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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20. 2020

Holy Cate.(1)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1)




<커피와 담배(Coffee And Cigarettes)>(2003, 감독: 짐 자무쉬)

<어디갔어, 버나뎃(Where’d You Go, Bernadette)>(2019,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더 맨 후 크라이드(The Man Who Cried)>(2000, 감독: 샐리 포터)

<캐롤(Carol)>(2015, 감독: 토드 헤인즈)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2007, 감독: 토드 헤인즈)


* 위 굵은 글씨로 표시된 세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배우인 케이트와 하나도 안 유명한 밴드를 하는 애인을 둔 쉘리. 스타일이나 성격부터 여러 모로 안 맞아 보이는 그들은 사촌이다. 약간의 가식과 진심과 종종 뼈가 있는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후 헤어진다. <커피와 담배>(2003) 속 이야기 ‘Cousins’. 줄거리다. 별 거 없다. 그러나 이들을 지켜보며 관객은 숨을 죽이고 애매한 미소를 짓게 된다. 기본적으로, 사소하고 보편적인 감정과 태도를,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담은, 디테일이 전부인 각본이 있다. 짐 자무쉬는 배우의 자연스러운 개성이 찌질한 매력이 되도록 캐릭터를 만든다. 그 디테일과 개성을 살리는 건 당연하게도 배우들,이며, 이 경우엔 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다.


스타일이나 말투, 표정, 모든 면에서, 케이트와 쉘리는 대조된다. 깔끔한 정장에 세련된 금발을 한 케이트의 목소리는 한껏 높고, 곱고, 공기가 많이 들어있다. 말은 빠르고 발음은 정확하다. 자세는 곧고 우아하다. 다리를 꼰 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눈가와 입가엔 일정한 웃음을 띠고 있다. 어두운 헤어와 화장, 그래픽 티셔츠에 재킷을 걸친 쉘리의 말투는, 쿨하고, 시니컬하다. 뱃심으로 낮게 소리를 내며, 발음을 종종 흘리고 눙친다. 소파에 한껏 몸을 파묻고 양팔을 잔뜩 벌린 채 입술을 일그러뜨려 담배를 문다. 시원하게 씨익 웃으며 어깨를 큰 동작으로 으쓱거리거나 고개를 주억거리고, 입을 비죽거린다.


<커피와 담배>(2003)


반가운 듯 근황과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사이, 미묘하게 공기가 어는 순간들이 생긴다. 분명 친밀한 애정은 있으나, 위화감이 맴돈다. 쉘리는 열등감을 숨기지 못하며, 케이트는 민망해한다. 주눅 든 쉘리는 케이트를 몰래 위아래로 훑고, 긴장한 케이트는 가끔 동그랗게 뜬 눈을 옆으로 돌려 눈치를 살핀다. 두 인물이 혼자 있을 때 보이는 얼굴도 흥미롭다. 케이트는 지루한 듯 어깨를 으쓱 하고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다가, 쉘리를 발견하자마자 상큼한 미소를 짓는다. 애교 부리듯 팔다리를 양쪽으로 펼쳐 움직인다. 케이트를 껴안는 쉘리의 입은 웃고 있지만 실룩거린다. 케이트가 자리를 뜬 후엔, 웃음기를 거두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눈이 공허하게 냉정해지고, 벌어진 입이 우그러진다. 점퍼를 홱 벗는다. 한숨을 푹 쉬고, 담배를 물며 웨이터를 부른다. 웨이터가 (케이트가 가니 이제사), 금연이라고 하자, 뚱하게 동그란 눈으로 훅 올려다보고, 담배를 문 그대로 굳어 라이터를 찰칵거린다. 눈과 입의 움직임으로 민망함과 띠꺼움을 내뿜는다. 드라마틱하게 오르내리진 않지만 심장 한구석을 애매하게 간질이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그 모먼트들을 케이트 블란쳇은, ‘홀로’ 살렸다.


