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h Grant in specific characters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A Very English Scandal)>(2018, BBC One)
Feat. <모리스(Maurice)>(1987,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섬세하고 소심한 젠틀맨 로맨티스트의 변주들. 휴 그랜트가 맡는 역할은 항상 비슷하다. ‘악당’ 역할을 맡더라도, 캐릭터는 비슷하게 가져간다. <스몰 타임 크룩스>(2000)에서는 젠틀맨 이미지를 활용해 적당히 소심하게 사기를 치는 인간으로 등장한 바 있다. 그렇다고 질리지는 않는다. 한결같아도 한결같이 매력적이다. 유형과 연기가 매우 독보적이어서, 그만이 소화할 수 있음을 매번 증명한다.
그 캐릭터가 조금 구체적인 방향으로, 달리 묶이는 작품들이 있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모리스>(1987)와 BBC 리미티드시리즈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2018)이다. 약 30년의 세월을 두고 찍은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것이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게이 캐릭터’라는 게으른 카테고리화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허나 내가 벤 위쇼에 대한 글에서 벤과 프레디를 엮어 설명했던 것이 둘 다 이성애 로맨스 라인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듯, 클라이브와 제레미를 한 페이지에 놓기로 결정한 까닭은 둘 다 게이이기 때문 만은 아니다. 물론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특징이다. 아직도 시스젠더 스트레이트 남성이 기본의 성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니. 허나 두 인물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이와 무관하지 않은-스스로가 가진 소수적 성 지향성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구체적으로 비교할 만한 지점이 보였다. 법으로 (구체적으로는 애널 섹스인데, 통상적으로는)남성 간 섹스가 금지돼 있던 시절, ‘잃을 것’이 많아, 스스로의 욕망이나 감정, 혹은 행위에 솔직하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당연히, 인물의 말과 행동은, 그의 심리, 생각, 감정을 곧이곧대로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작품은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끝까지 숨기기도 한다. 감정이 가득한 <모리스>에서 클라이브의 감정이나 욕망의 방향은, 드러나는 요소다. 포인트는, 말과는 다른 표정이다. 모리스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 그는 분명히 무언가를 느꼈다. 본인이 설명하는 플라토닉한 사랑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욕구를. 휴 그랜트는 억제할 수 없는 떨림을 뺨 가득 드러내며 관객마저 숨죽이게 만든다. 모리스가 몸을 가까이할 때마다 불편해했던 건 아마, 본인도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부하는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의 정체는, 불쾌가 아니라 쾌의 부정이었다.
클라이브는 고지식하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욕구를 만나자 실제로 신체의 고통마저 겪는다. 약하고 순수하고 잃을 것이 많아서 진심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사랑과 그에 대한 부정의 심리를 모두 이해시키는 것은 휴 그랜트다. 헷갈리게 만들지는 않는다. 원하고 있으나 감히 솔직해질 수 없는 상태의 여린 혼란을, 몸에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 창가에 손을 얹은 그는 대학 시절의 모리스를 떠올린다. 그 씁쓸함을 통해 휴 그랜트는 클라이브가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면서도 평생 부인했던 것을, 관객이 다시금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솔직하게 표현하고 끊임없이 거절당하는 모리스에게 이입하지만, 동정은 오히려, 클라이브를 향하게 만든다.
클라이브가 학문에 근거해 플라토닉한 사랑 만을 받아들이고 욕망을 부정했다면,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제레미는, 본인의 욕망을 분명히 알고 실행하며 그 사이 사랑이 끼어드는 것을 거부한다. 클라이브와 달리 확실한 심리가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실존 인물 제레미 소프가 노만을 사랑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 테지만, 작품이 ‘각색’한 캐릭터도 노만을 향한 본심에 있어선 말을 아낀다. 스스로 사랑을 깨닫고도 부정할 수도 있고, 깨닫지 못했거나 정말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확한 설정이 없다면 애초에 사랑이란 것 자체가 손바닥 뒤집듯 여부를 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기에, 작품은 각자 나름의 해석에 맡긴다. 휴 그랜트는 그 사이를 잘 포착해 정확한 지점에 안착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노만과 달리, 제레미 소프는 완벽한 ‘연기자’다. 국회에서 진지한 연설을 할 때는 강하고 정확하게, 그러나 지루하지 않도록 드라마틱하게, 능청스러운 말투를 섞는다. 눈썹을 찍 올리고 입은 찍 내린 표정에서 보이는, 그 장난스러운 빈틈까지도 어느 정도는 연기다. 어떤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데다가, 숨겨야 할 것이 있어 한 겹 더 껴입고 있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숨겨 왔기 때문에 그 비밀 자체가 일상, 성격과 일체화됐다. 얼굴 한구석에 감춰져 있는 의뭉스러움이, ‘왜 저렇게 자상하던 사람이 나중에 살인 교사까지 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잠재운다.
제레미는 사회 관습이나 법 대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움직인다. 완벽한 태도를 갖추고, 권력욕과 성욕에 충실하며 아슬아슬하게 몰래 선을 넘는다. 존재 자체가 법에 어긋남을 이미 오래전 깨닫고는, 타협점을 찾았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총대를 매지도, 정체성을 억누르지도 않고,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즐기며 ‘이기적인’ 균형을 잡아 놓았다. 노만 스콧은 그 균형을 어지럽히는 인간이었기에,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일 게다. 완벽히 통제하고 있던 인생에 생긴 변수-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동요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을 꽤 오랫동안 보고 싶어 했던 까닭은 사실, 벤 위쇼였다. 물론 벤 위쇼는 너무너무했고, 또 날 울렸고, 그것에 대해 아주 길게 쓸 수 있다. 그러나 휴 그랜트는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휴 그랜트는 나이를 그대로 드러내며 연기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 말투나 목소리에 묻어나는 세월. 노만을 처음 ‘little bunny’라고 부르며 장난스럽고 편안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안심시키던 그는, 자상하면서도 권위적이었다. 휴 그랜트도 연출도, 딱히 제레미 소프의 성적인 매력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헌데 특이하게도, 젊고 순수한 영혼을 유혹하는 나이 든 남자의 모습 그대로, 약간 징그러우면서 섹시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휴 그랜트가?
