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욱 Dec 29. 2023

[독후감/감상평] 영화 <노량>

값진 역사적 사실의 값싼 소비에 실망하다.

*주의) 이 글에는 영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 영화 '노량'을 봤다. 흥행 성적은 순항하고 있는 모양인데 영화 자체는 상당히 엉성하다. 대포 많이 쏘고, 적 많이 죽이고 (우리 편도 많이 죽고), 결국 이기는 전쟁 오락 영화로 본다면 그냥저냥 볼만한 수준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량해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영화는 수준 미달이다. 내가 실망한 포인트들은 다음과 같다 (영화를 보면서 눈에 띈 순서).


1. 엉성한 CG

2. 전투 상황에 대한 고증 실패

3. 신파적 감성의 마무리


노량해전은 임진/정유 전쟁을 통틀어 해전 중에서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승전이다. 대첩이라고 불리는 명량, 한산 해전에 비해 조선(명)과 왜 수군 양측의 함선 수와 병력의 수가 모두 최대였고, 전투 후 함선과 병력의 교환비도 가장 높은, 한마디로 '크고 완벽한 승리'라 할 수 있다. 단 하나, 조선 수군의 영웅(더 나아가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것만 제외하면. 노량해전이 대첩이라 불리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이순신장군이 전사했다는 점 뿐이다. 이런 역사적인 전투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이렇게 엉성하게 나왔다는 것에 큰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영화는 조선 수군의 본진이 있는 포구에 전선들이 빼곡히 정박되어 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부터 '어, 뭔가 많이 어색한데'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물에 떠 있는 배의 움직임이 파도의 움직임과 전혀 맞지 않게 따로 노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물론 큰 질량을 가진 배가 작고 빠른 파도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배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어색하게 보인다. 그래도 이 부분은 주관적인 느낌일 수 있으니 넘어가려 했다. 다음 장면을 보기 전 까지는...


육상에서의 장면들이 잠시 전개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항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배에는 돛이 펼쳐져 있고, 순풍을 받아 돛이 앞쪽으로 팽행하게 부풀어 있다. 즉, 바람이 배의 뒤에서부터 앞쪽으로 불고 있다는 것. 그런데 배의 깃발들은 모두 뒤쪽으로 펄럭이고 있다! 바람의 방향과 반대로 나부끼는 깃발이라니!! 여기에서부터 영화에 대한 몰입이 확 깨지고 또 뭘 잘못 만들었나 도끼눈을 뜨고 살펴보게 됐다. 


이후의 스토리는 순천성에 있는 왜군(고니시 군)이 탈출구를 확보하기 위해 진린을 매수하려 애쓰는 과정과, 진린이 구멍을 열어줘서 고니시의 연락선이 사천에 있던 시마즈에게 구원을 청하는 과정, 시마즈가 출정을 결정하는 과정 등을 그럭저럭 무난하게 이어나간다. 


전투 장면이 시작되자 두 번째 문제점이 눈에 걸린다. 조선 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고 판옥선의 주력 무기는 함포이다. 반면 왜 수군의 주력선은 세키부네이고 세키부네의 주력 무기는 조총과 상대편 배로 병사들이 넘어가서 칼로 싸우는 근접전이다. 조선 수군 중에서도 이순신의 함대가 탁월했던 것은 바로 근접전을 허용하지 않는 함포전 능력이었다. 조총탄이 도달하기 힘든, 설령 도달하더라도 두터운 선체를 뚫지 못해 별로 타격을 입지 않는 거리에서 조선의 판옥선이 포를 쏘아서 왜군의 배를 통째로 수장시켰기 때문에 이순신의 함대가 그토록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노량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 이순신의 전과를 살펴보면 왜군측은 격침된 배 수십척에 전사자 수천명 단위의 피해를 입을 때 조선 수군은 격침은 거의 없고 인명피해도 전사 수 명, 부상 수십 명 수준에 그친다. 즉, 왜군한테 거의 맞지 않고 멀리서 대포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다는 뜻이다.). 이에 더해서, 설령 왜 수군이 배를 판옥선에 접근시켰더라도 판옥선의 높이가 한 층이 높았기 때문에 왜군은 쉽게 월선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조선 수군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활을 쏘고 창을 휘둘러 왜 수군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완전히 근접한 상태에서는 조총과 활의 사거리 차이가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연사력이 우수한 활이 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전투 초기에 약간의 함포전을 보여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왜 수군이 월선하여 선상 육박전이 벌어지는 장면을 비중 있게 보여준다. 