작품이나 글의 주제에선 벗어나 있는 얘기지만, 쉘리의 스타일은 사실 내가 좋아하는 클리셰다. 그러나 케이트 블란쳇이 아니었다면 딱히 멋져 보이지 않았을 거다. 그 목소리, 이글거리는 눈빛, 큰 입술을 우그리는 모양새, 케이트를 보내며 날리는 눈웃음과 쯧 하는 키스…동시에 같은 배우가 연기한 케이트에게서 나는, 별 스타일적 매력을 느끼지 못함을 깨달으며, 다시금 그의 연기에 반하게 된다.


<커피와 담배>(2003)



케이트 블란쳇. 이름만 떠올려도 위대한 기분이 드는 배우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헬라나 <오션스8> 루의 실루엣에 관객들이 열광한 건, 단순히 외모 때문은 아니다. 이 배우가 그동안 쌓아온 연기의 격이 분위기로 드러나서다. 그냥 가만히 서 있거나, 벌린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앉거나, 천천히 걸어오기만 해도, 그 아우라가 스크린을 적신다. 이 ‘유명한’ 상업영화 시리즈들이 케이트 블란쳇을 모셔온 건, 상당히 영리한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때 죽음의 여신을 섬기겠다고 난리를 쳤었다.)


앞 괄호 안 문장에서 장난스럽게 표현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에 대한 감정은 항상, 애정이나 관심보단, 숭배에 가까웠다. 맡아온 인물들의 특징이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스크린 속 케이트 블란쳇은 주로, 특별하고 완벽해 보이는, 굳이 ‘천재’나 ‘스타’‘가 아니더라도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면은 종종, ‘보편적이지 않은’, ‘괴짜’, 소수자적 면이 되어 ‘보통’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어려움을 덜어내는 것 또한, 케이트 블란쳇이다.  



<어디갔어, 버나뎃>(2019). IMDB 이미지.


버나뎃 폭스의 남편은 털어놓는다, “더 이상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 무슨 외계인이 갖다 놓은 복제인간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 아마도 작품의 제목, ‘Where’d you go, Bernadette?어디갔었어 버나뎃?'은, 표면적으로는 물리적인 이동을 뜻하지만, 창작을 멈춘 후 정신이 어디 가버린 듯 불안하게 행동했던 버나뎃이, 다시 작품을 만들며 자신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갔을 때, 와 돌아왔을 때,의 상태 모두 버나뎃이다. 20마일 집을 지은 사람과, 모든 알약을 죄다 한 병에 섞어 놓은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그 옛날의 버나뎃이 '정상'이 아니듯, 현재의 버나뎃도 '비정상'이 아니다. 예민하고 안티소셜한 감수성은 예술적 감각과 맞물려 있으며, 그것은 버나뎃 고유의 에너지다.


원격 가사 도우미 만줄라는, 버나뎃이 스스로의 불안을 여과 없이 털어놓는 유일한 사람이다. 사무적인 관계의,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을 사람이라서 편하게 드러낼 수 있었을 테다. 그는 매번 음성 인식 서비스를 사용해 이메일을 적는다. 사실상 혼잣말이다. 감독의 각색이라면,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하겠다. 마치 만줄라와 통화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말하는 것 자체에 완전히 집중해, 현 상태와 생각에 몰입해 단어 하나하나를 열정적으로 뱉어낸다. 가만히 앉아서 말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와중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거나 심지어 일을 하는 것이, 말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신호다. 걸어 다니거나, 소파에 괴상한 자세로 눕거나, 카펫을 발로 더듬어 보고 칼로 잘라서 풀이 올라올 수 있게 드릴로 박기도 한다. 이 외에도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할 때, 운전하며 노래를 부르거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개를 구출하거나, 양동이에 담긴 걸레를 짤 때, 버나뎃에겐 ‘위화감’이 없다. ‘완전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버나뎃은 말이나 규칙보다는, 몸이 앞서는 사람이다. 계획 없이 막 한다는 말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각각에 적합한 계획을 세워 작업하는 예술가라는 뜻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망가지기를 주저하지 않고, 사리지 않고 - 아니 이런 부정 수식어로 쓰고 싶지 않은 정도로 -, 최선을 다해 몸을 날려! 화면 전체를, 넓은 집을, 버나뎃 폭스의 퍼포먼스로 꽉 채운다. 그래서 버나뎃이 후에 사우스폴에 가야겠다면서 하는, ‘나는 건축을 하려면 거기 살아봐야 한다’는 말에, 백 퍼센트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어디갔어, 버나뎃>(2019). IMDB 이미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시니컬한 농담조로 넘겨 버리는 버나뎃은, 딸과 노래를 부르다가, 아이들의 공연을 보다가, 눈물을 흘린다. 갑작스럽지만 뜬금없진 않다. 버나뎃은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에 감동받는다.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사랑하는 생명은, 비다. 오드리와 말다툼을 하던 와중, 시니컬한 혐오와 분노를 담고 있던 눈빛이, 비가 언급되는 순간 휙 변한다. 물이 고이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엄청나게 미세하게 바들바들 떨린다. 상황이 끝난 후 비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면서도, 얼굴이 질려 있다. 버나뎃 폭스에게 있어 건드리면 안 되는 것 단 하나,는 ‘비’라는 사실을 알려 준 건, ‘비는 건드리지 마’라는 대사 자체가 아니었다.


