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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욱 Jul 27. 2023

[카메라] 2.1 라이카 이전의 카메라

[동굴에서 만들어진 태초의 이미지 – 카메라 옵스큐라]

인류가 볼 수 있었던 최초의 이미지는 동굴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바깥을 향해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동굴의 맞은편 벽에 바깥의 풍경과 같은 이미지를 맺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상 또는 장치를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라고 부르며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입니다. 

인류가 언제 처음으로 이런 현상을 발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래 전부터 이 현상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기원전 4세기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자와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두운 방 안에서 바깥으로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외부의 풍경이 비치며, 이 풍경은 위아래가 뒤집힌 모양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 2.1 카메라 옵스큐라>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옵스큐라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나 본격적으로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사람은 11세기 아랍의 과학자 알하젠(Alhazen 또는 Ibn al-Haytham)입니다. 알하젠은 그의 저서 <광학>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빛의 성질을 탐구하거나 일식을 관측한 내용 등을 기록해 놨습니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아랍의 많은 지식들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우게 되는데, 이때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지식도 같이 전파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카메라 옵스큐라의 다양한 구조를 연구한 270여장의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다빈치는 핀홀(Pinhole, 또는 바늘구멍)의 크기가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도 했고 눈의 구조와 기능을 카메라 옵스큐라와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화가들은 풍경의 원근감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했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그림을 위한 보조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베네치아의 귀족인 다니엘 바바로(Daniele Barbaro)가 1567년에 작성한 <La Pratica della Perspettiva (투시법의 실습)>입니다. 이 책에서 바바로는 핀홀 대신 볼록렌즈를 사용하면 훨씬 더 밝고 선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져서 그림을 따라 그리기가 더 쉬워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19세기 초에 이르러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 루이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 헨리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 등이 빛에 반응하는 감광물질을 이용하여 사진술을 발명하던 때에도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장치가 사용되었습니다. 


[최초로 대량생산된 카메라 – 지로 다게레오타입 (1839년)]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빛이 사라지면 이미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미지라도 오랫동안 간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빛에 반응하여 성질이 달라지는 화학물질이 발견되면서 이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고정하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광물질을 종이나 가죽 등에 바른 후에 카메라 옵스큐라에 넣어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니셉포르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도 이런 연구를 하던 사람 중의 하나로서 최초의 사진이라고 인정받는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를 개발했습니다만, 그가 사용했던 카메라 옵스큐라의 성능이 낮아서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1827년에 니엡스는 루이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를 만나게 됩니다. 다게르는 무대 장치를 만드는 화가이자 사업가였는데, 특히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조명 효과를 만들어 내는 데 뛰어났습니다. 니엡스와 다게르는 빛을 이용하여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만들기 위해 동업하기로 합니다. 

니엡스와 다게르가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이유는 감광물질의 민감도와 렌즈의 성능이었습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렌즈는 렌즈 한 장으로 구성된 아주 단순한 렌즈로써 색수차와 구면수차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광학적인 성능에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829년에 프랑스 파리의 렌즈 제작자인 샤를 슈발리에(Charles Louis Chevalier)가 고성능 렌즈를 개발하여 다게르에게 제안합니다. 슈발리에가 개발한 렌즈는 굴절율이 서로 다른 두 장의 렌즈를 겹쳐서 색수차를 줄이고 렌즈의 유효구경을 작게 하여 구면수차를 줄였습니다. 다게르는 이 렌즈를 채택하여 이전보다 훨씬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사진기술인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을 완성하였고, 다게레오타입 기술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상자형 카메라를 설계하였습니다. 1839년에 다게르는 자기가 설계한 카메라의  제작을 알퐁스 지로(Alphonse Giroux)에게 맡겼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카메라가 ‘지로 다게레오타입(Giroux Daguerreotype)’으로써, 세계 최초로 대량생산된 카메라입니다 (그림 2.2). 

<그림 2.2 지로 다게레오타입 카메라>


[휴대성과 이동성을 개선하다  – 접이식 상자와 주름상자]

지로 다게레오타입 카메라는 성능 좋은 렌즈를 장착하고 표준화된 설계를 바탕으로 대량생산되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너무 커서 가지고 다니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대부분 스튜디오 안에서 정물이나 인물 사진을 찍는데 이용됐습니다 (그림 2.3). 야외에서 풍경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커다란 카메라와 함께 감광판 현상을 위한 화학약품 상자와 암실까지 함께 가지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전용 마차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그림 2.3 지로 다게레오타입 카메라의 크기>

영국 런던에서 다게레오타입 카메라를 제작하던 토마스 오트윌(Thomas Ottewill)은 1853년에 새로운 디자인의 다게레오타입 카메라를 개발합니다. 나무상자의 여러 곳에 경첩을 설치하여 납작하게 접을 수 있는 카메라를 개발한 것입니다. 납작하게 접으면 부피가 매우 작아지기 때문에 이 카메라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림 2.4).

