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밤새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기어이 블라인드 널 사이로 새벽녘의 푸른빛을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침 해가 뜨기 직전이었습니다. 잠은 영영 놓쳐버렸고, 이불은 더 이상 안락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누워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등산을 하자, 곧장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윈드 재킷을 걸치고 스니커즈에 두 발을 구겨 넣었습니다.
현관문을 열자 냉장고를 연 듯한 서늘함이 몸에 감겼습니다. 멍하고 착잡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또렷해졌습니다. 나는 첫차를 알리는 전차의 경적 소리를 신호탄 삼아 등산로로 향했습니다.
요 며칠 봄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 날씨였는데, 활짝 만발한 샛노란 개나리 군락이 등산로 정상을 향해 이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중간중간 멈춰 서서 스마트폰 하나만 달랑 쥐고 나온 손을 개나리로 뻗었습니다. 개나리를 좋아해서라기보다, '봄이 오긴 왔다'는 소식을 챙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이 소식을 모르는 엄마에게 전해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성에 찰 만큼 예쁘게 나오지 않았지만, 그 안엔 분명 봄이 담겨 있었습니다.
헐떡이며 정상에 도착했을 때도 아직 해는 뜨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은 팔각정 주변을 활기차게 조깅하거나 해가 뜰 방향을 바라보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자 하얀 디지털 숫자가 6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을 보여줬습니다. 화면 불빛이 꺼지면서 퀭한 눈을 한 나의 얼굴이 어두운 액정 안을 꽉 채웠습니다. 나는 아직도 어제의 연장선상에, 다른 이들은 오늘의 시작에 있었습니다. 푹 자고 일어난 이들이 도착한 산꼭대기, 밤새 불안이라는 독소를 쏟아부은 내가 도착한 산꼭대기. 우리는 같은 산꼭대기에서도 각자 다른 곳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결벽적으로 똑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 헛둘헛둘 운동을 하는 세상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칩니다. 반면 모든 이가 퀭한 눈을 한 채로 산꼭대기에 모여 있었다면 을씨년스러웠겠죠. 당장 누구 하나 좀비로 변해 옆 사람을 물어뜯거나 뛰어내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른 아침 루틴 대로 등산을 나온 사람, 그냥 개나리가 좋아 나온 사람, 무언가를 비장하게 다짐하러 나온 사람, 그리고 밤을 지새우고 난데없이 해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 한데 섞여 있을 때, 세상은 비로소 그럭저럭 봐줄 만한 풍경이 됩니다. 나라는 사람도 그런 풍경을 완성하는 조각 중 하나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와아-, 누군가 감탄하는 소리에 활기차던 움직임들이 멈췄습니다. 성수대교 너머에서 손톱 만한 핑크빛 구체가 고개를 내민 것입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곳을 향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찰칵거리는 디지털 셔터를 터뜨렸습니다. 핑크빛 구체가 담긴 하늘은 순식간에 9:16 비율로 쪼개지더니 디지털 화면 안으로 조각조각 복제되었습니다.
구체는 보이지 않는 공중 승강기를 타고 머리 위로 곧게,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핑크빛, 오렌지빛, 노란빛, 하얀빛으로 상승하면서 밤새 온 도시와 나의 눈 밑에 머물던 푸른 그림자를 쏘아 없앴습니다. 새로운 아침을 이식하는 해, 어제와 오늘 사이의 시차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뭉클한 감정이 해와 함께 몽글몽글 피어오르려는데, 문득 옆사람의 존재가 느껴졌습니다. 혹시 이런 나의 감정이 들키진 않았을지 괜히 머쓱해져 헛기침을 두어 번 했습니다. 타인에게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전혀 알려주고 싶지 않기도 한 그런 사적인 감정 말입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멈춰 선 뒤에도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더 있으려는 걸까요? 더 있으면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될까요? 어떤 말을 주고받을까요? "오늘 해가 참 멋지죠?" 라던지, "저는 출근 전에 항상 등산을 합니다" 라던지. 그 와중에 "저는 사실 밤을 새우고 나왔는데요, " 라며 불쑥 끼어드는 나의 모습도 상상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산꼭대기엔 서로의 삶에 그 정도 관심을 건넬 만큼의 넉살은 없습니다. MBTI N에겐 조금 심심하고 I에겐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인 결말입니다. 나는 낯선 호기심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돌아 내려가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