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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오레곤 여행 8

2020년에 돌아보는 2008년 여행

by Blue Bird

캐논 비치에서 아침 일찍 떠나려고 했는데 11시가 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소피가 마지막으로 선물을 사야 한다며 상점을 기웃거렸다. 이걸 막으면 또 분위기 안 좋아진다.

"그래, 사라, 여기서 다 사면 더 이상 선물 사려고 시간 낭비하진 않겠지...." 이런 생각으로.

하지만 상점 앞 오픈 시간이 일제히 오전 10시, 30분쯤 남았다. 거리를 어슬렁 거리다가, 비치에 갔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10시쯤 상점 있는 쪽으로 오니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한다. 소피가 선물을 몇 가지 사는 동안 가게를 기웃거리던 나도 예쁘장한 소라, 조개를 십여 개 골랐다. 크기에 따라 하나에 1, 2, 3, 5, 10, 20달러... 불가사리도 있다. 음~ 바다에 있는 조개를 주워다 돈 받고 파는구나. 자연을 파는구나.

캐논 비치를 떠나 101번 도로를 타고 계속 남쪽으로 간다. 오른쪽은 끝없는 바다, 왼쪽은 산. 도시가 잇달아 나타났다 사라졌다. 도시가 나오면 주유소, 상점, 음식점이 함께 나타났다가 도시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

그렇게 가다가 타일러묵 (Tillamook) 이란 곳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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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같은 것이 있는데 얼핏보니 치즈공장 같다. 조금 더 가다가 어제 먹은 요거트가 타일러묵 요거트란 생각이 난다. 그래, 그럼 여기가 그 요거트와 치즈를 만드는 공장인가 보다. 얼른 관광책자를 찾아보니 맞다. 견학할 수도 있다. 차를 공장 쪽으로 돌렸다. 공장 안을 구경할 수 있도록 코스를 만들어놨다. 아래서는 치즈가 자동시스템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구경하는 관광객이 신경 쓰이는 듯 가끔씩 위를 쳐다보기는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듯. 잘못된 치즈를 벗기고, 자르고, 무게를 재고, 우유를 붓고... 줄을 서서 여기서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 하나 사들고 보니 또 다른 줄이 길게 서있다. 치즈 시식코너다. 줄이 너무 길어 그냥 건너뛰고 옆으로 가니 푸트코트가 있다. 그래, 점심은 여기서 해결하자.


옆에 아이 셋과 젊은 백인 부부가 있어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아이다호에서 왔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아이 하나가 우리 생긴 게 신기한 듯 눈을 빤히 대고 쳐다본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으면 살짝 웃으면 눈을 피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 다시 쳐다본다. 동양사람을 처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실컷 봐라. 나도 어릴 때 한국에서 미국 사람 실컷 구경했다. 미국에서는 한국사람이 구경거리, 한국에서는 미국 사람이 구경거리가 된다.


다시 길을 떠난다. 링컨시티를 지나 뉴포트 비치까지 갔는데 벌써 5시가 돼간다. 계획은 오레곤 해안을 따라 남서부 끝까지, 가능하다면 캘리포니아 북부까지 가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오늘 숙소는 오레곤 남쪽 지방에서 자려는 계획이었는데... 호놀룰루로 돌아오기 전 이틀을 할리데이인 익스프레스 포틀랜드 공항으로 예약했다가 오늘 아침 하루는 취소했다. 마지막 이틀 중에서 하루는 남쪽, 유진이나 살렘보다 더 아래쪽에서 자고, 다음날 올라와서 하루만 할리데이인에서 자도 될 것 같아서. 하지만 그것도 무리다. 그만 가자. 이제 서쪽으로, 내륙으로, 살렘이나 포틀랜드 쪽으로 접근해야 한다. 뉴포트에서 방향을 다시 잡았다. 그래도 살렘 정도는 들러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GPS에게 최단거리를 물어보니 한 시간 전쯤에 지나왔던 링컨시티에서 빠지는 18번 도로를 알려준다.


