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맥케이(George Mackay)(1)
<하우 아이 리브(How I Live Now)>(2013, 감독: 케빈 맥도날드)
<캡틴 판타스틱(Captain Fantastic)>(2016, 감독: 매트 로스)
<런던 프라이드(Pride)>(2014, 감독: 매튜 위처스)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캡틴 판타스틱>의 첫째 보데반은, 정말 ‘첫째 같은’ 모습이었다. ‘첫째 같다’. 딱히 사용하고 싶은 표현은 아니었다. 헌데 보에겐, 왠지 그 말의 소유권을 주고 싶었다. 독립적이고, 동생들을 챙기고, 부모 말을 웬만하면 따르지만 마냥 순종하지는 않아서, 잘 참다가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어른스러우나 어른 같지는 않은. 조지 맥케이의 연기도 그랬다. 풍부하고 능숙한데,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풋풋함이 엿보였다.
관심 있게 지켜봤던 정도의 배우였는데, 연기를 따기 위해 찾아본 작품들에서 진짜로 ‘놀랄 만큼’ 깊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서, 글을 쓰다 팬이 돼버렸다. 현실적이지만 일상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 놓인,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있는 인물들을 주로 맡아, 집중력 높은 연기로 감정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적절히 드러냈다. 그를 처음 만난 <캡틴 판타스틱>과 그 이전에 찍은 작품 둘, 이후 비교적 최근의 작품 둘로 나누어 그 매력을 살펴봤다. 앞부분에서 묘사할 에디, 보, 조는, 의심의 여지없이 바르고 곧은 에너지를 내뿜는, 그 자신은 흔들리고 갈등을 겪어도 인물에 대한 관객의 판단에는 혼란을 주지 않는 인물들이다.
조지 맥케이의 데뷔작은 <피터팬>(2003), 당시 그는 열한 살이었고, 이후 긴 공백기를 보냈다. <하우 아이 리브>(2013)는 그가 앞으로 쌓을 촘촘한 경력의 길을 열어 준 작품이자, ‘첫째’ 필모그래피(?)의 시작점이었다. 에디는, 이어 설명할 인물들과는 다른 성격의 캐릭터, 주인공 데이지에게 영향을 주는, 이미지적 대상의 역할이다.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런던 프라이드>보다 한 해 먼저 완성된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보다 한껏 어른스럽다. 무게 있고, 주변 사람을 잘 챙기는, 보와 비슷한 ‘첫째’ 느낌이지만, 보다 안정돼 있다.
에디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동물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특수한 설정의 소년이다. 신비롭고 통달한 듯한 분위기를 내뿜어야 한다. 반쯤은, 속세에서 떠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분위기는 단순히 겉모습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든 어떻든,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눈은 차분하게 내리깔고, 바른 자세로 성큼성큼 걷는다. 입보다는 이마나 눈으로 말한다. 말보다 몸이 먼저다. 성급하다는 뜻은 아니다. 직관적이고, 진중하다.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드물게 열리면, 본래보다 한 톤 낮춰 부드럽게 힘을 준 목소리가 들린다. 이를 테면 데이지를 잡고 물에 뛰어들며 하는, ‘그 규칙 다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통달한 말투가 밝게 몽환적인 화면/사운드 연출과 어울린다.
에디일 때, 조지 맥케이의 연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데이지를 향한 눈길이다. 제목 ‘How I Live Now‘ 의 ‘I’는 물론 화자 데이지고, 에디는 로맨스 대상이다. 전쟁 전에는 마음을 열어 사랑에 빠트리고, 전쟁 후에는 삶의 목표가 되는 존재다. 데이지의 시선으로 ‘보이는’ 인물이지만, 데이지를 ‘보는’ 존재 이기도 하다. 그 시선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응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응시가 되어야 한다.
