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등이 뜨기 전에 멈추기(feat. 퇴사)

by 욘킴


이미지 출처: https://v.daum.net/v/qpAkhz3Gk8
"자동차 계기판 아랫부분에 표시되는 주전자 모양은 엔진오일 압력 경고등이다. 경고등이 깜박거리거나 계속 켜져 있을 때는 엔진오일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차를 세워 두고 5분 정도 지난 상태에서 오일량이 부족하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 출처: 매일경제 [최기성 기자의 유레카] 건강한 車 겨울나기, 계기판에 달려있다 (https://www.mk.co.kr/news/business/5887790)



자동차의 엔진은 셀 수 없이 많은 금속 부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마찰 덩어리입니다. 엔진오일은 엔진 내부에서 금속과 금속 사이에 얇은 막을 형성하여 직접적인 마찰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오일이 부족하면 이 막이 깨지며 마찰열이 발생하며, 최악의 경우 열기를 견디다 못한 부품끼리 눌어붙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지만 차량은 겉으로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운전자가 바로 이상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차량에는 계기판이 있으므로, 이상 신호는 계기판의 각종 경고등으로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빨간 주전자 모양의 경고등'은 엔진오일의 보충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 경고등이 켜진 순간은 이미 엔진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뜻이라고요. 당장 주행을 멈추고 엔진 오일을 보충해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계기판의 경고등, 정체 모를 매캐한 냄새라던지 평소와는 다른 낯선 소음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대로 둔다면 언제든 도로 한가운데에서 차가 퍼지는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평소 차량이 보내는 신호를 면밀히 살피고, 고장이 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나의 소중한 차를 안전하게 몰 수 있고, 오래오래 탈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4년 간 IT 회사에서 고객들의 기술적인 문제와 클레임에 대응하는 일을 했습니다. 업무 특성상, 언제든 대응할 수 있는 상태로 지내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시간이 아니더라도, 휴가를 가더라도요. 문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었고, 대응할 사람은 언제나 필요했습니다. 기술적 결함이든, 복잡한 호환성의 문제든, 단순히 휴먼 에러(?)든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밥을 먹을 때도, 퇴근을 해도, 침대에 누워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주말과 휴가는 노트북과 함께였습니다. 엥,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나요? 네, 살 수 있더군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연락을 받는다는 건, 고객도 그 시간에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메신저는 365일 온라인, 전화, 메일, 온라인 미팅, 오프라인 미팅, 가능한 모든 연락수단을 동원한 커뮤니케이션이 매시간 오고 갔습니다. AI를 본격적으로 업무에 활용하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프롬프팅까지 추가된 상태로 말이죠.


문제는 이렇게 지내면, 전혀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별 문제없던 일상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동안 쏟아진 수많은 콘텍스트는 밤이 깊도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 언제든 생길지도 모르는 미연의 문제.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정보의 과부하가 계속 이어지니, 정보 자체에 피로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이라도 갈라 치면, 티켓을 예약하는 단계에서 이미 탈진, 영화는 러닝타임만 보아도 한숨이 나왔습니다. 조작법을 새로 익혀야 하는 게임, 전자기기, 악기도 싫어졌습니다. 이 모든 흔한 여가 생활은 저에게는 또 다른 정보의 과잉일 뿐이었습니다. 일에서 얻은 정보만으로도 이미 한계 용량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차단하며 지내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음, 그렇다면 욘킴님 일은 잘했나요? 네. 매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일을 했습니다. 누구라도 쉼 없이 일을 하면 '일은' 잘할 수 있습니다. 일만 생각하니까요. 정작 삶은 잘 살지 못하겠지만요.


그런데 슬슬 적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몸과 마음에요.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 증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온몸이 가려웠습니다. 허리와 목디스크는 매일같이 저를 괴롭혔고요.


허리: "안 쉬어? 쑤실게"

목: "안 쉬어? 두통으로 발전할게"


마음 편한 식사가 없다 보니 끼니는 거르기 일쑤였고, 체중이 날로 줄었습니다. 기억력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상적인 대화 중에 방금 전에 들은 내용을 곧잘 까먹는다던지, 어제 먹은 점심 메뉴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니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저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남들의 문제'가 우선이었습니다.


"욘킴님,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급한 건이라서요"

"욘킴님, 메일 보셨어요? 가능할까요?"

