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일을 하고, 일을 마치면 눈을 감는 생활을 몇 년째 이어 왔습니다. 단단하다고 해야 할지, 단조롭다고 해야 할지, 별다른 감상 없이 그저 굳어 버렸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일, 그리고 그 일을 둘러싼 사소한 걱정들과 계획들만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연말이 되면 지난 계절들이 희미하게 흐릿해져 버린 사실에 이유 모를 공허함이 밀려왔고, 새해 아침에는 앞으로의 날들이 터무니없이 멀게만 느껴져 막막했습니다. 일상의 대부분은 밋밋했습니다.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고, 무엇을 느꼈는지도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꽤 오래도록 나 자신을 방치해 둔 셈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문득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가기로 했습니다. 어쩐지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쉬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짐을 싸고, 기차에 몸을 싣고, 편히 가보겠다며 호기롭게 3만 원을 더 지불한 특실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그렇게 휴가는 시작되었습니다. 휴가라기보다는 노동과 휴식의 경계가 거의 희미한 워케이션이었지만, 자다가도 깨서 일을 하던 나에게는 그다지 낯설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정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1인석이라 오른쪽 팔꿈치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노비의 마인드라면,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차가 도심을 벗어나 논과 밭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어둑한 객실 조명 아랫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2시간 반에서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급한 업무와 씨름하느라 지루할 틈조차 없었습니다.
잠깐쯤은 바깥 풍경을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차는 어느덧 멈춰 서 있었습니다. 휴가의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객실 안 여정은 그렇게 슬그머니 끝나 있었습니다.
복잡한 플랫폼을 빠져나와 호텔 방에 짐을 두고 나서야 비로소 뻐근하던 허리와 목을 쭉 펼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정말로 어딘가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는 순간, 마침내 휴가가 시작됐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짭짤한 바람 맛에 생기 있게 되살아나는 입맛이 스스로도 조금 측은했습니다.
아마 그동안 스스로를 꽤 몰아붙였던 모양입니다. 영혼을 너무 오래 굶겼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음 옆구리에서 잘 발라낸 생선 가시처럼 앙상한 갈비뼈가 만져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억났습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습니다.
항만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동네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한 자리에서 수십 년을 버텼다는 가게, 3평 남짓한 공간에서 갓 나온 음식은 따뜻했습니다. 한 술, 한 술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문득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습니다. 그녀가 갓 딴 토마토를 와사삭 베어 물거나, 평상에 앉아 샌드위치를 멍하게 씹는 장면이 특히나 나의 식욕을 자극하곤 했습니다. 정작 나는 토마토도, 양배추 샌드위치도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 장면들만 모아둔 짧은 영상을 몇 번이고 되돌려 보곤 했습니다.
나는 비좁은 도시에서, 그보다 더 좁은 방 한 칸에서, 팔 하나 길이의 모니터와 두 뼘 남짓한 키보드 사이에서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것들과 씨름하느라 뭐가 부족한지도 모른 채 허기를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1인분 같은 3인분을 내밀었고, 모두가 정해진 시간 안에서 경주하듯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나는 늘 뒤처졌고, 언제나 숨이 찬 상태로 덜 먹으며, 덜 채우며 지냈습니다. 식욕도, 감정도 점점 무뎌졌고 그 무뎌짐마저 일상이 되었습니다. 마음까지도 숨죽여 굶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아차렸습니다.
리틀 포레스트의 그녀 역시 나처럼 영혼이 허기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끌렸던 것은 그녀가 먹고 있던 음식 자체라기보다, 그녀가 진정한 의미의 식사로 속을 천천히, 또 든든히 채워나가는 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나에게 묘한 만족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행 내내 한 술 가득한 밥을 우물거리는 나에게 '잘 먹으니 보기 좋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담긴 마음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살려면 붙들어야 하는 마음, 놓치지 말아야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영혼이 조금 든든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