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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욱 Jul 30. 2023

[카메라] 2.2 라이카 I에서 니콘 F까지

[35mm 필름 카메라의 원조  – 라이카]

19세기 후반 사진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많은 회사들이 다양한 카메라를 선보였습니다만 필름의 규격이 통일되지 않아 카메라마다 사용하는 필름의 크기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제각각인 필름의 크기는 카메라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필름 규격을 표준화하는 것은 일반 카메라가 아니라 무비 카메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셀룰로이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유연한 필름은 롤에 감을 수 있기 때문에 빠르게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1888년에 이런 특징을 이용하여 활동사진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고, 에디슨 연구소의 직원이었던 윌리엄 딕슨(William Kennedy Laurie Dickson)에게 개발을 맡겼습니다. 에디슨과 딕슨은 활동사진에서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필름 크기를 찾기 위해 많은 실험을 한 결과 가로 1인치, 세로 3/4인치 크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 필름을 안정적으로 감기 위해 필름 양쪽에 톱니바퀴용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공간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필름의 폭을 1 3/8인치로 결정했는데, 이 크기를 밀리미터 단위로 환산하면 34.925mm입니다. 에디슨과 딕슨은 1891년에 촬영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와 재생기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의 시제품을 개발하고 특허를 출원합니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활동사진을 한 번에 한 사람만 볼 수 있어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Lumière brothers)가 큰 스크린으로 화면을 비춰줄 수 있는 영사기를 발명(1895년)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뤼미에르 형제가 채택한 필름의 폭이 35mm였습니다. 필름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영화산업에서 미국과 유럽이 모두 35mm 필름을 사용하게 되자 35mm 필름의 생산이 크게 늘어났고 어디서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림 2.11 키네토그래프 특허 출원에 설명된 필름의 형태>

35mm 필름을 이용한 최초의 스틸 카메라(Still Camera)는 1913년에 ‘에른스트 라이츠 광학 공업(Ernst Leitz Optische Werke Wetzlar)’사의 엔지니어였던 오스카 바르낙(Oscar Barnack)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바르낙은 작은 필름으로 사진을 찍은 후 크게 확대하여 인화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르낙은 원래 칼 자이스(Carl Zeiss)사의 직원이었는데 자이스사는 그의 아이디어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바르낙은 라이츠사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게 됩니다. ‘라이카(Leica)’라는 이름은 ‘라이츠(LEItz)’가 만든 ‘카메라(CAmera)’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바르낙이 1913년에 개발한 최초의 라이카는 ‘바르낙 라이카(Barnack Leica)’ 또는 ‘우르 라이카(Ur Leica)’라고 불립니다. '우르(Ur)'는 '최초'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입니다. 바르낙 라이카 카메라는 같은 35mm 필름을 사용하는 무비 카메라보다 2배 큰 이미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더 화질이 뛰어났고, 사진을 크게 인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또한 이전의 상자형 카메라보다 훨씬 작고 가벼워 어디든지 들고 다닐 수 있었으며 바디와 부품을 대부분 금속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서 튼튼하고 신뢰성이 높았습니다. 36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롤 필름 카트리지를 사용했고, 바디 윗면에 셔터 버튼이 설치되고 셔터 버튼 주위에 필름 감기용 손잡이가 설치되었으며, 파인더 등의 악세서리를 부착할 수 있는 ‘악세서리 슈(Accessary Shoe)’가 달려 있는 등 현대적인 카메라의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그림 2.12 바르낙 라이카>
<그림 2.13 35mm 필름의 영화 포맷과 사진 포맷>

바르낙은 1913년부터 1914년까지 2년 동안 조금씩 구조가 다른 우르 라이카를 3대 만들었는데,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개발이 중단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23년, 라이츠사는 중단되었던 카메라 개발을 다시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31대의 시제품을 생산합니다. 이때 생산되었던 제품들은 ‘라이카 0 시리즈(Leica Null Serie)’라고 불리며, 바르낙 라이카의 경우 셔터 속도가 1/40초로 고정되었던 것에 비해 1/20~1/500초까지 셔터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고 광학식 파인더가 부착되는 등 몇가지 개선 사항이 반영되었습니다. 1925년, 마침내 ‘라이카 I(Leica I)'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또는 '라이카 A'라고 불리기도 함)되어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림 2.14 라이카 I>


