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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Feb 15. 2021

Liz, the Goddess.

리즈 테일러 in <AHS: Hotel>



 
리즈 테일러 in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호텔>(FX)
Liz Taylor in <American Horror Story: Hotel>(FX))
Feat. <디스클로저>(2020), <Pride>(2014),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 <AHS: Hotel>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중이 생각하는 트랜스 여성은 가발과 메이크업, 코스튬을 입은 남자다. 시스 남성 배우가 트랜스 여성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상적으로 보는 건 캐릭터 자체가 아니라 ‘트랜스다운’ 연기다. 캐릭터의 존재감은 그에 가려진다. ‘트랜스다움’은 캐릭터의 일부일 뿐인데도.”  

-Jen Richards, <디스클로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의 실제 이야기에선, 레이온이라는 인물이 없었다. 이 캐릭터는 약물에 다시 빠지고, 병에 걸려서 죽는다,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고 대담한 모습으로 등장해, 편견을 깨뜨리고 주인공의 눈을 뜨게 해 주고는. ‘그래, 임무 완수했어, 주인공 정신 차렸으니까, 죽이자.’”  

-Bianca Leigh, <디스클로저>  
 
실화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장르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면 허구 요소가 섞일 수도 있는 법인데, 왜 그리 ‘예민하게’ 반응하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인물이 그려지는 방식을 관찰했을 때, 지닌 소수자성, 신체로만 소비되거나, 어떤 기능/역할을 다하고 버려짐이 명백히 보인다면,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뭐 나도 처음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봤을 땐 별 고민 없이, 주인공이 초반부 레이온에게 보이는 혐오를 혐오하거나 레이온을 좋아하기만 했었으니, 그다지 자격은 없다만.  
 
<Pride>(2014)가 떠올라 가져와봤다. 메인 롤인 조지 맥케이의 조는 허구의 인물이다. 각색 작가는 이 ‘평범하고 순진한’ 인물의 맑은 눈을 실화의 필터로 택했다. 조는 위대한 LGSM을 그리기 위해 소비되고 버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입체적으로 변화하고 싸우고 살아남아 웃는다. 허구의 인물이라도, 어떤 ‘대표성’을 띤다면, 캐릭터를 대하는 예의란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게이 시스 남성은 되고, 트랜스 여성은 안 되었던 건가?) 젠과 비앙카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 이야기를 각색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레이온이 더 이상 ‘존재할 까닭’이 없었던 거 아닌가, 나도 그렇게 ‘허구의’ 비극을 소비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AHS: Hotel>(FX). Sugarpop.


트랜스 여성 캐릭터는 트랜스 여성이 연기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AHS: 호텔>리즈 테일러는 그래도 조금 달랐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본다. 연기가 어메이징 했다는 반응들과는 별개로, 어쨌든 리즈는 오로지 리즈로 사랑 받았다. AHS 시청자층이 어떤 면으로 ‘좁다’는 점이 그 까닭 중 하나다. AHS 팬들은 애초에, 혹은 시리즈를 따라오면서 시야가 넓어진 결과, 기본적으로 소수자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핵심은, 리즈 테일러 자체가 가진 에너지,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데니스 오헤어의 연기에 있는 섬세하고 바람직한 감수성 또한 리즈가 ‘달리’ 그려지고 받아 들여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배우의 연기가 아닌, 캐릭터의 매력에 초점을 두고 적었다. 그래야 했고, 그러고 싶었다, 입만 열면 시가 되는 리즈의 대사를 잔뜩 인용하며. 굳이 글을 읽지 않아도 좋지만, 대신 ‘AHS Liz Taylor quotes’를 구글링 해보시기를 바란다.  
 

<AHS: Hotel>(FX). IMDB.



“Teaching the folks from Vogue how to Vogue.”
 
윌 드레이크의 파티에 초대 된 보그 직원들에게, 보그를 추는 법을 가르치는 이가 있다. 무표정으로 손을 슬그머니 절도 있게 놀려 주고, 패션 트렌드의 공식을 빠르고 단호하게 이르곤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자리를 뜬다. 슥 등장해 화려한 인상을 남기더니, 별 말 없이 호텔의 일부처럼 배경에서 폼을 잡고 있다가, 잊을 만 하면 이렇듯 심장에 임팩트를 주곤 다시 사라지는 여인, 리즈 테일러다.
 