에디는 차를 타고 가는 데이지의 시선으로, 스치듯 처음 등장한다. 찰나지만, 심각한 얼굴과 손에 앉은 매가 인상에 남는다. 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린 데이지에게 달려드는 개를 떼어놓는다. 머릿속으로 온갖 규칙을 굴리는 데이지를, 인사 없이 빤히 보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몸을 돌린다. 이튿날 아침에도 싱크대에 기대 물을 마시는 내내 사로 잡힌 듯 눈을 떼지 않는다. 웃음기 없이 심각하다. 허나 전날의 약간 거슬린다는 듯한 뉘앙스 대신 살짝의 연민과 흥미가 들어서 있다. 데이지가 날카롭게 반응하는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말 한마디 없이 빤히 보는 것이 기분 나빠서지만, 사실은 속을 전부 들킨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다친 매를 안전한 곳에 넣어 줄 때, 소를 쓰다듬으며 속삭일 때는, 마주한 존재에게만 온전히 집중한다. 데이지의 다친 손을 반사적으로 물 때도 비슷하다. 허나 그 후 흐르는 긴장감은 다르고 특별하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후, 모두 함께 둘러앉아 있을 때, 데이지를 향하는 눈길은 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심각하지는 않으나 진지하다. 은근히, 대놓고 응시한다. 뺨은 촛불에 빛나고, 눈은 부드럽게 이글거린다. 입꼬리는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다. 깊은 눈빛이 영혼을 꿰뚫는 것 같다. 마음을 읽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능숙한 로맨틱이 담겨 있으나, 진심 또한 가득 두근거리는 얼굴이다.
데이지가 미국으로 갈 기회가 생기고, 에디는 장작을 힘주어 팬다. 감정을 분출하기보단 억누르는 동작이다. 데이지가 다가가자, 차오르는 숨이 그대로 묻어나는 소리로, ‘네가 안전하게 돼서 기뻐’로 시작하는 몇 문장을 늘어놓는다. 진심과 거리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안전하게 돼서 기쁜 것은 진심이나, 헤어져야 하므로 화가 나는데, 그 화를 상대에게 터트리지 않기 위해, 또 정을 떼기 위해 거리를 둔다. ‘우린 여기 머물 거야’에서는 그 거리가 가장 길어지며, 견고한 의지가 들린다. 오히려 헤어지는 순간 분노하거나 절박하게 외치는 연기는, 물론 적절하고 뛰어났으나, 아주 특별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에디일 때 조지 맥케이의 연기의 핵심은 ‘하지 않을’ 때 있었다. 굳이 감정을 과시하지 않아도, 대사를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살갑지는 않으나 편안하고 의지가 되는, 뜨겁기보단 따스한 사랑을 나눴던 존재. 에디는 숲, 촛불, 헛간의 짚 침대 등과 함께 점점 데이지의 기억 속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아주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고 나서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전과 달리 어깨를 푹 숙이고, 종종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려 허공을 본다. 한껏 움츠려 앉아 무릎을 세우고, 어깨보다 팔꿈치를 좁혀 허벅지에 얹은 채, 쭉 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숙인다. 세상을 차단하는 제스처다. 그 몸의 형태에서, 겪었을 고통이 짐작된다-아니 짐작되지 않는다,가 더 맞는 말이겠다. 변치 않는 분위기가 핵심이었던 캐릭터가, 그것을 잃은 채 다시 등장했을 때, 그 과정을 작품이 말해 주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상태를 감정적으로 납득시키는 것은 배우의 몫이다. 대사 하나 없이 조지 맥케이는 해낸다. 전개의 구멍을 다 메우는 데엔 한계가 있었으나, 설명 없이 어느 정도 설득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정원을 가꾸며 꽃을 꺾으려다 멈추고는 스르르 일어선 에디는, 데이지의 기척을 느끼고 몸을 살짝 돌리려다 모른 척 다시 땅을 본다. 전처럼 아주 차단하고 있지는 않으나, 머뭇거린다. 똑바로 눈을 맞추지 못한다. 이번에는 에디의 다친 손을 데이지가 문다. 여전히, 에디는 무표정이고, 마음 어딘가에 매듭이 묶여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무의식이 기억하는 듯, 서서히 데이지에게 반응한다. 기적적인 회복보다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키스는 조심스러워 더 벅찼다. 조지 맥케이는 그 희망적 경계의 지점을 섬세하게 찾아 표현한다.