<그림 2.15 오스카 바르낙이 우르 라이카를 이용하여 찍은 최초의 사진, 1913년 독일 베츨러(Wetzlar)>


[35mm SLR 카메라의 시작 – 키네 엑작타 & 콘탁스 S]

1925년에 등장한 라이카는 우수한 광학성능과 촬영 편의성을 제공했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튼튼한 바디 덕분에 기존의 카메라들보다 훨씬 작고 가벼우면서도 신뢰성이 높아 사막, 높은 산, 전쟁터 등 어떤 환경에서도 훌륭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라이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35mm 필름은 사진 촬영을 위한 주류 포맷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라이카도 레인지파인더 카메라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촬영용 렌즈와 파인더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피사체의 거리가 가까워질 경우 렌즈와 파인더의 위치가 달라서 파인더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로 찍히는 모습이 달라지는 시각차(Parallex) 문제가 있었고, 촬영 렌즈를 광각이나 망원 렌즈로 교체할 경우 파인더의 화각과 일치하지 않아 구도를 잡거나 초점을 정확히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35mm 필름을 사용하는 SLR 카메라가 등장하게 됩니다. 

최초의 35mm SLR 카메라는 독일 드레스덴에 위치한 ‘이하게(Ihagee Kamerawerk Steenbergen GmbH)’ 사가 1936년에 개발한 ‘키네 엑작타(Kine Exakta)’였습니다. 이하게 사는 1933년부터 127 포맷롤 필름을 이용한 SLR인 ‘엑작타’ 카메라를 이미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를 35mm 포맷에 맞게 개조한 것이 ‘키네 엑작타’입니다. 35mm 필름은 원래 영화 촬영에 쓰이던 것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엑작타’와 구분하기 위해 영화를 의미하는 독일어 ‘키네’를 앞에 붙여 ‘키네 엑작타’라고 이름 붙이고, 이전의 엑작타는 'VP 엑작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SLR 카메라는 엑작타 이전에도 많이 이용되고 있던 카메라 형태였습니다만 크기가 작은 35mm 필름 카메라에 적용하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포커싱 스크린이 작아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중형이나 대형 필름(혹은 건판)을 사용하는 SLR 카메라는 포커싱 스크린이 충분히 크기 때문에 맨눈으로 초점이 정확하게 잡혔는지 확인할 수 있었지만 35mm 필름을 사용할 경우에는 포커싱 스크린이 작기 때문에 초점을 확인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이전의 SLR 카메라들은 바디 안에 공간이 충분히 있어 반사거울을 움직이는 장치를 설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바디가 작은 35mm 카메라에서는 그런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하게는 이런 문제들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첫째, 초점 조절의 어려움은 포커싱 스크린을 볼록렌즈로 만들어 이미지가 크게 보이도록 함으로써 해결합니다. 이전의 포커싱 스크린은 평평한 간유리였기 때문에 이미지가 맺히는 크기 그대로 보입니다. 이하게는 한쪽면은 평평한 간유리로 만들고 다른 한쪽은 볼록렌즈로 만들어 평형한 면에 맺힌 이미지가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포커싱 렌즈를 개발하였습니다. 

<그림 2.16 이하게가 개발한 포커싱 렌즈>

둘째, 움직이는 반사거울을 설치하기 위해서 카메라 바디를 위부 케이스와 내부 프레임으로 구분하고 각각 알루미늄 합금 다이캐스팅으로 만듭니다. 라이카가 개발되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카메라는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작고 정교한 메커니즘을 설치하기 어려웠는데, 라이카는 황동을 이용해서 대부분의 바디와 렌즈 부품을 제작함으로써 작으면서도 튼튼하고 정교한 카메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하게도 라이카와 마찬가지로 금속(알루미늄 합금)을 이용해서 카메라를 제작함으로써 반사거울을 움직일 수 있는 정교하고 튼튼한 메커니즘을 구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림 2.17 키네 엑작타>

이하게가 35mm 필름을 사용하는 SLR 카메라를 개발하기는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하게의 키네 엑작타는 이전의 SLR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포커싱 스크린이 위쪽으로 향해 있어 촬영할 때 사진가가 아래쪽으로 내려다 봐야 합니다. 이는 피사체를 향해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레인지파인더에 비해 약점으로 부각됩니다. 