94년, 아이리스가 샐리를 창문에서 밀고 도노반이 뱀파이어가 되던 그날도, 그는 호텔에 있었다. 세상 무심한데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 가늘게 뜬 눈, 새침하게 흘러내린 옷자락, 우아하게 재를 떨거나 돈을 달라고 비비는 손가락의 놀림. 담배와 칵테일만 머금고 살 것 같은 분위기다. 호텔 코테즈 맴버 중 드물게 유령도 뱀파이어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통달한 포스를 풍긴다.
 
늘 가운/섀도우/네일/액세서리 중 두셋은 톤을 맞춘다. 같은 색 아이템을 아무거나 걸친다고 다가 아니다. 리즈는 소재의 질감이나 디테일에 일관성을 두거나, 색의 농도에 변주를 넣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매치의 정석을 보여 준다. 금빛 글리터 디테일이 있는 가운을 입었을 땐, 볼드하게 찰랑거리는 골드 귀걸이와 네일을. 흰 드레스엔 흰 빛 진주 귀걸이와 은빛 네일, 청록 시스루 블라우스엔 같은 색 보석이 박힌 귀걸이. 짙은 퍼플 벨벳 드레스와 바이올렛 귀걸이. 타이트한 검은 가운엔 검게 빛나는 터번. 그의 ‘헤어스타일’은, 아름답다. 리즈 테일러가 코테즈 호텔 리셉션 스태프 룸에서 걸어 나온 순간부터, ‘여신 머리’는 더 이상 풍성하고 길게 웨이브진 형태가 아니라, 올 하나 없는 깔끔한 민머리를 일컫게 됐다.
 
완벽한 메이크업과 패션은 거들 뿐, 아우라를 완성하는 건 태도다. 바에서 능숙하게 대충 술을 따라주고, 귀찮지도 않다는 듯 시체를 버리고, 눈을 내리깔거나 가늘게 뜨고, 허리를 살짝 옆으로 튼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는다. 꼭 필요할 때만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연다. 리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 내용도, 그것을 내보내는 방식도 철저히 우아하다. 평범한 단어도 리즈가 조합하면 독특한 표현이 되고, 흔한 관용구도 리즈의 입을 거치면 특별한 뉘앙스를 풍긴다. 데니스 오헤어는, 시스젠더 남성 배우들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연기할 때 흔히 하는 실수-혹은 의도적인 혐오-를 답습해 희극적으로 새되게 꾸며내지 않고, 음색을 유지하며 톤을 섬세하게 올렸다. 발성은 풍부하고 정확하며, 억양은 드라마틱하나 이음매가 부드러워 귀에 녹아든다. 오 그 투로 내보내는 대사들은 어찌 그리 무심하면서도 성의 가득한지. 클라-스가 다르다. 그 바탕 중 일부는, 손에서 놓지 않는 고전 문학일 테다.


<AHS: Hotel>(FX). IMDB.


 
“No pity party in my bar!”
 
차이고 바에 와서 징징대는 도노반에게 리즈는, 단호한 손가락질과 함께 외친다. 그러나 뒤따르는 건 정확하고 친절한 조언. 리즈는 제 얘기를 늘어놓으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재치 있는 몇 마디를 툭 던져 분위기를 녹인다. 아이리스도, 샐리도, 트리스탄도, 앨릭스도, 고민이 있을 땐 리즈를 찾는다. 진심 어린 공감과 확실한 해결책을 둘 다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므로.
 
진심의 근거는, 옅은 미소다. 아련하고 따뜻하고 순수한-아무것도 몰라서 순진한 게 아니라 이것저것 다 겪고 다 알고 있어서, 타고난 정을 적절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서 자연스럽게 순수한-미소다. 그러나 눈은 슬프다. 지독히 끈적한 존재감을 내뿜는 샐리와는 다른 색의 외로움이다. 호텔의 일부처럼 화려하고 고요하게 화면 한구석을 차지하는, 깊고 깔끔하고 처연한 고독, 그 밑바닥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AHS: Hotel>(FX). IMDB.



“You see everything when the world doesn’t see you.”
 