어디서 본 듯한 설정만 가득하고 까닭은 알려주지 않아 깊은 느낌이 드는 작품은 아니었으나, ‘이걸 가지고 이 정도로?’ 하는 놀라움을 주는 시얼샤 로넌의 연기, 그리고 그를 서포트하는 조지 맥케이의 눈빛 만은 깊었다. 당시 두 배우의 풋풋한 케미만으로, 작품의 존재 이유는 충분했다.
다시, <캡틴 판타스틱>(2016)으로 돌아와, 이번엔 입체적으로 속을 전부 드러내는 보를 만나보자. 얼굴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입을 단단히 다물고 앞을 응시하는 보의 눈은 곧다. 동생들을 챙기고, 아빠의 신념을 그대로 이어받은 장남. 첫 이미지는 그랬다. 기타를 치며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놀 줄도 안다. 적당히 무난하게, 바르고 똑똑하고 자신 있어 보였다. 헌데 그 자신감은 또래 여성들을 가게 문 앞에서 마주쳤을 때 싹 사라지고 만다. 뺨은 붉어지고, 숨이 막히는 듯 입은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벌건 얼굴 그대로 괜히 아빠에게 화풀이하듯 늘어놓는다.
그 부끄러움과 긴장은 클레어를 만나 색을 더해 첫사랑이 되고, 구체적인 형태의 자기혐오와 분노로 번진다. 조지 맥케이의 연기는, 그 과정을 설명 없이 설득한다. 수련 체조를 하다 클레어가 말을 걸자 벌떡 일어나 뒤돌아 셔츠를 입는다. 더듬지 않고 대답은 하는데, 말투가 화난 듯 딱딱하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턱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마는 인상 쓴 채, 뺨은 광대를 세운 채, 입은 살짝 벌리고 어색하게 윗입술을 내민 채, 전부 굳어 있다. 잔뜩 긴장해 근육이 통제되지 않아 스스로의 표정을 알지 못하며, 짐작할 겨를도 없다. 수영장에선 긴장이 약간 풀려, 클레어가 웃을 때마다 따라 웃지만, 웃음의 까닭은 알지 못해 약간 의아함이 묻어난다. 클레어가 스타트렉을 언급하는 순간, ‘나도 안다’고 대답하고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일 때, 수영장 물에 반사된 푸르스름한 빛에 드러난 옆얼굴에서, 다름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 엿보인다. 어색함은, 엄마에 대해 묻자 잠깐 사라진다. 상대로부터 오는 긴장을 잊을 정도로 강하고 어두운 감정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허공을 응시하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톤이 오르내린다.
당연히 장면의 시선은 보의 것이지만, 인물의 특수성 때문에 클레어에 이입해 보를 관찰하게 된다. 엄마가 정부 요원이라는 말은, 틴에이저의 흔한 장난-상대도 아는 뻔한 거짓말을 짐짓 진지하게 해 실없는 컨셉으로 분위기를 푸는-이 아니라, 슬픔을 들추고 싶지 않아 나온 자기 방어다. 클레어는 모르기 때문에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웃는데, 무의식 중에 어딘가 다름을 감지하며 독특한 매력을 느낀다. 관객은 그 끌림을 이해하면서도, 클레어가 알지 못하는 보의 서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픽션에서는 일상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 자주 등장하므로, 드문 경우는 아니다. 허나 특이한 기분이 들고 만다. 적당히 개성 있는 캐릭터 설정을 탁월하게 살린 연기 때문이다. 태어나 처음 겪는 상황과 감정, ‘틴에이저다운’ 연애 감정에 덧붙은, 지적/신체적 능력과 대비되는 어설픔을 연기하는 조지 맥케이의 매력은, 특이하고도 특출했다. 키스하고, 숨을 몰아쉬다, 괜찮냐는 말에 배시시 웃는 보데반. 그의 부모가 지어 준 이름처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보적인 매력의 존재.