<그림 2.18 레인지파인더 vs. 키네 엑자타의 촬영시 시선방향>

키네 엑작타 카메라에서 파인더 시선 방향을 수평 방향으로 바꿔 주려면 대각선 반사거울을 하나 더 설치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한다면 시선 방향은 수평으로 만들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상하좌우가 바뀌어서 보이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현상을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림 2.19를 봅시다. 원래의 피사체(➀)는 렌즈를 통해 필름면(➁)에 이미지로 맺힐 때 상하좌우가 뒤바뀐 모양이 됩니다. 이 이미지가 대각선 반사거울을 통해 포커싱 스크린(➂)에 맺히게 되면 다시 상하가바뀝니다. 상하좌우가 바뀌었던 이미지에서 다시 상하가 바뀌므로 원래의 이미지와 상하방향은 일치하게 되지만 좌우방향은 뒤바뀐 모양입니다. 이 이미지를 또다른 대각선 거울로 반사시켜서 파인더(➃)에서 본다면 또다시 상하방향이 바뀌어서 결과적으로는 피사체(➀)와 상하좌우가 모두 뒤바뀐 이미지(➃)가 보이게 됩니다 (그림 2.19).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파인더 쪽에 대각선 반사거울 대신 오각형 모양의 ‘펜타 프리즘(Penta Prism)’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펜타 프리즘 안에서 빛이 두 번 반사되면서 이미지의 상하좌우가 바로잡혀 원래의 피사체와 똑같은 방향(➄)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림 2.20). 

<그림 2.19 두 개의 대각선 거울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
<그림 2.20 대각선 거울과 펜타프리즘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

펜타 프리즘을 이용하여 파인더의 방향이 피사체를 향하게 만든 최초의 카메라는 ‘자이스 이콘(Zeiss Ikon)’사가 1948년에 출시한 ‘콘탁스 S(Contax S)’입니다. 자이스 이콘은 칼 자이스 그룹의 자회사로 카메라 바디의 개발과 생산을 전담하는 회사였습니다. 자이스 이콘은 독일 내 여러 군데에 연구개발과 생산 시설을 갖고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지면서 자이스 이콘도 두 개의 회사로 나뉘게 됩니다. 서독 지역에는 ‘자이스 이콘 슈투트가르트 주식회사(Zeiss Ikon AG Stuttgart)’가 설립되고 동독 지역에는 국영기업인 ‘VEB 자이스 이콘(VEB Zeiss Ikon)’이 각각 설립됩니다. 콘탁스 S는 동독지역에 설립되었던 VEB 자이스 이콘이 개발합니다. 바디 윗면의 중간에 삼각형으로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바로 펜타 프리즘이 설치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림 2.21 펜타 프리즘이 장착된 최초의 SLR, 콘탁스 S>
<그림 2.22 펜타 프리즘의 형태>

파인더가 피사체를 향해 있는 ‘아이 레벨 파인더(Eye Level Finder)’는 사진 촬영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가장 널리 사용되던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에서는 가까운 피사체를 촬영할 때 시각차를 보정하거나 초점을 정확하게 잡기 위해서 복잡한 악세서리를 사용해야 했는데 콘탁스 S에서는 파인더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콘탁스 S는 35mm SLR 카메라의 표본이 되어 이후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SLR 카메라의 전성기를 이루는 시발점이 됩니다. 


[파인더의 블랙 아웃을 제거하다 – 아사히플렉스 IIb]

펜타 프리즘을 사용하여 아이 레벨 파인더를 구현함으로써 SLR 카메라가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에 비해 큰 장점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SLR 카메라는 셔터가 열리기 전에 반사거울이 위쪽으로 접혀 올라가는데, 이 때 파인더로 가는 빛이 차단되어 촬영하는 순간에는 피사체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블랙 아웃(Black Out)’이라고 합니다. 

초기의 SLR 카메라들은 셔터 버튼과 연결되어 있는 스프링의 작동으로 인해 셔터 버튼이 눌린 직후 반사거울이 먼저 접혀 올라간 이후에 셔터가 동작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촬영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반사거울이 윗면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다음 촬영을 위해 일일이 반사거울을 다시 내려주어야 했습니다. 한 장만 찍는 경우에는 블랙 아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피사체를 따라다니며 여러 장을 빠르게 촬영해야 하는 경우에는 아주 성가신 문제였습니다. 이에 비해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는 촬영렌즈와 파인더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블랙 아웃 현상이 존재하지 않아 빠른 촬영이 필요한 경우 SLR 카메라보다 훨씬 유리했습니다. 

