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에서 디지털로의 변화를 고려하여...
사진 찍는 사람들, 아니 그보다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오래된, 술자리 안주같은 토론 주제가 있다. 만약 XX만원의 돈으로 카메라와 렌즈를 장만해야 한다면 바디와 렌즈 중에서 어느 쪽에 돈을 더 많이 써야 하느냐는 것. 바디를 주장하는 쪽도 렌즈를 주장하는 쪽도 모두 탄탄한 논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주제는 끝나지 않고 계속 재생산된다. 이런 "네버 엔딩 스토리"에 나의 의견을 하나 더하고자 한다.
사진은 렌즈로 모은 빛을 필름(센서)에 기록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렌즈이고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은 바디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디 안에 들어있는 필름 혹은 센서다). 바디와 렌즈가 분리되는 카메라를 구입하는 경우, 특히 자기에게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초보자나 아마추어(필자도 아마추어이기는 하다)들은 바디와 렌즈 중 어느 쪽에 더 투자를 많이 해야 할 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결론을 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카메라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 기록하는 것의 상대적인 난이도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바디가 렌즈보다 훨씬 중요하다. 특히 후보정까지도 염두에 둔다면 디지털 카메라에서 바디가 훨씬 중요하다는 점이 더욱 명확하게 부각된다. 지금부터 내 결론의 근거를 제시한다.
우선 바디의 관점에서 보자. 바디는 렌즈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필름이나 센서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주위의 다른 빛을 차단해 주는 어둠상자의 역할이 가장 주된 기능이다. 바디와 렌즈 중에서 보다 정교한 기술이 들어가는 쪽은 렌즈이고, 바디는 빛이 새어 들어오지만 않고 튼튼하면 장땡이다. 맞나? 필름 시절에는 꽤 맞는 말이었다. 필름 시절의 바디는 어둠상자의 기능이 주된 기능이었고, 여기에 제품에 따라 자동초점이나 연사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실제로 이미지를 기록하는 필름은 바디와 상관없는 별도의 제품이었고, 이미지의 품질은 어떤 필름을 사용하느냐에 크게 좌우되었다. 바디는 그저 사용자가 원하는 셔터속도를 정확하게 끊어 주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 바디에 필름(센서)이 들어있는 것과 같다. 이전에는 필름이 담당하던 감도, 색조, 계조, 그레인(노이즈), 다이나믹 레인지 등등 수 많은 기능이 모두 디지털 카메라의 바디 안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카메라에서는 바디의 중요성이 훨씬 높아졌다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렌즈의 관점에서 보자. 렌즈는 기본적으로 유리를 연마하고 그 위에 반사 억제 코팅을 하여 만들어진다. 이 기본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필름(아날로그) 사진에서 디지털 사진으로 넘어 오는 수십 년의 기간동안 렌즈 기술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파장대 별 빛의 경로를 계산해서 렌즈의 형상을 설계해 주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꼽을 수 있겠고, 다음으로 렌즈 사이에서 빛의 반사를 억제해 주는 코팅기술의 발전과 다양한 굴절율과 분산율을 가진 광학유리의 개발을 꼽을 수 있겠다. 이런 기술 발전에 힘입어 현재 생산되는 렌즈들은 수십년 전 필름 사진 시절에 생산된 렌즈들보다 대부분 광학적 성능이 우수하다 (보케나 플레어 등에 의해서 표현되는 렌즈의 '개성'은 별개의 문제다). 니콘, 캐논, 소니 등 메이저 제조사가 직접 만드는 '네이티브 렌즈' 뿐만 아니라 시그마, 탐론, 삼양 등 '서드파티 렌즈'들도 광학적 성능은 모두 우수하다. 디지털 사진의 특징은 렌즈들의 광학적 성능을 상향평준화 시키는 데에 큰 압력으로 작용한다. 필름 사진에서는 전문가 수준이 아니면 사진을 크게 확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마추어의 경우 아주 가끔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을 액자에 넣기 위해 8X12 인치 정도의 크기로 인화하는 것이 최대로 확대하는 정도이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4x6 인치로 인화하는 정도에 그친다. 이에 비하여 디지털 사진은 화면상에서 확대/축소가 자유롭기 때문에 화소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확대해 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렌즈 제조사들이 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화질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렌즈는 브랜드에 상관없이 광학적 성능이 높은 수준으로 상향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추어라면 어떤 브랜드의 렌즈를 사용해도 사진의 품질에 큰 문제가 없다 생각한다.
여기에 덧붙여 고려해야 할 점은 후보정이다. 필름 시대에는 암실("Dark Room")에서 후보정을 했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컴퓨터와 모니터로 구성된 명실("Light Room")에서 후보정을 한다. 디지털 후보정은 필름 후보정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간편하다. 이 점이 필름 사진과 디지털 사진에서 렌즈의 중요성을 차이나게 만든다. 사진의 내용을 만드는 후보정은 예술적인 영역에 속하므로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 글에서는 렌즈의 기술적 한계에 대한 후보정만을 다룬다. 렌즈의 기술적 한계라고 한 것은 렌즈에 존재하는 수차(aberration)에 의해 발생하는, 의도되지 않은 이미지의 변형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미지의 선예도, 색 번짐, 화면 왜곡, 비네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문제점들은 디지털 후보정에서 클릭 한 번으로 간단히 바로잡을 수 있다. 특히 화면 왜곡의 경우 아날로그 후보정에서 바로잡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데 비해 디지털 후보정에서는 너무너무 간단하다. 고급 렌즈는 이런 수차들이 잘 교정되어서 촬영된 이미지가 원래의 대상을 최대한으로 잘 재현할 수 있는 렌즈인데, 수차를 정교하게 교정하면 할수록 렌즈의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디지털 후보정으로 수차를 간단히 보정할 수 있다면 왜 굳이 비싼 고급 렌즈를 써야 할까? 나라면 적당한 렌즈를 사고 남는 돈으로 더 좋은 바디를 사겠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바디의 기능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2. 렌즈의 성능이 상향평준화되었다.
3. 만약 렌즈의 성능이 부족하더라도 후보정을 통해 쉽게 보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