18번 도로로 빠지기 전, 뉴포트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적당한 곳을 찾다가 도서관에 들렀다. 소피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도서관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깔끔한 2층 건물이다. 잘 정돈된 책, 몇몇 학생들이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소파에는 50대의 뚱뚱한 남자가 책을 무릎에 얹은 채로 쿨~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층계참에는 창을 통해 한줄기 따스한 햇살이 들어온다. 아이들 세명이 그림책을 보고 있다. 또 다른 아이는 엄마와 장난감 기차놀이에 열심이다. 평화로운 오후 5시. 오레곤 링컨시티, 공공도서관. 어떤 인연일까? 멀리 하와이에 사는 내가 지금 오레곤 뉴포트의 한 조그만 공립도서관에 들어와 이 평화로운 오후 한 때를 구경하고 있는 것. 아무 특별한 것도 없는 공공 도서관이지만 평일 오후 풍경이 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고 있다. 이렇게 각인된 모습은 잘 잊히지 않는다. 나중에 세월이 오래 지나 거기가 어디였더라.. 전체적인 기억은 잘 안나도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보던 아이들, 졸고 있던 뚱뚱한 한 남자의 모습은 기억날 것 같다.


다시 링컨시티로 방향을 잡고, 살렘 쪽으로 빠지는 길을 찾는다. 옆에 있던 소피가 조용하다. 졸고 있다. 눈은 선글라스로 가려 안 보이지만. 숨소리가 다르다. 그냥 둔다. 나도 졸리다. 하지만 내가 운전을 해야 가지. 18번 도로로 막 들어설 무렵 소피가 깨어났다. 그러고도 1시간 넘게 달렸다. 앞 나무, 뒤 나무, 좌 나무, 우 나무... 졸리고 허리 아프고, 그래서 중간에 쉴 곳을 찾으면서 간다. RV 야영장이 나온다. 내려서 잠시 허리를 펴고, 어깨를 돌리고, 그렇게 몸을 풀고 다시 출발한다. 조금 더 가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큰 건물이 나타났다. 주차장에는 차들도 몇백대 있다. 여기가 어디지?


스피어릿 마운틴 카지노(Spirit Mountain Casino)다. 이 카지노는 이 지역 인디언 종족의 주택과 교육, 문화 보존 비용을 벌기 위해 건설됐다고 쓰여있다. 카지노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것인데, 취지처럼 관광객으로부터 벌어서 지역 경제를 잘 살리고 있는지, 혹시 인디언 주민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거나,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카지노는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득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조금만 가지고 잠시 즐긴다는 생각으로 노는 것은 좋지만, 쓸 돈을 다 썼을 때는 깨끗이 손 털고 일어나야 한다. 자제력이 필요하다. 카지노에서 따려고 하거나, 잃은 돈 복구하려고 하면 곤란하다는 생각. 어쨌든 카지노를 가본 적이 없어 호기심이 있었는데, 가는 길에 이렇게 들를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래 오늘 카지노 구경 좀 하고 가자.


카지노는 처음이다. 무언가를 경험해본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못한다는 것과 매우 큰 차이가 있다.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면 그 윤곽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험해보지 않으면 간접경험이나 상상에 맡겨야 하는데, 그 간접경험이나 상상은 실제와 만나면 순식간에 깨진다. 그래서 직접 경험이 중요하다. 내가 여행을 무지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도 이 직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를 직접 가보지 않고서도 샌프란시스코에 대한 이미지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직접 가본 샌프란시스코와는 다르다. 뉴욕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대도시들이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스타벅스, 맥도널드, 세이프웨이, 코스코 같은 체인은 어디에 있든 상점들의 구조가 비슷하다. 우체국, 도서관, 병원, 은행 같은 편의시설도 그렇다. 그러나 도시마다 그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자세히 관찰하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도 다르다. 이런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내가 살아왔던 환경에 비추어보면, 내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생각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여행의 참맛 아닐까. 닫힌 생각을 열고, 굳어버린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여행의 묘미 아닐까?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카지노를 들러본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들어가 본 카지노는 상당히 넓었다.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눈으로는 게임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코로는 담배냄새가 재빨리 들어왔다. 도박과 담배는 뗄 수 없는 건가. 한쪽을 보니 금연 게임 구역도 있었다. 들어올 때 보니 게임장 바로 옆 건물이 카지노 호텔이었다. 카지노 호텔은 게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까 좀 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프런트로 가서 오늘 룸이 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물어봤다. 예상이 맞았다. 방값은 100달러 정도, 방 있다. 세금 없다. 게다가 카지노에 가서 회원카드를 만들면 89달러에 할인된다고 한다. "오늘은 여기서 자자"

카지노에 가서 회원카드를 만들고, 다시 호텔로 와서 룸을 예약했다. 차를 호텔 가까운 곳에 대고 짐을 방으로 옮겼다. 아니 짐은 포터가 올려줘서 팁을 5달러 주니 좋아한다. 짐이 하나라 1달러만 줘도 되지만 1달러짜리가 없었고, 좋은 룸 싸게 들어왔으니 팁을 5달러쯤 줘도 좋을 듯. 룸은 상당히 넓었다. 특급호텔 수준. 만약 하와이였다면 1박에 300~ 400달러 수준이다.