SLR 카메라의 블랙 아웃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사히 광학 주식회사(Asahi Optical Co., Ltd.)’가 1954년에 개발한 ‘아사히플렉스 IIb(Asahiflex IIb)’ 카메라였습니다. 아사히플렉스 IIb는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순간 위로 접혀졌던 반사거울이 자동으로 다시 내려오는 ‘퀵 리턴 미러(Quick Return Mirror)’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사히 광학 주식회사는 1929년에 일본 도쿄에서 설립된 회사로, 처음에는 렌즈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습니다. 20세기 초에 일본에는 카메라와 렌즈 제조회사가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회사는 독일의 라이카와 자이스의 제품을 모방한 제품을 생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아사히 광학은 이렇게 독일 제품을 모방해서 만들어진 일제 카메라에 쓰일 렌즈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회사였습니다. 

아사히 광학이 처음으로 자체적인 카메라를 개발한 것은 1952년입니다. 비록 1948년에 콘탁스 S가 출시되는 등 SLR 카메라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1952년 당시에 카메라의 주류는 라이카를 필두로 한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였습니다. 그런데 아사히 광학은 과감하게 SLR 카메라를 개발하기로 결정합니다. 

아사히 광학이 1952년에 처음 내놓은 카메라는 ‘아사히플렉스 I(Asahiflex I)’이었습니다. 이 카메라는 콘탁스 S가 출시된 이후에 개발된 카메라였지만 펜타 프리즘이 없이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Waist Level Finder)’가 장착되어 있었고, 구도 조정을 위해 촬영 렌즈와 연동되지 않고 50mm 렌즈 화각으로 고정된 ‘아이 레벨 파인더’가 추가로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즉, 촬영 렌즈와 연동된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는 초점 조절을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 카메라는 1/20 ~ 1/500초 범위에서 동작하는 셔터를 갖고 있었고, 반사거울은 셔터 버튼을 누를 때 올라가고 셔터 버튼에서 손을 뗄 때 자동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하시플렉스 I은 일본 내에서만 판매되었으나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여 1년만에 단종되고 뒤를 이어 1953년에 아사히플렉스 II가 출시되었습니다. 아사히플렉스 II는 저속셔터가 추가되어 셔터속도 범위가 1/2 ~1/500

초로 확대되었는데, 저속셔터로 인해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셔터버튼이 눌리면 셔터막이 열렸다가 정해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닫히게 되는데, 이때 셔터버튼에서 손을 떼지 않아도 셔터막이 다시 닫히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속셔터에서는 셔터의 동작이 마무리되기 전에 셔터버튼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 셔터가 닫혀버리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셔터속도가 1/20초보다 빠를 때에는 셔터버튼에서 손을 떼기 전에 셔터의 작동이 마무리되기 때문에 촬영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지만 1/2초까지 저속셔터가 확장되자 셔터막이 닫히기 전에 셔터버튼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생겼고, 이런 경우 충분한 노출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러가 내려와서 빛을 가려버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사히 광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러의 움직임을 셔터버튼이 아니라 셔터막에 연동시켰습니다. 즉, 셔터막이 열리기 전에 미러가 올라가고, 셔터막이 닫힌 후에 미러가 내려오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개선 사항을 반영하여 1954년에 새로 출시한 카메라가 바로 아사히플렉스 IIb입니다. 아사히플렉스 I과 IIb는 외형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림 2.23 아사히플렉스 I vs. IIb>

아사히플렉스는 콘탁스 S가 출시된 이후에 개발된 카메라임에도 불구하고 펜타 프리즘이 장착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퀵 리턴 미러를 실용화했다는 큰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아사히플렉스 이후 퀵 리턴 미러 기술은 다른 카메라 회사에 빠르게 확산되어 펜타 프리즘을 통한 아이 레벨 파인더와 퀵 리턴 미러를 갖춘 현대식 SLR이 대거 등장하게 되고, 결국 35mm 카메라의 주류가 레인지파인더에서 SLR로 바뀌게 됩니다. 