무릎을 꿇곤, 높고 불안정한 톤으로 말을 늘어놓는다. 한쪽 눈썹이 올라가기도 하고, 눈이 아주 커다래지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 클레어의 손을 잡고 “Will you be my wife?”라고 물으며 아주 분명하고 곧은, 사랑과 신념이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한다. 에디가 데이지를 볼 때의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로맨틱이 아닌, 숨 막히는 들뜸이다. 클레어와 그녀의 엄마는 웃음을 터트리고-비웃는 정도도 아니고 그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장난쯤으로 받아들인 듯-, 보는 또 의아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따라 입꼬리를 올린다. ‘귀여워서 봐준다’는 투의 반응과 함께 두 사람이 캠핑카로 들어가자, 홀로 남겨진 보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진다. 그대로 정지해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린다. 붕 떠 있는 듯 어색한데 동시에 우울한 동작이다. 통념 상으론 농담 같은 상황, 실제로 겪었더라면 나도 클레어와 같은 표정으로 웃었을 만 한데, 조지 맥케이가 이제까지 보를 마음속에 가득 들여놓았기 때문에, 그 진심이 너무나 와닿아 버린다. 안타깝고 부끄러워진다. 벤이 원망스러워진다. 벤은 자신의 신념대로, 똑똑하고 강하고 독립적이고 개성 있게 여섯 남매를 키웠다. 허나 의도치 않게 자신이 겪었던 것들, 맺었던 관계들로부터 자기 아이들을 차단했다.
아빠는 틀렸다, 위험하다, 는 동생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일그러진 얼굴로 있다가, 결심한 듯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대학 합격 편지를 가지고 나온 보. 벤에게 툭 던지고 전에 없이 차분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한다. ‘잘했다’는 벤의 말에, 눈썹이 쭉 올라가 의문스러운 듯 ‘고맙다’고 했다가, 뒤이어 비꼬며 ‘날 속였냐’고 하는 벤에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톤은 약간 올라갔지만 여전히 차분하게, 부인하고, 설명을 시도한다. 보는 고민하고 고민했다. 아빠에게 무조건 ‘대드는’ 게 아니라, 자기 속을 한참 썩인 다음에 겨우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럼에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그것마저 튕겨나가자, 결국 스스로를 ‘freak’ 이라 표현하며 잔뜩 벌게진 얼굴로 자신에 대한, 자신을 그렇게 키운 아빠에 대한 화를 내지른다. 자신과 가족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폭발이기도 하다.
십 대의 일시적인 반항으로 치부할 순 없다. 보는 사실 아빠의 세계를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 만은 않았다. 벤의 교육 방식을 따랐으나 가치관은 스스로 확립했고, 자본주의 세계를 비판하며 ‘모택동주의자’라고 하지만, 겪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과 동경, 두려움도 품고 있다. 조지 맥케이는 갈등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않았을 시기에도 경계에 있는 얼굴들을 쌓아 놓음으로써, 인물의 행동과 스토리 전개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필름을 뒤로 약간 돌려보자. 엄마의 자살 소식을 듣고, 모두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있다. 대부분 흐느끼거나 엉엉 울고, 기둥을 칼로 찍으며 내지르는 아이도 있다. 보는 얼굴이 붉어지며 울먹이려다, ‘nothing is going to change’라는 아빠의 말을 듣고는 입을 벌린다. 울음이 터져서 인지, 기가 막혀서 인지 알 수 없다. 잔뜩 울상이 되어 울음을 뱉어낸다. 이후 종종, 입은 꾹 다물고 눈을 불안하게 확장시킨 보의 얼굴을 목격하게 된다. 대학에서 온 합격 편지를 보고 밝게 미소 짓다가, 이내 허공을 응시하며 어두워지는 순간처럼, 대놓고 복잡함을 클로즈업하는 장면 외에도, 스쳐 지나가거나 배경에 잡힐 때 미묘하게 붕 떠 있는 뉘앙스가 들 때가 있다.