이제 방을 잡았으니 저녁 먹고, 샤워하고 쉬다가 천천히 카지노에 가봐야지. 아래층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햇반, 김치, 김.. 우리의 식량이 남았고, 이제 하루만 더 자면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짐을 줄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객실 내에서 식사를 했다. 간편한 옷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동네 구경 나가듯 가볍게 카지노로 내려갔다. 하지만 카지노 기계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앉지를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 하지...

남들 하는 것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카드를 만들어준 프런트 직원에게 하는 방법을 물어봤다.

"You've asked the last person to ask"

그도 카지노를 할 줄 몰랐다. 카지노 직원이라 당연히 카지노를 잘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는 카지노를 못한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카지노를 자주 하면 여기서 일한 돈 전부 날리고도 모자랄 것이다. 카지노 기계를 손보는 다른 직원에게 물어봤다. 이렇게 저렇게 몇 마디 설명을 했고 대강 알았다. 하지만 각 기계마다 점수가 달랐고, 배팅하는 액수도 달랐다. 어떤 경우에 얼마를 따고 잃는지 자세히 알 수도 없었다. 어쨌든 하는 방법은 알았다. 소피에게 20달러 시드머니를 주고 나도 20달러로 시작했다. 20달러가 19달러, 18달러로 줄다가 14달러에서 다시 올라가 21달러, 22달러, 25달러까지 올라갔다. 큰 배팅 기계가 아니니 갑자기 크게 잃거나 따지는 않지만 버튼 한번 누르는데 15센트 또는 30센트가 왔다 갔다 하니 버튼 누르는 속도에 따라 돈이 줄었다 늘었다 한다. 그렇게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차츰 알게 되니 버튼 누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처음엔 탁.............. 탁,,,,,,,,,,,,,,,,탁,,,,,,,,,,,,,,,이런 속도로 누르던 버튼을 탁. 탁. 탁, 탁. 타다닥 탁탁... 이렇게. 나중에는 버튼에서 손도 안 뗀다. 제일 작은 배팅을 하던 소피가 20달러를 다 잃고 왔다. 나는 아직도 본전인데... 그렇게 두세 시간을 했다. 벌써 밤 12시가 넘고 있었다. 소피가 20달러, 내가 40달러를 털렸다. 처음에 100달러 정도 쓰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더 하려고 했는데 소피가 피곤하고 돈도 그만 쓰자고 해 그냥 나왔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최소한 몇천 불씩 왔다 갔다 해야 재미있을 것 같았다. 조금 올라갈 땐 "여행비 좀 벌어갈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60달러만 날렸다. 그러니까 결국 방값이 89달러 + 60달러 = 149달러인 셈이다.




최근에는 하와이에서 미 본토나 유럽 쪽으로 여행 갔다 올 때 가능하면 라스베이거스를 경유지로 넣는 경우가 많아졌다. 처음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 갔을 때 조금 딴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라스베이거스에 갈 때마다 꼭 카지노에 간다. 당연히 큰돈을 쓰지는 않는다. 뭔가 맞았을 때 들리는 요란한 소리와 기대감 그런 것들이 재미있다. 가끔 테이블 게임도 하기도 하지만 적은 돈을 가지고 테이블에 앉기는 좀 부담스럽다. 지금까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의 승률은 거의 반반인 것 같다. 잃은 돈과 딴 돈을 합산하면 본전에 가까울 것이다.

카지노에서 오래 있으면 당연히 돈을 잃게 마련이다. 카지노를 운영하는 호텔이 승률이 낮은 게임을 가져다 놓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돈을 잃지 않는 좋은 방법은 뭔가 소규모의 행운이 터졌다면 바로 일어서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 얼마까지만 써야지 하고 정해놓는 것이 그 이상 잃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다.


처음에 라스베이거스에 갔을 때 집값이 싼 것을 알고 거기다 집을 하나 살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와이 집값이 너무 비싸서 라스베이거스 집값을 알고는 혹한 것이다. 하와이에서 100만 불하는 수준의 집이라면 라스베이거스에서는 30만 불 정도였다. 그때 집을 하나 사두는 것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은 라스베이거스의 집값도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신중한 편이라 가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생긴다. 그때 라스베이거스에 집을 샀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라스베이거스로 이주했을까 아니면 랜트를 주고 고정수익을 챙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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