[잊혀진 선구자 – 감마 듀플렉스]

앞에서 펜타 프리즘을 이용해 아이 레벨 파인더를 개척한 콘탁스 S와 퀵 리턴 미러를 이용해 파인더 블랙 아웃을 제거한 아사히플렉스 IIb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 두 카메라에 앞서 이 두 기술을 모두 구현한 선구적인 카메라가 있었습니다. 비록 이 카메라는 냉전 시기에 공산권 국가인 헝가리에서 개발되어 세계 카메라 산업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기술을 선구적으로 개척했던 공로는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카메라는 ‘감마 광학(Gamma Optikail Művek)’에서 생산되었던 ‘듀플렉스(Duflex)’입니다. 

<그림 2.24 듀플렉스>

듀플렉스 카메라를 처음 구상한 사람은 헝가리의 사진가인 예노 듈로비츠(Jenő Dulovits)였습니다. 듈로비츠틑 1942년에 이 카메라에 대한 특허를 획득한 후 감마 광학에 라이센스를 주어서 시제품을 개발하게 합니다. 감마 광학은 1948년에 시제품 생산에 성공하고 1949년에는 양산을 시작합니다. 

듀플렉스 카메라에는 시대를 앞서간 특징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파인더입니다. 이 카메라의 뒷면(그림 2.25)을 보면 파인더가 두 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 있는 것은 초점 조절용 파인더이고 가운데 위에 있는 것은 구도 조절용 파인더입니다. 초점 조절용 파인더는 촬영 렌즈와 연동되어 있어 필름에 맺히는 이미지의 초점을 맞추게 되어 있습니다. 구도 조절용 파인더는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촬영용 렌즈와 상관없이 고정된 화각의 렌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초점 조절용 파인더입니다 (그림 2.26). 

<그림 2.25 듀플렉스 카메라의 두 개의 파인더>
<그림 2.26 초점 조절 파인더 안에서 빛의 경로>

이 카메라의 초점 조절 파인더는 펜타 프리즘이 아니라 ‘포로 프리즘(Porro Prism)’과 두 개의 반사거울을 사용하여 개발되었습니다. 펜타 프리즘을 사용하는 경우보다 훨씬 구조가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펜타 프리즘을 정교하게 가공하는 것이 더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파인더는 펜타 프리즘을 사용하는 콘탁스 S의 파인더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상하좌우를 피사체와 같은 방향으로 유지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퀵 리턴 미러입니다. 2.8절에서 살펴 본 것처럼 퀵 리턴 미러를 개척한 것은 1954년에 출시된 아사히플렉스 IIb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퀵 리턴 미러가 장착된 최초의 카메라는 이보다 5년이나 앞섰던 듀플렉스였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셔터막입니다. 당시에는 셔터막을 검게 코팅한 헝겁으로 만들었는데, 만약 카메라가 똑바로 태양을 향하게 되면 햇빛이 모여 셔터막에 구멍이 뚫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듀플렉스 카메라는 셔터막을 금속판으로 만들어서 햇빛에 구멍이 뚫릴 염려가 없었습니다. 

듀플렉스 카메라는 이처럼 혁신적인 카메라였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습니다. 냉전 시기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기업들이 국영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감마 광학도 이 물결을 피하지 못하고 국영화가 되었고, 듀플렉스 카메라를 생산한지 1년도 채 못된 시점에 헝가리 정부의 명령에 의해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생산된 듀플렉스는 모두 535대였으며, 대부분은 헝가리 안에서만 팔렸기 때문에 듀플렉스 카메라의 혁신적인 설계가 다른 나라로 퍼져 나갈 수 없었습니다. 


[카메라의 새로운 주류, 시스템 카메라 – 니콘 F]

사진을 촬영할 때에는 피사체의 크기, 거리, 움직임, 빛의 밝기 등 많은 변수가 존재합니다. 여러가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서 성공적으로 촬영할 수 있으려면 다양한 교환 렌즈와 악세서리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카메라 바디도 폭넓은 렌즈와 악세서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카메라 바디 뿐만 아니라 교환 렌즈와 악세서리까지 폭넓게 갖추어진 카메라를 ‘시스템 카메라(System Camera)’라고 합니다. 

