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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n 01. 2020

그가 그은 선

<하트비트>(2010)


<하트비트(Les Amours Imaginaires)>(2010, 감독: 자비에 돌란)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로렌스와 함께 자비에 돌란이 세계를 휩쓸고 있을 무렵, 내 귀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왔다. 궁금해진 내가 고른 작품은, <하트비트>(2010). 별 까닭은 없었다. 그가 찍거나 찍힌 영화들을 거의 다 본 지금도, 내 자비에 돌란 최애작으로 꼽는다. 최고작, 이 아닌 최애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는 말이다.


<하트비트>(2010) 스틸컷.



플롯은 두 개. 첫 번째 플롯은 페이크 다큐 느낌이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인터뷰 질문에 답하듯 사랑과 관계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늘어놓는다. 대사는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때론 구질구질할 정도로 자세하고 솔직하다. 말 말 말 뿐인데 지루하지 않은 포인트 중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은 45분을 늦어도 사랑스러운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낸 절절한 고백 편지에서는 틀린 맞춤법만 눈에 들어오는 심리. 한 인터뷰이가 그런 말을 한다 -장거리 연애를 하다 그가 여기로 이사 온 후, 우린 이미 끝났어. 내가 사랑했던 것은 그를 만나러 가는 과정, 기대감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프랑스어 제목, ‘Les Amours Imaginaires상상의 사랑’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대사다.


사랑에 빠지거나, 사랑을 떠나 보내거나, 자신을 사랑하는 상대를 거절하거나, 짝사랑을 그만두거나 하는, 일방향의 사랑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두 번째 플롯인 마리와 프란시스의 드라마 중간중간 섞여 들리며, 그들의 상황과 연결되기도 한다. 주가 되는 것도, 여기서 주로 언급할 것도 이 드라마 플롯인데, 첫씬부터 장난 아니다. 테이블 가운데에 앉아 웃음을 흘리는 니콜라를, 부엌의 두 친구가 야채를 썰며 곁눈질한다. 짐짓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선을 그은’ 후 침묵을 유지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정방향으로 잡는다. 각각 니콜라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한 번 씩 고개를 돌린다. 썩 썩 썩 칼질 소리가 화면 가득 울린다. 별다른 장치 없이, 노련하고 감각적이다.


<하트비트>(2010) 스틸컷.
<하트비트>(2010) 스틸컷.


한 사람을 짝사랑하며, 둘은 교묘하고 치사한 경쟁을 시작한다. 마리는 함께 연극을 본 후 니콜라를 동네 베트남 식당에 데려간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프란시스가 있다. 프란시스는 놀란 듯 인사하지만, 마리의 날카로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시골에 가는 길, 프란시스가 잠깐 자리를 비우자, 마리는 아웃팅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프란시스에게 정을 주지 말라는 암시를 한다. 말을 끝낸 그녀의 얼굴엔 민망함과 죄책감이 묻어난다. 니콜라에게 주는 서로의 선물을 은근히 깎아내리기도 한다. 계획된 우연과 뻔히 보이는 신경전. 허나 둘 다, 작전을 성공시킬 정도로 능숙하지도 약지도 못했기에, 결국 본인들의 애간장만 더 태운다. 흥미진진하고, 현실적이다.


한 번도 그들은 ‘나는 걔가 좋아’, ‘네가 걔를 포기해’ 따위의, 하나마나한 식상한 문장을 읊지 않는다. 인물의 심리나 감정은 대사가 아닌 표정과 행동에 드러난다. 전개의 호흡은 느린데, 내 호흡은 화면 속 인물들을 따라 빨라졌다.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클로즈업과 슬로모션이 차지하며, 일부러 늘어지게 연출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마리와 프란시스의 자잘하고 지질한 순간들을, 보편적이어서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각각의 형태로 아주 개인적인 심리와 감정들을, 죄다 포착한다. 세 사람의 첫 약속, 먼저 도착한 프란시스는 한껏 꾸민 마리가 걸어오는 것을 본다. 뺨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의 묘한 표정이 슬로모션 덕에 자세히 드러난다. 프란시스의 얼굴엔 찰나의 그러나 분명한 경계와 찝찝함이 떠오른다. 입꼬리는 씁쓸하게 올라가 있고, 눈은 살짝 내리깐 채 허공을 향한다. 눈을 한껏 키운 마리의 입술엔 승리의 미소가 떠 있으나, 역시 부자연스럽다. 니콜라를 만나러 가는 길, 클래식한 주제곡(Dalida - Bang Bang) 리듬에 맞춰 각자 혹은 함께 길을 걸어갈 때는, 느와르 뉘앙스도 있다. 은근한 유머가 섞여 있을 때도 많다. 프란시스가 제임스 딘 사진을 들이밀자 미용사가 약간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씬 같은 거, 재미있지 않나. 취향에 따라 이 느린 리듬을 겨우 견디거나, 나처럼 휘감기거나.



<하트비트>(2010) 스틸컷.