"욘킴님, 지금 긴급 미팅인데 참석 가능하세요? 고객이 센티먼트가 나빠요"


생산의 굴레는 여지없이 굴러갔습니다. 아프면 약을 먹고, 배고픔은 무시하고, 주말은 반납하고, 휴가는 미뤘습니다. 저는 비쩍 마른 햄스터 같은 몰골로 계속해서 챗바퀴를 달릴 뿐이었습니다.


그 무렵 매니저와의 면담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매니저: "잘하고 있어, 욘킴! 계속해서 지금처럼만 해."


계속해서 지금처럼만 해, 계속해서. 봄이 끝나고 여름을 지나는 동안에도 쉼 없이 달리며 그 말을 계속 되뇌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저는, 지나가는 사람이 물구나무를 선 채로 보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정신적인 과부하 상태였습니다. 눈은 퀭하고, 얼굴빛은 회색이고, 늘 일에 대한 얘기만 했으니까요. 게다가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여가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선 온몸에서 다크 한 오라가 풍깁니다. 사는 재미가 없으니까요.


질문에 다시 대답해 보겠습니다. 엥, 사람이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다고요? 네, 살 수 있습니다. 단, 그렇게 살 수 있는 유효기간은 아주 짧습니다.


다시 차 이야기로 돌아가서, 빨간 주전자 모양의 엔진 오일 경고등이 점등된 이후 가능한 최대 주행 거리는 몇 km일까요? 이론적으로는 3-5km를 더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일 공급 없이 엔진이 계속 회전하면 내부 온도가 순식간에 수백 도까지 치솟습니다. 단 1-2분 만에도 엔진이 완전히 눌어붙어 폐차 수준의 손상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고등이 점등되면 즉시 주행을 멈추고, 보험 서비스를 통해 차량을 견인하는 것이 정석적인 권장사항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에 경고등이 점등된 이후로도 1년을 더 달렸습니다. 휴가 대신 성과를 내고, '잘하고 있어, 계속해서 지금처럼만 해'를 주문처럼 외며 자기 효능감에 매달렸습니다. 매 월 1일엔 말일까지만, 월요일엔 금요일까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멈추기를 유예하며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그러다 작년 7월, 저는 결국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내면의 신호를 무시하고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결과였습니다. 번아웃이 온 것입니다.





7월, 흐리고 비가 내리는 덥고 습한 일요일이었습니다. 저는 '왜 살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멍청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먹기 싫고, 아무것도 보기 싫고, 아무 데도 가기 싫었습니다. 언제든 누가 말을 걸지 않을까, 애증의 메신저 불빛과 함께 몇 시간이고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날따라 연락은 없었고, 빗소리도 지겨워질 무렵,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느니 뭐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일 없으면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좀 쉬어라"라고 말했지만, 어떻게 쉬어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쉬지도 못하는 이상한 주말. 글쓰기는 괜찮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쓰기는 또 다른 정보의 입력이 아니니, 부담스럽지 않았거든요. 내 안에 것들을 밖으로 뱉어내면 좀 쉬는 것 같지 않을까? 생각을 출력한다는 점에서 생산성도 있고요.


키보드를 바짝 당겨 온 뒤, 잠시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려는 건 일종의 스트레스를 배출하는 글쓰기였습니다. 좋게 말해야 배출, 솔직하게 말하면 배설이나 다름없는 글쓰기가 될 것이 너무나 자명했습니다. 그런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쓰지? 그 무렵, 저는 세상에 종말이 닥치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내일이 마지막이라면, 내일 진짜로 세상이 망한다면 어떨까,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는 상상 말입니다.


예상할 수 있는 저의 마지막 날은 너무나도 안 돼 보였습니다. 거의 십중팔구 끼니도 거른 채 노트북과 씨름하며 밤새도록 일만 하는 모습일 테니까요. 가족들과 식사 약속도 마다하고, 나만 보면 야옹거리는 고양이도 외면하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 요즘은 어떤 책과 영화와 음악이 나왔는지, 세상엔 어떤 좋은 일이,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도 깡그리 무시한 채로 말입니다. 종말의 모습은 닥치지 않아도 눈에 훤했습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그런 결말이 저의 결말이었습니다.