뷰 카메라는 교환 렌즈와 악세서리를 사용하기에 유리하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서 이동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TLR 카메라는 교환 렌즈를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SLR 카메라는 교환 렌즈를 사용하기에 유리하지만 1950년대 초반까지는 카메라 바디의 기능과 성능에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1925년에 라이카 카메라가 출시된 이후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는 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가장 폭넓은 교환 렌즈와 악세서리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스템 카메라에 가장 적합한 형태였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전세계의 카메라 산업을 주도한 나라는 독일이었고, 독일의 기업들 중에서 라이츠와 자이스가 쌍두마차로 산업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도 카메라와 렌즈를 만드는 회사들이 많이 설립되었지만 대부분은 독일 기업의 제품들을 모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일본 회사 중에서 가장 앞서 있던 것은 현재 ‘니콘(Nikon)’으로 잘 알려진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였습니다. 

니콘은 설립 초기에는 라이카, 콘탁스 등 독일의 유명 카메라와 ‘캐논(Canon)’을 비롯한 다른 일본 카메라들을 위한 렌즈만을 만들다가 1948년에 처음으로 자체적인 카메라 ‘니콘 I(Nikon I)’을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니콘 I은 그보다 훨씬 전에 출시되었던 콘탁스 II를 모방한 것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아직 독일 회사들과 기술 격차가 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림 2.27 니콘 I vs. 콘탁스 II>

니콘은 독일 회사들에 비해 기술이 뒤쳐져 있음을 인정하고 따라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1954년, 니콘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니콘 S2(Nikon S2)’를 출시하며 내심 라이카와 콘탁스를 따라잡았다고 기대했으나 같은 해 출시된 라이카 M3를 보고 격차를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 니콘은 라이카 M3의 뛰어난 성능에 충격을 받아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로 경쟁하는 것을 포기하고 SLR 개발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1950년대 초반 35mm SLR 카메라의 선두주자는 아사히 광학이었습니다. 아사히 광학은 퀵 리턴 미러가 장착된 아사히플렉스 IIb(1954년)에 이어, 퀵 리턴 미러와 펜타 프리즘을 모두 장착한 현대적인 SLR인 ‘아사히 펜탁스(Asahi Pentax, 1957년)’를 내놓으며 SLR 카메라 개발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니콘은 SLR 분야에서도 후발주자였지만, 선두주자인 아사히 광학이 소홀히 했던 부분을 파고 들었습니다. 

1959년, 니콘은 ‘니콘 F(Nikon F)’라는 카메라를 야심차게 세상에 내놓습니다. 니콘 F는 퀵 리턴 미러와 펜타 프리즘을 포함하여 뛰어난 성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환 렌즈와 전용 악세서리들이 한꺼번에 같이 출시되어 시스템 카메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합니다. 니콘 F 시스템의 주요 특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교환 렌즈를 빠르게 탈착할 수 있는 ‘베이요넷(Bayonet)’ 마운트

        •  21mm ~1000mm에 걸친 다양한 교환 렌즈

        •  펜타 프리즘 부분이 분리되어 여러 종류의 뷰 파인더 및 포커싱 스크린 교환 가능

        •  여러 종류의 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필름 백

            -  250장의 필름을 한꺼번에 장착할 수 있는 대용량 필름 카세트

            -  35mm 필름 대신 폴라로이드 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Speedy Magny’ 필름 백

            -  4x5 중형 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필름 백

        •  초당 4장의 사진을 연속해서 찍을 수 있는 모터 드라이브

니콘 F 이전에 나온 카메라들은 교환렌즈나 악세서리들이 카메라가 출시된 이후 필요에 따라 순차적으로 출시되었던 것에 비해 니콘 F는 카메라의 출시와 함께 모든 렌즈와 악세서리들이 동시에 출시되어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니콘 F 카메라는 다양한 기능과 악세서리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 바디 자체도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 촬영 환경이 험한 곳에서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 카메라는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던 많은 기자들에게 사용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카메라 시장의 주류가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에서 SLR 카메라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이 카메라는 60년대 미국이 발사한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우주선에도 탑재되어 과학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의 전반까지는 독일제 레인지파인더 카메라가 시장을 주도했지만, 니콘 F를 기점으로 20세기의 후반에는 일본제 SLR 카메라가 시장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림 2.28 니콘 F>
<그림 2.29 니콘 F 카메라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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