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솔루션보다 깔끔한 원인 규명이 먼저다.
며칠 전 시청앞에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생겼다. 우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께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이 사고의 원인을 두고 '급발진이다' vs. '운전자 실수다'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다. 가해자(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은 운전자의 실수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대한 대안으로써 페달 오조작을 방지하는 장치를 추가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반대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급가속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례는 없다.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고이고, 한번 일어나면 꽤 심각한 인적, 물적 손실을 발생시키는 중대한 사고인데도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가 발생하면 운전자는 급발진이라고 주장하고 제조사는 운전자 과실로 몰아가며 명쾌하게 책임이 규명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왜 급발진 사고는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고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면 책임이 있는 쪽이 져야 할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조사와 소비자(운전자)가 서로 어정쩡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일종의 휴전 상태라고 할까...
사실 지금도 차량에는 급발진 여부를 밝힐 수 있는 장치가 달려있기는 하다. 바로 EDR(Event Data Recorder)이라는 사고 기록 장치이다. EDR은 엑셀 및 브레이크 페달의 각도, 조향 각도, 안전벨트 착용여부, 에어백 작동 여부 등 다양한 데이터를 기록하는, 마치 항공기의 블랙박스같은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 이 EDR의 데이터를 분석하면 페달을 오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엔진이 오동작한 급발진인지 가려낼 수 있다. 음... 과연 그럴까? EDR에도 몇 가지 한계가 존재한다.
첫째, EDR 장착이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생산되는 차량은 실질적으로 거의 대부분 EDR이 장착되어 있기는 하지만 법으로 강제되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EDR을 통해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에 공백지대가 존재한다.
둘째, EDR에 기록되는 데이터의 종류와 포맷이 표준화되어 있지 않다. 각 제조사별로 임의로 선택한 신호들을 임의의 포맷으로 저장하기 때문에 제조사가 그 포맷을 공개하지 않으면 사용자, 또는 제3자가 데이터를 해독하여 객관적으로 사고의 원인을 가려낼 수가 없다.
셋째, EDR에 기록되는 데이터는 센서에서 직접 출력되는 신호가 아니라 ECU, TCU, ACU, SCU (엔진, 변속기, 에어백, 조향 제어기 등을 뜻함. 제조사마다 명칭이 다를 수 있음) 등에서 해당 신호를 읽어들이거나, OBD(On-Board Diagnosis: 온보드 진단기) 단자로부터 읽어들이는 간접신호이다. 즉, 센서가 오작동하거나 제어기에서 센서의 신호를 잘못 인식한 경우 EDR은 이를 구분해 낼 방법이 없다. 내가 EDR에 의한 사고 원인 규명을 지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EDR은 사고가 발생한 후 원인을 규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지 사고 자체를 방지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페달 오조작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차량 스스로 판단하여 차량을 멈추는 장치가 개발되어 있다. 이미 일본 제조사들은 몇 년 전부터 양산차에 적용하고 있는 장치이고, 국내에도 현대차가 최근 출시한 캐스퍼에 이런 장치를 달았다고 광고하고 있다 ('페달 오조작 안전 보조'라는 장치). 하지만 나는 다음의 이유로 이런 장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첫째, 이 장치도 역시 차량 내의 통신버스(Communication Bus: 여러가지 제어기 사이에서 여러가지 신호들이 전달되는 차량 내의 통신망)에서 흘러다니는 신호를 이용하는 것으로써, 센서 자체가 오작동하는 경우에는 이 장치도 오작동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둘째, 안전장치가 운전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철도건널목에서 장애물을 강제로 밀고 나가야 하는 경우에 이 장치가 작동한다면 운전자는 장치를 해제하고 다시 엑셀을 밟아야 한다.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이는 매우 큰 위험을 유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페달 조작을 직접 측정하여 기록하는 독립적인 장치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엑셀과 브레이크 페달의 각도 센서 신호를 직접 저장하는 장치여도 좋고, 페달 부위를 촬영하는 영상기록장치(소위 말하는 '블랙박스')여도 좋다. 페달 조작 여부만 신뢰성 있게 판별할 수 있으면 페달 오조작인지 급발진인지를 가리는 것은 명확하다. 그리하여 페달 오조작이면 운전자에게 책임을 물으면 되고 급발진이면 차량 제조사에게 책임을 물으면 된다. 만약 급발진일 경우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제조사가 할 일이고, 사고의 책임을 가리는 일과는 무관한 일이 된다.
사고의 책임소재를 가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저지른 쪽에 무겁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무겁게. 아주 무겁게.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이 달린 일이니까. 급발진 의심 사고에서 운전자들은 대부분 오랜 경력을 가진 '베테랑 운전자'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만약 그가 페달 조작을 잘못했다면? 그 사람은 차량을 운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를 무면허 운전에 준하는 상황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형사, 민사상의 가중처벌과 함께 면허 박탈 등 강력한 제제를 가하여 이런 사람이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운전자가 제대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차량이 폭주했다면 제조사에게 제조물책임법을 강력하게 적용해야 한다. 대충 벌금 좀 물고 마는 수준이 아니라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EDR도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페달조작기록장치가 강제될 수 있을지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영상 블랙박스(이하 그냥 '블랙박스'라고 하겠음)의 사례가 참고가 될 수 있겠다. 블랙박스는 법적으로 강제된 필수장치가 아니지만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책임소재를 가리는데 핵심적인 자료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모든 차량에 장착되어 있다. 급발진 의심 사고의 경우에도 법정에서 책임이 있는 쪽에 무거운 제제를 가한다면 사용자들이 페달조작기록장치를 자발적으로 장착하게 되지 않을까? (제조사는 EDR이라는 무기를 이미 갖고 있으므로 ...)
요약하자면, 나는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대증요법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보다 긴 시간이 걸릴 지라도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 가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페달조작기록장치를 통해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리게 되고 그에 따라 무겁게 제제가 가해진다면, 운전 능력이 쇠퇴한 운전자들은 스스로 운전을 조심하거나 안하게 될 것이고 제조사는 더욱 완벽하고 안전한 차량을 만들도록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나 역시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어떤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더 복잡한 기술적인 솔루션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