어쩌면 보는 작품과 관객을 이어 주는 존재다. 아빠와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보의 상황은 특수하지만, 겪는 감정은 보편적이다. 허나 다시, 보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조지 맥케이는 그 경계를 정확하게, 그러니까 그 확실하지 않음을 정확하게(무슨 말인지 알려나) 붙잡아 꾸밈없는 얼굴로 드러냈다. 공감하면서도, 그만의 것임을 존중할 수 있도록.
앞으로 학교를 다니며 어느 정도 주류 세계에 적응하며 자랄 동생들과 달리, 보는 이미 그 ‘기회’를 놓친 채 익숙지 않은 환경에 뛰어들게 됐다. 그의 동그랗고 맑은 눈을 보면, 불가피한 충격들에 그 빛이 어떻게 변할지 매우 걱정되면서도, 그 순수함에 빠져들게 된다. 어떻게든 아빠의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건강하게 지내리란 믿음이 생긴다. 조지 맥케이의 보는 그만큼, 이상하고 예외적으로 매력적이고 믿음직스러웠다.
주류 세계를 만난 비주류적 인물 보와 달리, 조는 주류적 환경만 겪다 비주류 세계를 만나며 자신을 찾는 인물이다. <런던 프라이드>(2014)는 지향하는 바, 주인공이 결국 선택할 바, 맞서야 할 것들이 <캡틴 판타스틱>보다 어떤 면에서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물리적/정신적 폭력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결국 마음속에 기둥을 세우고 그것들에 맞서기로 정한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120BPM>(2017)과 마찬가지로 실재했던 소수자 운동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 실존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는 이 작품의 중심에, ‘조’라는 허구의 인물을 배치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클로젯이었던 그가 사람들을 만나고 점차 스스로에게 당당해지는 과정을, LGSM 활동과 매치해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다. <120BPM>의 한 축을 나톤과 션의 러브스토리가 차지하듯, <런던 프라이드>의 한 축은 조의 성장 스토리가 차지한다.(물론 연출 스타일이 달라 그리는 방식이 다르고, 둘 다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조는 나톤과 같은, 관찰자적 주연, 처음 운동에 발을 들여놓고 영향을 받는 인물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조는, 아빠가 준 카메라를 보고 수줍게 기뻐하고, 엄마가 다려 준 청바지를 입는, 곱게 자란 어리숙한 모범생이다. 아마 게이가 아니었다면, 적당히 평탄한 가부장적 중산층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시계를 보는 순간부터, 허물없이 어리버리한 얼굴엔 긴장이 들어선다.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묻어난다. 목을 쭉 빼고, 튀어나온 턱과 아랫입술을 쭉 내민 채 두리번거리며, 손을 어정쩡하게 앞으로 두고는 행진에 참여한다-기보단 휩쓸린다. 피켓을 함께 들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우습게 찡그린 얼굴로, “저는 브롬리에서 왔어요.”라며 차 시간이 어쩌구 하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다가, 한쪽으로 빠진다. 행인의 ‘역겹다’는 반응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네’라고 답하는데, 행진하는 이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어도 비겁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만큼 겁먹고 긴장해 경황없다는 것이 그 과장된 고갯짓과 ‘yes’에 전부 드러나 있었다.