6-70년대 영국의 엘리트 정치인 역할. 전형적이다.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매력의 시작이다. ‘splendid’, ‘marvelous’와 같은 ‘젠틀맨스러운’ 단어를 뱉을 때의 짐짓 팍 굳어버리는 얼굴과 절도 있는 어조. / 이와 비슷하나 장난기가 반전을 주는, ‘very, very, very’와 같은 짐짓 진지하게 과장된 말투. 노만이 런던에 갑자기 찾아왔을 때, 신난 상태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팔다리를 벌린 채 뒤뚱뒤뚱 뛰듯 걸어 성큼성큼 내려와, 고개를 약간 돌린 채 팔을 활짝 벌리기까지 -이 일부러 익살스러운 특유의 동작은, 엘리트 이미지에 편안한 틈을 주며, 매력을 더한다.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제레미는 우연히 마주친 노만과 호의적인 긴장이 어린 대화를 나눈다. 상대를 흐뭇하고 간절하게 뜯어보다, 눈이 마주치자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노만만 모르는 변화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 속에 숨어 있는 의도가 보인다. 제레미의 시선으로 노만을 사랑스러워하다가도, 노만의 입장이 되어 그에게 끌리게 만드는 씬이다. 모자도 고개도 삐딱하게 둔 채로 햇빛 때문에 한쪽 눈을 감고 있는 표정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악의 없이 함께 있는 제레미와 노만의 그림은 완전히 아름답다. 버스를 타고 데이트하는-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은 편안히 로맨틱한 분위기와 장난스러운 모습에, 결국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질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잠시 잊고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글쎄 그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후에 친구에게, 사랑 같은 건 없다며, “I wonder, should I envy him?궁금하네, 그를 부러워해야 하는 걸까?”라고 생각에 잠긴 채 씁쓸하게 말하는 얼굴. 시작은 호기심과 욕구였어도, 노만의 사랑에너지에 물든 것이 아니었을는지. 이와 같은 상상을 하게 되는 까닭은, 작품과 휴 그랜트가 공간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주로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 젠틀맨적 매력들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은 아니었다.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들은, 제레미가 ‘털리기’ 시작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 와이프가, 사람들이 가십으로 파고드는 편지, ‘bunnies’라는 애칭에만 집중했던 편지의 마지막에 붙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I miss you’에 대해 말할 때,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벅차서 숨과 말이 막히는 듯 멈추었다가, 이내 슬픈 미소를 짓는다. 처음으로 색안경 끼지 않고 봐 준 사람이 과거를 속이고 결혼한 와이프라서, 미안하고 벅찼던 걸까. 그러면서도 남자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는 ‘우정’ 이상이 될 수 없는 현실이- 아니 여기까지만 하자. 특수한 인물이 겪는 특수한, 그리고 결코 공감하거나 동정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쩐지 마음을 쓰게 된다.
그러다가도 법정에서 감정을 꼭꼭 숨긴 채 노만을 차갑게 뜯어보는 눈과 꾹 다문 입을 보면, 있던 정도 떨어질 것 같다. 물론 응원은 노만에게 보내지만, 이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제레미는 자주, 홀로 멍하게 확장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입가는 주로 굳어 있다. 가끔은 씁쓸한 미소가 있기도 하다. 관객에게만 드러내는, 위화감을 알아챘더라도 관객도 어쩌면 스스로도 그 속내를 다 알 수 없는 얼굴이다. 자기 인생 전체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듯했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위험하지 않은 수단’이라서, 노만에게 정성을 쏟았던 걸까. 행동 동기를 ‘재미있을 것 같아서’로 설명하며, 스스로 에이로맨틱(‘나는 사랑이란 것을 믿지 않아’)임을 주장하는 이 남자의 얼굴에 묻어나는 회한의 정체는 뭘까.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다’고 버티며 멀끔한 말을 늘어놓던 그 방어적인 눈이 외로워 보였다.
약을 삼키며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노만, 도망쳤는데 갈 곳이 없어 난처해하는 노만, 그 와중 제레미가 곤란해질까 봐 편지를 가지고 나왔다는 노만, 그 편지에 쓰인 ‘노만’을 자신으로 상상했다면서 아직 사랑의 감정도 깨닫지 못한 채 솔직하게 설레 하는 노만, 그 순수한 노만을 바라보는 얼굴에 담긴 것이 단순히 연민과 흥미였을까, 아니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긴장이었을까. 그의 처진 눈에 어린 아련한 머뭇거림은,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휴 그랜트는 작품의 뉘앙스와 방향을 완전히 알고 있었으며, 복잡함을 바람직하게 더했다. 제레미를 이해하면서도 딱히 동정하지는 않도록. 죄를 흐리지는 않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나쁜 놈’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도록. 그 미묘한 경계를 짚어냈다.
휴 그랜트는 특유의 템포를 유지하면서,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두려움에 반응하는 클라이브와 제레미의 태도를, 구체적인 이해와 더불어 그만의 매력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설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