그의 목소리가 좀 더 입체적으로 들리기 시작하는 건, 뱀파이어가 된 아이리스가 그에게 의지하면서다. 힙스터 커플이 까다롭게 굴자 패닉해 우는 아이리스를 달래며, 고양이 사료를 공들여 접시에 펴바른다. “파테를 달래? 그럼 주지 뭐.” 당신은 어찌 그리 다 꿰뚫어 보냐는 물음에, 차분하게 답한다. “세상이 널 보지 않으면, 모든 걸 다 보게 돼.” 항상 당당하고,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뭘 하고 있고 뭘 해야 하는지, 좋고 싫은 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던 이 인물의 속이, 그렇게 편안한 것 만은 아니었음이 엿보인다. 오히려 만사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로, 상처와 굴곡을 덮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리즈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그러나 악의 없이 질문한다면, 친절하게 ‘교육’해 줄 의향이 있다. ‘잘못된’ 말 “I’m not homophobic.”에, 리즈는 무심하게 대응한다. “I’m not gay.” 아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였기에 당신을 멀리했다고, 아이리스는 고백한다. 리즈는 먼저 건넨다. “Well, you can’t offend me, ask away.” ‘CANT’ 이라니. 과연 리즈답다. 이미 감수성 부족한 질문들에 익숙해 졌다는 것이 까닭의 하나일 듯도 해 약간 마음이 시리다. 그러나 그보다는, 웬만한 혐오에는 상처 받지 않을 만큼의 존재-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더 느껴지는, 단단하고 멋진 대사다.
 
리즈는, 몹시도 다채로운 감정을 묻혀 속삭이기 시작한다. 시청자는 그의 과거를 영상으로 보고 있지만, 그 풍부한 스토리텔링 덕에, 이야기를 말로만 듣는 아이리스도, 그때 리즈가 느꼈던, 비밀스러운 즐거움, 벅차오르는 설렘 같은 것들을 다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AHS: Hotel>(FX). IMDB.


‘리즈 테일러’라는 이름을 준 이는, 바로 백작countess. 레이디 퍼 코트를 입은 세일즈맨 니키를 뱀파이어로 ‘만드는’ 대신, 그 안의 ‘여신’을 ‘끌어냈다’.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찾아 주고, 클로젯closet에서 나갈 수 있게 도왔다. 패션이나 헤어, 메이크업, 자세의 디테일이나 말투도 물론, 약간 바뀌었다. 목소리 톤은 아주 살짝만 올렸고, 끓듯 나직하게 풍부해졌다. 허나 핵심은 그게 아니다.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고, ‘자신’이 되는 비밀스러운 시간 이외의 매초를 지루함과 억눌린 욕망 사이에서 어설프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이와 겹의 고민, 스스로를 옥죄었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과정들이, 리즈 테일러를 ‘여신’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리즈는, 다른 사람들이 자유를 찾는 것을 돕는다. 백작처럼, 자신의 ‘소유’안에서 자유롭게 ‘두는’ 게 아니라.
 
백작과 리즈의 관계는, 백작과 백작이 만든 뱀파이어들의 관계와는 다르다. 원래 있던 가능성을 스스로 꺼내는 걸 도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Become who you are born to be, the goddess.”) 백작도 아마, 무의식중에 이 관계를 가장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다. 후에 리즈의 목을 그으러 다가오며 인정하지 않았던가, “You were always my fondest creation.” 리즈는 목메며 복종하지 않는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바탕으로 기꺼이 그를 위해 일하고 우정을 나눈다. 백작이 잘못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AHS: Hotel>(FX). Sugarpop.



“When I let the Liz out, I could see, feel, taste, love.”
 