저는 메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내일 당장 무너진다면, 나는 뭐가 가장 아쉬울까?"



[종말을 연습하며]는 그렇게 연재하게 된 글의 모음입니다. 연재라는 단어가 주는 거창함에 한참을 못 미치는 그저 그런 토막글들을 모아놓은 브런치북이지만, 저로써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테라피적(?) 글쓰기라는 점에서 그렇고, 일주일에 최소 한 편씩 총 15화를 목표로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비록 일에 치여 슬쩍 건너뛴 날도 있지만, 7월부터 11월까지 꾸준히 써보았습니다.


규칙적인 글쓰기는 나와의 약속이라던지, 작가가 되기 위한 훈련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배출하는 목적이 가장 컸고, 글을 쓰는 하루 30분 남짓만큼은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소개 글의 첫마디는 이렇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나는 그게 조금 아쉽다."


매일같이 종말을 연습하는 기분으로 쓰는 글. 글쓰기는 생각보다 휴식의 효과가 좋았습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무언가 해소되는 기분도 들고, 밀도 높은 휴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금씩, 때로는 메모하듯이, 때로는 중얼거리듯이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한 주 한 주 쌓인 글은 어느덧 15화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5화를 마칠 무렵에도 마음 한 구석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답답한 기분이 남아있었습니다. 사실 15화는 연재를 마치는 에필로그로 쓰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이 모든 걸 왜 썼는지,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두 편을 더 썼습니다. 연재는 17화에서 마무리되었지만, 에필로그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종말을 연습하며]의 에필로그로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나는 작년의 낡은 노트에서 이런 메모를 찾았습니다. (악필 주의!)

그것이 내가 지닌 유한한 생명의 끝이던, 관계의 마무리이건, 감정의 소멸이건, 어떤 형식으로든 아직 닥치지 않은 종말이란 문제가 일상 속에서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가정 하에 나는 덜 울적할 수 있었고, 덜 매달릴 수 있었다.

언제든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는 사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것이 나의 20대의 전부였다면, 30대는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일에 온 마음을 썼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 종말을 연습해 온 것이다.


아마도, [종말을 연습하며] 시리즈에 의미를 부여하려던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괜히 진지하고, 장황한 말들을 늘어놓긴 했지만, 글을 쓰며 내가 받았던 위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줍니다.


글을 쓰는 동안 평소보다 덜 울적했고,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일들을 놓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울면서 썼던, 신나서 썼던, 담담하게 썼던 모든 순간의 글 안에서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쓰기'라는 행위를 택했지만, 나에게는 훌륭한 휴식의 공정이었습니다.






연재를 마치고 두 달이 지난 지난 1월, 저는 결국 다사다난했던 회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올해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일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더 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방전이 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에 경고등이 들어온 이후로 1년을 더 버텼으니까요. 그마저도 절반은 글쓰기로 버텼다고 생각합니다. 진작 멈췄어야 하는데, 어찌 보면 글쓰기까지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탱했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퇴사 하루 전까지도 멈추지 않고 액셀을 밟았습니다. 인수인계에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 대가로 퇴사 직후 열흘이 넘도록 지독한 몸살에 시달렸습니다. 엥? 퇴사를 했는데 아프다고요? 원래 아팠던 것도 다 나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네, 아니더라고요. 저도 알고 싶지 않았는데, 퇴사를 하면 아픕니다. 마치 몰아서 아프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퇴사 몸살] 편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까진 꼬박 두 달이 걸렸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마음의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마음의 계기판에 경고등이 처음 들어온 날 이후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엔진이 다 타버릴 때까지 조금도 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적절한 휴식만으로도 충전할 수 있었던 타이밍을 모두 외면하면서, 제게 남은 것은 번아웃이란 이름의 탈진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보내는 휴식의 신호를 점검하는 것은 마음의 계기판을 면밀히 살피는 일과 같습니다. 어디에 경고등이 들어왔는지, 언제 어떻게 쉬어야 할지를 잘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걸 못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뒤처지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거든요.


하지만 내가 잠시 쉬더라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나라는 사람은 고장 나지 않습니다. 휴식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정비입니다. 저처럼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서지 않도록, 중간에 샛길로 빠지더라도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질주하더라도, 더 멀리 가기 위해 나를 돌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힘든가요? 쉬세요. 저는 이제 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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