너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든 게 부자연스럽다. 니콜라 앞에서 관심을 갈구하며 쟤 말고 나를 보라고 암시하는 그들은, 어색하고 어설프다. 매력은, 온 신경이 ‘그가 나를 어떻게 볼지’에 쏠리지 않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니콜라가 매 순간 치명적인 까닭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마리의 매력적인 순간은, 소파에 앉아 니콜라의 엄마를 향해 마구 비꼬는 말을 늘어놓을 때, ‘프란시스 리베리킴, 차 마시러 올래?’ 하고 전화를 걸었을 때. 프란시스의 매력적인 순간은, 마시멜로를 먹으며 니콜라를 떠올릴 때, 일 년 후 니콜라를 만나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노려볼 때.


그들이 단순히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각자로서 존재해서, 취향과 성격이 드러나서 좋았다. 마리에겐 시니컬한 통찰력이 있다. 화려한 빈티지 패션이나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그녀의 집엔 타자기와 엔티크한 찻잔이 있다. 프란시스에겐 섬세한 감각이 있다. 그는 캐주얼하나 비비드하고 세련된 패션을 즐긴다. 그들이 고른 스타일이 곧 화면의 스타일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캐릭터의 취향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의도적으로 화려한 원색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인 듯 하다. 맞춘 듯한 의상, 배경, 조명은, 촌스러울 법도 한데 딱 어울린다. 마리와 프란시스가 니콜라에게 빠져들 무렵과 멀어질 무렵, 그를 생각하며 파트너와 섹스를 하는 장면은, 대놓고 대칭적이다. 맨살에 물든 각기 다른 색의 조명이 옷 컬러를 대신한다. 클로즈업과 슬로모션을 사용해 담은 섹슈얼한 터치는 정적이고 연극적이다.


마리와 프란시스가 경쟁하는 시기, 그들은 미리 정한 듯 대비되는 색을 입고 있다. 니콜라의 생일 파티 날, 마리는 붉은 드레스를, 프란시스는 푸른 세트 정장을 입었다. 니콜라와 춤을 추는 그의 엄마는, 두 색 모두를 지니고 있다-붉은 드레스, 립, 손톱에 푸른 가발. 산 속에서 몸싸움을 할 때, 마리는 붉은 하이힐과 상의, 블루진, 프란시스는 청재킷과 레드진 차림이다. 비웃듯 지켜보다 질린 듯 자리를 뜨는 니콜라는, 레드와 블루가 섞인 무늬의 셔츠를 걸치고 있다.


<하트비트>(2010) 스틸컷.



첫 번째 플롯으로 돌아가본다. 한 인터뷰이가 ‘넌 어느 쪽이야?’라는 질문으로 또 한 편의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자비에 돌란은 두 종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분리하는 건 아니다. 이 또한 사랑에 대한, 누구를 사랑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다 같고, 각자 다른 사랑이다. 그 당연하지만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설명하지 못하게 만드는 점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까닭 중 하나다.


니콜라는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방법으로, 모두를 밀어낸다. 갖고 놀다, 결정적인 순간 ‘선을 긋는’다. 약간 얄밉지만, 나름 이해할 수 있고, 어쨌든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의 고백에 대해 그가 그은 선은, 분명히, 잘못됐다. 마리는 비유적으로 대화를 열었고, 프란시스는 직접적인 감정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생긴 차이가 아니다. “널 좋아해, 너랑 키스하고 싶어.”에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두려움의 표시. 그것까지 듣고 난 반응이 “어떻게 날 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폭력적이다. 니콜라는 질문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혐오를 드러냈다. 프란시스는 화내거나 불쾌함을 표시하지도, 제대로 당황하지도 못하고 말문이 막혀 버린다. 뭐라 할 말이 없는, 그리고 그런 답을 들은 것이 절대 처음이 아닌 얼굴. 집으로 돌아간 그는 화장실 벽에 있는 무수한 선들을 바라보다, 하나를 더한다. 마리가 부러뜨린 담배는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났다. 허나 그 자국들은, 옅어질지는 몰라도,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트비트>(2010) 스틸컷.


그들이 니콜라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로 했을 때, 마리는 프란시스의 움츠러든 어깨에 우산을 씌워 준다. 위로의 제스처를 취하는 쪽이 마리인 까닭은, 딱히 더 강해서는 아니다. 아마 받은 상처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제 그녀에게 있어 니콜라는 단순히 자신의 마음을 거절한 남자가 아니라, 친구에게 상처를 준 놈이 됐다.


일 년 후, 파티에서 니콜라와 재회한 프란시스는, 동물이 방어각을 세우는 듯한 괴상한 사운드를 뱉는다. 시골에서 아침까지 놀고 있는 둘을 보고 마리가 비슷한 소리를 낸 적이 있는데, 프란시스의 것은 훨씬 길고 강하고 날카로웠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뭔지 알 것 같았’다. 마리는 친구의 머리를 감싸며, 니콜라를 차갑게 응시하다 무시한다. 프란시스가 벽에 선을 긋도록 만든 그에게, ‘선을 긋는’다. 두 사람은, 전처럼 대비되는 색이 아니라 서로를 보호하듯 똑같이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니콜라는 칙칙한 빛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들이 다시 반하는 루이 가렐의 옷은 레드.) 그리고 새로운 상대를 만나는 순간, 함께 천천히 목표물로 향한다. 그렇게 또다시 열심히 사랑에 빠지는 그들을, 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하트비트>(2010)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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