<그림 2.4 오트윌의 폴딩 카메라>

카메라를 더 작게 만드려는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영국 맨체스터에 있었던 손튼-피카드(Thornton-Pickard) 회사가 1890년에 만든 ‘루비(Ruby)’라는 이름의 카메라는 가죽을 여러 번 접어서 만든 주름상자를 갖고 있어 훨씬 더 작게 접힐 수 있었습니다. 이 카메라는 원래 삼각대 위에 설치되도록 만들어졌으나 이후 개량을 통해서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있을 정도까지 작고 가벼워졌습니다. 

<그림 2.5 손튼-피카드사의 루비 카메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카메라 – 코닥 브라우니]

사진이 디지털 방식으로 완전히 넘어간 요즘 코닥은 잊혀진 이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름이 사진의 주류이던 시절 코닥은 사진 산업을 지배하던 거대한 기업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코닥을 필름을 만드는 회사로 기억하지만, 사실 코닥은 카메라의 개발과 생산에도 큰 업적을 남긴 회사입니다. 

다게레오타입 카메라가 개발된 이후 19세기 후반에 걸쳐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개인과 기업이 다양한 카메라를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카메라는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낸 비싼 물건이어서 개인들이 갖기 힘들었습니다. 가격 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는 과정도 개인들이 카메라를 갖기 힘들게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19세기에는 사진을 찍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번거로웠습니다. 사진을 찍기 직전에 화학재료를 섞어서 감광물질을 만들고 이를 은판이나 구리판에 발라 감광판을 만들어야 했고, 촬영한 후에는 곧바로 현상과 인화를 위한 화학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화학 약품과 도구, 그리고 암실이 갖추어진 스튜디오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 것을 ‘습판사진(Wet Plate Photography)’이라고 합니다. 습판사진으로 풍경사진을 찍으려고 할 경우에는 마차에 암실을 꾸며서 같이 끌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1871년에 습판사진의 단점을 개선한 ‘건판사진(Dry Plate Photography)’이 개발됩니다. 건판사진은 감광물질이 발라진 감광판을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다닐 수 있었고, 촬영 후에도 곧바로 현상과 인화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암실이 옆에 없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야외에서 찍는 풍경사진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은행가였던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은 건판사진에서 사진을 대중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은행에서 나와 1881년에 사진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가 바로 이스트먼 코닥(Eastman Kodak)입니다. 코닥은 처음에는 유리판에 감광제를 바른 건판을 생산하였으나 1885년에 유연한 셀룰로이드에 감광제를 바른 필름을 개발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셀룰로이드 필름은 건판보다 얇고 다루기가 편해서 사진가들이 한번에 촬영할 수 있는 사진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이스트먼은 필름 판매를 늘리기 위해 롤 필름을 개발합니다. 롤 필름은 원통형 카트리지 안에 긴 필름을 돌돌 말아서 넣은 것으로 많은 양의 필름을 작은 공간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트먼은 롤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도 새로 개발합니다. 1888년에 최초로 개발된 카메라는 뷰 파인더 없이 촬영용 렌즈만 설치되어 있고, 조리개나 셔터속도도 조절할 수 없는 단순한 상자형 카메라였지만, 무려 100장을 찍을 수 있는 롤 필름 카트리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진가는 아무 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100장의 사진을 촬영한 후에 카메라를 통째로 코닥의 현상소에 보내면, 현상소에서 필름을 꺼내어 인화하고 새 필름 카트리지를 끼워서 다시 보내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코닥이 내세웠던 유명한 광고 문구가 “당신은 셔터만 누르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에게 맡기세요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였습니다. 

코닥의 이 새로운 카메라는 시장에서 나름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반 소비자가 사용하기에는 비쌌습니다. 당시 코닥 카메라 가격이 25달러, 필름 현상 비용이 10달러, 새 필름을 가격이 2달러로 지금의 물가로 환산하면 각각 약 500달러, 200달러, 40달러 정도였습니다. 이전의 건판 사진보다는 훨씬 저렴해졌지만 여전히 일반 소비자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습니다. 코닥은 획기적으로 저렴한 카메라를 새로이 출시합니다. 