밤중에 20마일 하우스 비디오 에세이를 보다 별안간 랩탑을 퍽 덮고 눈을 멍하게 부릅뜨며 입을 꾹 다물 때, 이십 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정확한 발음과 불안정한 눈빛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빠르게 주욱 늘어놓을 때, 히스테릭하게 넘겨버렸던 속내가 조금씩 드러난다. 심술궂게 화내고 소리치며 할 말은 다 하는 것 같았던 버나뎃은, 정말로 내보내야 했던 감정은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남극에 간 후 다 내려놓은 듯 편안해 보였던 버나뎃의 눈은, 기지를 새로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전에 없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나는 알 수 없는 천재의 영감이지만, 이해 없이도 응원하고,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해 준 건, 그와 같은 천재 예술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였다. 버나뎃을 따라 조금 울고 나서, 갑자기 깨달아 버렸다, 애초에 본 까닭이기도 했지만, 케이트 블란쳇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내 마음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어디갔어, 버나뎃>(2019). IMDB 이미지.



이제 약 이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완전히 다른 모습의 케이트 블란쳇을 만나 볼 차례다. 그 다름은 세월보다는, 캐릭터의 성격과 역할에 따른 연기의 방식 차이에서 나온다. 버나뎃은 남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마이웨이로 마구 행동하며, 고로 케이트 블란쳇은 최선을 다해 몸을 날렸다. <맨 후 크라이드>(2000)롤라는 주위의 시선을 극도로 중요하게 여기며, 세상의 흐름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외모뿐 아니라 말투와 표정, 몸짓, 행동 방식을 꾸며내는 롤라의 태도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어쨌든 케이트 블란쳇이 치는 대사의 모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의 가치가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였다. 카랑카랑하고 분명한 웃음소리, 특유의 굵고 깊은 톤이, 러시안 억양과 만나 명랑하고 우아한 롤라의 시그니처가 된다. 롤라는 이를 테면, ‘supporting role’이다. 매 순간 중심이 되려고 애씀으로써, 관객이 주인공 수지에게 시선을 돌리도록 만든다. 롤라에게 담배는 어떤 패션 소품처럼 보인다.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이는 건 분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이 롤라를 표현할 때 유독 크게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맨 후 크라이드>(2000)


둘만 있을 때, 수지와 롤라는 조금 닮아 있다. 솔직하게 웃고, 편하게 말한다. ‘남자를 얻는 데에는 룰이 있어’ 따위의 말을 늘어놓지만, 그 순간의 롤라 자체는,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다. 침대에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 채, 눈알을 굴리며 짐짓 진지하게 강조한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두 사람은 대조된다. 롤라는 열심히 입꼬리를 올리며 휘적휘적 돌아다니고, 수지는 인상을 쓴 채 입을 꾹 다물고 이상하다는 듯 그런 그녀와 다른 이들을 관찰한다. 공허하고 무뚝뚝한 수지의 눈과, 욕망이나 웃음기로 꽉 찬 롤라의 눈. 롤라는 기둥 사이로 단테를 슥 보더니 어떤 결심을 한 듯 눈을 부릅뜨고 입을 움찔거린다. 그녀가 단테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두 친구 사이의 공기에 어색한 거리감이 맴돌기 시작한다.


