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kim radio (20260317)

by 욘킴

yonkim radio


(1)
어릴 때는 흐린 날을 좋아했습니다. 그냥 마구잡이로 흐린 날이 아닌, 비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아직 먹구름이 가시지 않은 채 지표면에 가까이 고여 있는 그런 날 말입니다. 물기 머금은 공기가 떠다니는 먼지를 바닥으로 짓눌러, 오히려 평소보다 세상의 윤곽이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날. 시야는 빌딩 숲 너머까지 깨끗하고, 도시의 모든 것이 푹 젖어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그런 날. 나는 그런 날을 투명하게 흐린 날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정확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맑게 닦인 유리처럼 투명한, 온 세상이 회색 조의 이불을 덮어 놓은 것 같이 흐린, 물 젖은 벽돌과 아스팔트 바닥에선 선명한 비린내가 피어나는, 하지만 그것들을 애써 설명하려 들면 신선하던 감각들이 금세 시들해졌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의 피부를 걷어 날것 그대로의 감각을 그들의 몸에 발라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2)
그 무렵, 나는 나와 비슷한 타인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투명하게 흐린 날' 이면 레인부츠를 잘박거리며 젖은 잔디를 밟고 서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분명 있으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감성을 홀대하지 않는 사람들, 기나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 나는 그들의 실루엣을 발견하기만 하면 서로 스미듯 포개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긴긴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3)
우리는 흔히 곁에 누군가 없어서 외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타인과 섞인다는 건, 서로의 외로움을 끼얹으며 만드는 파동을 소통이라고 착각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혼자여도,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어도, 외로움은 항상 옷자락을 적신 채로 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보통날보다 조금 더 마음이 눅눅하더라도 '아, 역시 인간은 결국 혼자야'
라며 새삼 서글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4)
우리는 본질적으로 혼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섬에서 뿌연 안개 너머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이따금씩, 어쩌다 한 번씩, 우리의 주파수가 수면 위를 가르고 기적적으로 겹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고깃고깃한 노이즈를 자연스럽게 나누면 됩니다. 때론 서로의 젖은 옷자락을 매만져주며, 때론 그저 인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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