뒤풀이 파티에 참석한 조는 낯선 사람을 보고 대놓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모른다. ‘레즈비언 처음 만나 봐’라는, 역시 예의 없는 말을 웃어넘기게 만드는 건, 그 쩍 벌어진 눈과 입, 허리를 살짝 숙이고 무릎 위에 얌전하게 손을 올린 자세, 이어지는 부끄러움 한 점 묻어나지 않는 말들, ‘나 오늘 생일이야’, ‘엄마가 바지 다려줬어’ 등등이다. LGSM 초대 멤버를 모으는 순간, 입을 벌리고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어떻게 할지 묻자 얼굴 근육을 어색하게 찡긋거리며 둘러댄다. 날아오는 명부를 얼떨결에 받는데, 그 동작이 또 ‘브롬리’답다. 어깨를 굽히고 다리도 모아 굽히며 떨어진 펜을 향해 몸을 숙이고, 어리둥절한 고개는 가장 마지막에 숙인다.
자신으로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익숙한 이 클럽 안의 성적 소수자들은, 즐겁고, 능숙하고, 스타일리시해 보인다. 계속 어리둥절한 채로 그들 하나하나를 신기하게, 동경하듯 바라보는 조는 반대로 촌스럽고 어색하다. 자신있고 아름다운 그들 사이에서 조는 점점 스스로에게 당당해진다. 여전히 굽은 어깨와 어정쩡한 자세로 두리번거리만, 그 상태로 웃고, 구호도 외치고, 적절할 때 의견도 표시할 줄 알게 된다. LGSM 전속 사진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기된 얼굴로 벅찬 숨을 몰아쉬며 하겠다고, 마치 인생이 걸린 듯 말을 뱉는다. 단체사진에 담긴 조의 세상 티 없고 신나는 얼굴은, 카메라를 선물 받았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일에 쓸 수 있게 된 상태의 짜릿함으로 가득하다. 사진을 찍혔을 때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순간은 또 다르다. 자기 자리를 찾은 듯한 안정된 즐거움이 묻어난다. 모금 콘서트에서 만든 티셔츠를 입고 ‘전속 포토그래퍼’의 이름으로 세부사항을 지시하는(?) 조에겐 전에 없던 자신감이 묻어나지만 여전히, 사진 찍는 자세마저, ‘브롬리’ 같다.
자랑스럽게 ‘성적이 좋아서 현장 학습 간다고 했다’고 하곤, 무슨 수업이냐는 물음에 ‘슈 페이스트리’라고 조심스럽게 뱉으며 반응이 걱정되는 듯 입가를 이상하게 긴장시킨다. 자기도 모르게 애매하게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는 건 조지 맥케이 특유의 매력과 함께 조의 캐릭터를 표현한다. 모두 ‘브롬리’를 외친다. ‘브롬리’이자, 게이인 채로, 어떤 형태의 자신인 채로 있어도 환영받는 곳에서, 조는 자유롭고, 새로웠고, 혼자가 아니었다.
광부들을 처음 만나던 날, 조는 내내 눈썹을 찍 올리고 눈은 커다랗게 뜬 채 사색이 돼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아랫입술을 약간 내밀고 있다. 그룹 일원으로서 이기는 하나, 소수자적 정체성을 드러낸 채 외부인을 대면하는 건 처음인 것이다. 캠페인을 벌일 때의 스치는 만남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겁을 먹은 듯했던 그 얼굴은, 적대감을 마주할 때 눈빛의 변화 만으로 분노를 드러내기도, 마을 회관에서 모두 한 마음으로 노래할 때는 혼자 벅차서 울 것 같이 퍽 찌그러지기도 한다. 주로 배경에 있어 모르고 지나치게 되기도 하는데(시선을 뺏는 인물이 워낙 많은 작품이라) 한 번 발견하고 나면 눈을 떼기 힘들다.