의도된 연출이다. 만나는 연인까지 포함한 모든 면에서 롤라와 수지를 대조되게 그리는 것. 기본적으로 수지의 시선을 통하므로(실제로 좀 무례한 행동을 하긴 했으나), 관객은 롤라에게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그러나 롤라와 수지는 삶의 방식이 다른 것뿐이고, 롤라에겐 나름의 까닭이 있다. ‘내 외모가 이렇지 않았다면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며 살짝 내리깔던 눈이 떠오른다. ‘이제 지겨운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며 짐을 챙기는 그녀는, 짐짓 기뻐하나 초조해 보인다. ‘단테는 좋은 사람이겠지?’ 하고 묻는 동그란 눈과 내려간 입꼬리에 겁이 묻어있다. ‘왜 날 비난하냐’며 신경질적으로 옷가지를 툭 툭 내려놓는 손끝에선, 분노가 아니라 걱정과 서운함이 보인다. 케이트 블란쳇은 그렇게, 롤라의 시원한 미소 속에 필사적인 불안을 숨겨 놓는다. 불안할수록 크게 웃는다. 외모를 꾸미고, 눈알을 굴리며 입꼬리를 씩 올리고, 머리카락을 슥 넘기며, 롤라는 최선을 다해 매력적인 여인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워 보이는 그 모습에 담긴 것은, 일종의 생존이다.


<더 맨 후 크라이드>(2000)


전쟁이 터진 후, 롤라는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웃음으로 숨기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불안이 얼굴 전체에 퍼져 있다. 그 한구석에는 수지에 대한 걱정도 있다. 단테가 수지가 유대인임을 밀고하는 것을 들은 그녀의 얼굴은, 관객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퍼렇게 굳는다. 그리고 수지를 만난다. 카메라를 든 군인들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미소 짓고, 수지의 팔짱을 끼고 높게 꾸며낸 톤으로 아무 말을 늘어놓는다. 어두운 골목에 다다르자, 멈춰 서서,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초조하게 높은 톤으로, 조급하게 더듬는다. 단테에 대해 언급할 때는, 아련함은 있으나, 망설임은 없다.


미국으로 떠나는 배 안, 노래하는 수지를 보는 롤라는 비로소 편안해 보인다. 멍하게 집중하는 눈, 자연스럽게 다물린 입술. 무표정이다. 그러나 옆자리로 한 남자가 찾아오자, 금세 눈웃음을 날리며 목을 꺾어 담배연기를 후 내뿜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롤라가 말하듯, 수지와 그녀는 다르다. 난간에 기댄 롤라의 표정은, 근심스럽게 푹 꺼져 있다가, 미소로 빛났다가, 우울하게 가라앉으며 매 초 다채롭게 변한다. ‘우린 재밌게 지낼 거야’라며, 눈알을 장난스럽게 굴리는 친구에게, 수지는 웃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배가 침몰해 서로 헤어지게 된-아마 롤라는 죽었을 것이다- 결말이 안타깝다. 처음 봤을 때는 나 역시 조니 뎁과 크리스티나 리치의 케미에 눈이 돌아갔었는데, 다시 보니, 오, 시원하게 미소 짓는 케이트 블란쳇과 조용히 피식하는 크리스티나 리치의 케미도, 못지않게 흥미롭지 않은가.  


<더 맨 후 크라이드>(2000)


화려하게 움직이며 화면과 상대방의 눈동자를 꽉 채웠지만, 본인의 가슴 한구석엔 공허가 느껴졌던 롤라. 등장할 때마다 그 순간을 꽉 채우고, 가끔은 텅 비웠던,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이 캐릭터가 생각보다 평면적이지 않다고 말해줬다. 자칫 전형적 미소지니 뉘앙스의 ‘미인’으로 낭비됐을 수도 있었을 롤라의 서사와 매력을, 어느 정도 설득해 냈다. 샐리 포터 감독이 굳이 롤라를 ‘이런 식으로’ 만든 까닭은, 케이트 블란쳇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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