노량해전에서 육박전이 벌어졌던 것은 맞다. 좁은 수역에 조선 수군 함선 150~200여척, 왜 수군 함선 350여척에 명 수군 300여척의 함선이 참전한 대규모 해전이니 육박전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상자 수를 보면 육박전을 허용한 조선 수군의 함선은 몇 척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육박전은 일부 함선에서 벌어진 제한적인 규모였고 전투의 전반적인 양상은 여전히 이순신 함대의 자랑인 함포전이었다고 생각하는게 맞다. 다만 이전의 해전들에 비해 함선수가 많기 때문에 보다 가까운 거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조총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서 이전보다 피해를 더 많이 입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량해전에 참가한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함선과 병력수 추정치:

    - 조선군: 함선 150~200척 (이 중 판옥선은 약 50척으로 추정), 병사 6~7천명

    - 왜군: 함선 약 350척, 병사 약 2만 명

    - 명군: 함선 약 300척, 병사 1만5천 명 이상


전투 후 각 군이 입은 피해 추정치:

    - 조선군: 함선 최대 4척 격침, 전사자 최대 300명

    - 왜군: 함선 약 300척 격침, 수십 척 파괴 또는 조선군에 나포, 전사자 1만~1만5천명

    - 명군: 함선 수 척 격침, 전사자 200~300명


조선군의 판옥선 한 척에 150~180명, 다른 작은 배에는 약 100명 정도가 탑승했음을 고려할 때 조선군 전사자의 대부분은 격침된 배와 함께 전사한 것이지 월선을 허용하여 왜군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노량해전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이전의 해전들보다 근접전이 조금 더 자주 발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선군이 화포로 일본군의 배를 일방적으로 두들겨대는 함포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곧이 곧대로 영화로 옮기면 자칫 영화는 지루해지기 쉬우니 육박전의 비중을 높여서 묘사한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확 깨게 만들었던 것은 이순신의 대장선에 왜군이 월선하여 육박전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13척 vs. 133척으로 절대적인 숫적 열세에서 벌였던 명량해전에서도 월선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순신의 대장선이 수군 세력을 완전히 재건한 상태로 맞붙은 노량에서 월선을 허락했다고? 주위에 있던 호위함들은 다 놀았나? 이건 정말 선 넘었지!


김한민 감독이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영화를 만들었어도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칼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그릴 수는 없었는지 결국 대장선에 올라탄 왜구는 모두 처치되고, 이순신은 직접 북채를 들고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하는데...


아니, 그렇게 전투 상황이 급박한데 최고사령관이 전투 지휘를 하지 않고 북이나 치고 있었다고? 그것도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서도 계속 북을 쳤다고? 어쩌면 원균이었다면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북이나 치고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 냉철한 이순신 장군이? 정확히 몇 분 동안이었는지 재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낌상 영화 마지막 10~15분 정도는 북 치는 소리밖에 안 들렸던 것 같다. 나는 이 장면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김한민의 임진왜란 전작 영화 <한산>과 <명량>을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었지만, 이번 <노량>을 보고서는 크게 실망했다. 시나리오도 CG도 연출도 모두 수준 이하였다. 앞으로 나는 김한민의 영화를 피하게 될 것 같다. 이순신 장군과 노량해전을 이렇게 싸구려로 소비해서는 아니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카메라] 2.2 라이카 I에서 니콘 F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