앞에서도 계속 ‘어색한’, ‘우스운’, ‘어정쩡한’ 등의 수식어로 묘사했듯, 조의 얼굴 근육은 마치 나사가 빠진- 이 아니라 좀 어긋난 채로 꽉 조여진 듯 움직인다. 부자연스러움이 그만의 자연스러움인 것 같다고 할까. 얼굴색은 감정이 피부를 그대로 통과하는 듯 이리저리 변한다. 조지 맥케이가 짓는 조의 표정은 무지 솔직하고 독특해서 너무나도 흥미롭다. 화면의 가장자리에서, 가장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꼭 그 순간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에게 ‘살면서 가장 즐거운 날들이었다’고 말하는 조는, 빨개진 얼굴에 잔뜩 주름을 만들며 웃는다. 웃음과 울음의 경계에 있는 얼굴이다.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데, 그 벅참에 온몸이 간질간질한 것이다. 이제야 진짜 사는 것 같은 그 설렘이, 내게도 전염된다. 조는 그러나 여전히, 두 가지 삶을 살고 있다. 정학당할 위기를 숨기고, 조나단이 건네준 슈 페이스트리를 들고 집에 간다. 동성애 혐오적 광고에 즐거워하는 아빠를 보며 들키면 어쩌나 걱정한다. 모금 콘서트를 마치고, 홀로 새벽에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조의 얼굴은 복잡하다. 아직 남아 있는 전날의 흥분에서 벗어나 정신을 집 모드로 돌리고 있는 중인 듯 멍하다. 그리고 미세한 그늘이 있다. 아직 부모님이 알았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이지만, 마치 불길한 징조를 무의식이 예감한 듯하다.
결국 방에 갇힌 조는, 엄마의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듣는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이미 한참 운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만 한다. 말을 잃은 표정. 그가 엄마를 뿌리치고 뛰쳐나가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마주 껴안는 그 모습에 심장이 푹 찌그러지고 만다. 아무 말하지 않고도, 조지 맥케이가, 조의 마음을 전부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조가 아닌 이상 어쩌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음도.
다시 한번, 조지 맥케이의 얼굴은 감정의 빛을 매우 솔직하게 입는다. 집에 갇혀 있으며 죽어 있는 듯 탁하던 그 빛은, 광부들의 복귀 소식을 듣는 순간 밝게 살아난다. 그대로 뛰쳐나와 집으로부터 도망쳤던 조는 마침내, 진짜로 나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간다. 모든 것이 꽉 차오른 얼굴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카메라는, 뒤돌아보지 않고 입으로 숨을 몰아쉬며 흔들리도록 걷는 조의 얼굴을 길게 담는다. 밝지는 않다. 설렘, 걱정, 슬픔, 후련함 등의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다. 카타르시스 후 차분 해진 상태 같기도 하다.
조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혼자가 돼야 했다. 허나 홀로 선 것이지, 고립된 것은 아니다. 그에겐 친구들이 있다. 바에 들어선 후 그것을 새삼 깨달은 듯 긴장이 풀리고, 잠깐 홀로 미소 짓고 있다가, 스테프에게 다가간다. 누운 채 옆에 있는 스테프를 치켜떠 보며 집중해 말하느라 우그러진 얼굴. ‘분명하게 말하지만, 내 이름은 조’라고 하는, 짐짓 심각해서 귀엽게 없어 보이는 동그란 눈. 진지하게 말할 때 잔뜩 힘이 들어가며 어색하게 굳어버리는 눈썹과 입가 근육의 독특한 형태. 이런 것들이 ‘조 the 브롬리’의 어설픈 매력이다. ‘우리가 이성애자였으면 키스할 타이밍이었을 텐데’라고 농담을 던지는 스테프의 손을 꽉 잡고, 여전히 일부러 ‘브롬리’를 외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대로의 벅참을 얼굴색에 드러낸다. 긴 한 해가 가고 돌아온 생일에 ‘브롬리’이자 게이로서 당당하게 선 조는, 세상 행복해 보였다.
<캡틴 판타스틱>의 보와 <런던 프라이드>의 조는, 능숙하지 않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어설펐다. 그것이 바로, 이들의 매력이었고, 힘이었다. 흔들리고 갈등하고 비틀거리며 원하는 것을 찾아 바르게 나아갔다. 그리고 그 흔들림과 곧음은, 조지 맥케이 특유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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