1900년에 출시된 ‘브라우니(Brownie)’는 카메라 가격이 단지 1달러에 불과해 날개 돋힌 듯이 팔렸습니다. 브라우니 카메라는 몸체가 저렴한 카드보드로 만들어졌지만, 셔터속도와 조리개가 각각 3단계로 조절되고 가로와 세로 구도를 위한 뷰 파인더가 각각 따로 설치되어 있는 등 촬영의 편의를 위한 개선이 많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브라우니는 1900년에 출시된 이후 수십가지 모델 변경이 이루어지면서 1986년에 단종되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대가 팔렸습니다. 

<그림 2.6 최초의 코닥 카메라(좌)와 코닥 브라우니(우)>

수없이 팔린 브라우니 카메라는 세계 곳곳에서 20세기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영국의 병사 휴버트 오타웨이(Hubert Berry Ottaway)가 사용했던 브라우니 카메라가 2014년에 그의 손자에게 발견되어 그 안에 있던 필름을 현상해보니 1차 세계대전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었습니다. 1912년에 뉴욕을 출발해서 지중해로 향하던 크루즈 유람선 카르파시아(SS Carpathia)호에 타고 있던 캐나다인 베르니스 팔머(Bernice Palmer)는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생존자와 타이타닉호를 침몰시킨 빙산 등의 모습을 담은 700여 장의 사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브라우니 카메라는 사진을 소수의 전문가의 손에서 수많은 대중에게로 확산시킨 주역이었습니다.

<그림 2.7 브라우니로 촬영된 사진들>


[보이는 대로 찍히는 일안 반사 카메라 – 소호 리플렉스]

브라우니와 같이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는 여러 장을 촬영할 수 있는 필름 카트리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촬영할 때마다 일일히 건판을 갈아 낄 필요없이 빨리 촬영할 수 있었고, 건판을 갈아 낄 때 빛이 새어 들어갈 위험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카메라 뒷면에 포커싱 스크린(Focusing Screen)을 설치할 수 없어 구도나 초점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런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 바디 안에 비스듬하게 거울을 설치하여 바디 위쪽의 ‘포커싱 스크린(Focusing Screen)’에 이미지를 맺히게 하는 ‘일안 반사 카메라(Single Lens Reflex, 이하 SLR)’가 1900년을 전후로 등장하는데, 1905년에 출시된 ‘소호 리플렉스(Soho Reflex)’는 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카메라였습니다. 

소호 리플렉스 카메라는 원래 영국 리즈(Leeds)에 있는 ‘커쇼(Kershaw)’사에서 개발되었으나 런던에 있는 ‘마리온 주식회사(Marion & Co., Ltd)’를 통해 판매되면서 제품명이 소호 리플렉스가 되었습니다. 마리온 주식회사는 런던 안에서 주소지를 여러 번 옮겼는데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소호 스퀘어(Soho Square)’였으며, 이때부터 상품에 ‘소호’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2.8 소호 리플렉스 카메라>

SLR 카메라는 구도를 잡거나 초점을 조절할 때에는 반사거울이 내려와 있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포커싱 스크린으로 반사시켜 주고, 촬영할 때에는 반사거울이 위로 접혀 올라가 포커싱 스크린에 밀착되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이 필름에 맺힐 수 있게 함과 동시에 포커싱 스크린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차단해 줍니다. 

<그림 2.9 SLR 카메라의 거울의 움직임>

당시의 다른 일안 반사 카메라들은 반사거울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 진동이 크게 발생하거나 고장이 나는 문제가 있었는데, 소호 리플렉스에는 커쇼사가 특허를 낸 메커니즘이 적용되어 반사거울의 진동과 고장이 크게 줄었습니다. 소호 리플렉스는 3½ x 2½ 인치, 4¼ x 3¼ 인치, 5½ x 3½ 인치, 5 x 4 인치 등 다양한 크기의 필름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필름 카트리지가 설치되는 뒷판을 90도 회전시킬 수 있어 가로, 세로 구도를 손쉽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셔터속도는 1/16 ~ 1/800초 범위에서 동작했으며 나중에는 1/1000초까지 동작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화각대의 교환렌즈가 제공되었으며, 렌즈판이 틸트와 스윙 움직임을 할 수 있어 다양한 촬영 효과를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2.10 렌즈판의 틸트 및 스윙 움직임>

소호 리플렉스와 같은 SLR 카메라의 구조는 20세기 중반에 펜타 프리즘(Penta Prism)과 결합되어 35mm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에 적용됨으로써 35mm SLR 카메라가 전 세계 카메라의 주류가 되도록 하는 기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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