인종분리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젊은 침례교 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로 부상했다.
케네디가 저격으로 사망하자 대통령이 된 존슨은 여러 가지 개혁을 완수했다. 직업훈련, 유아교육, 국내 자원봉사, 반빈곤 프로그램이 나왔다. 의회는 공공사업, 시골 보건소 설립, 도시 대중교통 개선, 공교육 기금 확대 법안을 통과시켰다. 1965년 이민법은 국가 차별적 할당제도에 종지부를 찍었다. 획기적인 의료보험법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가 시작됐다. 황무지 보존, 공기와 수질오염 개선, 고속도로 미화 등의 환경보호법안도 진전을 이루었다.
한편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북쪽은 공산주의 정부가 남쪽은 서구가 지원하는 정부로 쪼개져 있었다. 1954년 프랑스가 철수한 이후 미국은 베트남을 돕기 위해 군사고문을 파견했다. 1963년에는 이들의 수가 1만 6천 명에 이르렀다. 존슨은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주변 국가도 무너진다는 아이젠하워의 도미노 이론을 수용했다. 1967년까지 미국의 베트남 파병군이 48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베트콩의 저항은 강력했다. 미국 내에서는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반전운동이 확산됐다. 정치적, 인종적 소요와 함께 문화적 반발도 일어났다. 록음악, 마리화나, 장발, 프리섹스가 번졌다. 1964년 영국에서 온 비틀스에 미국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미국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전쟁 당사국의 시각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두 전쟁 모두 남과 북에 이념을 달리하는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통일을 위한 내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대립으로 인한 대리전이 되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일어난 한국전쟁은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의 도발로 시작되었으며, 미국과 UN군이 개입하게 됐고 결국 38선을 경계로 휴전하며 현재까지도 끝내지 못한 전쟁이 되었다. 미국은 이후 한국의 경제를 지원했고 한국은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반면 북한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경제발전이 뒤처졌으며 비공식적 핵보유국으로 등장했다.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휴전된 한반도는 여전히 남과 북이 상반된 이념을 가지고 상대를 경계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남과 북으로서는 통일을 원하지만 주변 강대국은 한반도 통일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는 듯하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베트남 전쟁은 독립을 원하는 북베트남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반공정권의 전쟁이다.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이 북베트남을 지원했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남베트남을 지원하며 냉전시대의 뜨거운 대리전이 되었다.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이 퍼지면서 미국은 1973년 파리 평화협정으로 베트남전 개입을 중지한다고 밝혔다. 1975년 미군이 떠나자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전쟁이 끝났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군은 5만 8천 명이 사망했고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장애를 가진 사람이 83만 명에 이르렀다. 반전운동의 여파로 모병제를 도입, 군인을 직업화시켰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동남아 인들은 14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보트피플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보트피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은 총 32만 명의 군인을 베트남에 파병했고, 5천여 명이 전사했다. 한국은 파병을 대가로 미국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으며 베트남 전쟁 후 GNP가 5배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