‘은인’ 같은 존재를 증오하게 된 까닭은, 사랑. 트리스탄과 리즈, 이토록 달라, 이렇게나 어울리는 연인이다. 난폭하게 날뛰던 트리스탄은 리즈와 있으면, 차분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상대만 뚫어져라 본다. “왜 당신과 있으면 좋을까?” 사랑이 가득 담겨 있으나, 아직 완전히 깨닫지는 못하는 눈으로 묻는 그에게 리즈는, “넌 고아니까. 나랑 있으면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야.”라고 농담을 던진다. 리즈이기에 가능한, 또 리즈답게 매력적인 농담인데, 좀 더 진지하게 상대의 마음과 이 관계에 자신을 가져도 좋을 텐데란 생각이 든다. 다음 순간 트리스탄에게 고전 문학 책 몇 권을 선물하며(매우 로맨틱!) 그는, ‘갇혀 있던 리즈를 끌어냄과 함께 다른 감각도 살아났다’고 고백한다. 몇 초 뒤, 둘은 상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또 상대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트리스탄은 무식한 모델, 트러블메이커가 아니고, 트리스탄이다. 리즈는 ‘헤테로 걸’이고 리즈일 따름이다. 둘 다 게이가 아니다. 이것은 이성애 관계다. 서로 사랑하면 됐지 왜 굳이 정의하고 강조하냐면- 그 정체성, 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트리스탄의 제스처 또한 리즈에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본질을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고, 오직 사랑한다. 마음을 다해 사랑할 줄 아는 리즈는, 백작도 이 사랑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백작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내 것이 되지 못할지라면, 누구의 것도 되지 못하게 막는다. 그 방식도 끔찍하다. 사랑을 ‘인정’ 해 주는 척 하다가, 리즈 앞에서 트리스탄의 목을 긋는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건, 본인의 고통을 죄 없는 이들에게 지울 권리는 없다. 백작은 잘못했다, 트리스탄에게, 리즈에게. 한참 후 다시 짧게 등장한 리즈는, 일상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슥 닦고 책에 눈을 묻는다.
 

<AHS: Hotel>(FX). IMDB.



“Bitch, buy your own damn flower!”
 
리즈는 생존을 위해 존경을 꾸며내지 않는다. 이제까지 백작의 말에 순순히 따른 건, 그를 진정으로 숭배했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리즈에게서 트리스탄을 앗아가며, 저에 대한 마음도 앗았다. 결혼식에 꽃을 주문해 달라는 말에, 리즈는 으르렁거린다. “Bitch, 니 망할 꽃은 니가 스스로 사!” 결혼식 날에는, 뒤에서 폼을 잡고 서 있다가, 반대하는 사람이 있냐는 주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든다. “Oh yeah, because…… she is a bitch.” 리즈는 나만이 고통스럽다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는다. 참고 눅여 속을 깎아먹지도 않는다. 일상을 유지하며, 애도하고, 증오하고, 아파한다.
 
후반부 에피소드 몇은, 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 문장들은 특별하다. 목소리 만으로, 모든 걸 다 표현한다. 한쪽이 암에 걸리자 함께 자살하러 코테즈에 온 노부부를 보고, 리즈는 눈물을 흘린다. “I envy them.” 단어들이 입속에서 절절하게 끓는다. 상실감에 슬퍼하며 살아가다, 아들과 재회하게 된다. 알아보고도, 아빠가 직접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툭 터는 더글라스, 그 장면을 보고 안 운 사람 별로 없을 거다. 꼭, 작품 자체가, 리즈에겐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니키로서 그는 분명 아내와 아들에게 잘못을 했으나, 관계의 회복 의지는 당사자들에게 달려 있으니, 말을 첨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함께 자살하기로 한 리즈에게 삶의 의지가 생기니, 홀로 죽으려는 아이리스에게, 리즈는 외친다! 너와 나, 이 나이의 여자들, 고통만 받고 살아온 우리가 호텔을 차지해버리자! 삶의 공간으로 꾸미자! 그럴 권리가 있다! 그렇지. 이번 편의 핵심은 후반부에 모여 있었다. 저들만의 사랑에 취한 백작과 도노반의 모먼트를, 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깨뜨린다. 백작을 향해 총을 마구잡이로 발사하는 두 여인들, 좀 어설픈데 멋지고, 멋진데 왠지 귀엽다.


<AHS: Hotel>(FX). IMDB.



“Cut me and I bleed Dior.”
 
호텔 리뉴얼은 리즈의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령들을 모아 화합을 이룬 데에도 그의 공이 컸다. 유령 윌 드레이크가 다시 디자인을 시작하게 만드는 그 장면 아, What a scene! 패션을 아는 리즈는, 윌의 감각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며 대화를 연다. 관심사가 같으니 정서가 통한다. 그리하여 윌은 리즈의 제안을, 설득을 위한 설득, 목적을 위한 미끼로 여겨 튕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가 자신을 대리할 페이스가 없음을 언급하자, 리즈는 등을 보인 채 팔을 우아하게 끌어올려 본인의 턱을 가리킨다. “다른 삶에서 나는 세일즈맨이었어, 이번 삶에서, 나는 패션의 어머니야.” 그리고, 그 유명한 대사가 이어진다, “내 피조차 하이패션이야. Cut me and I bleed Dior.”
 
리즈의 죽음은, 독특하게 아름다운 정서를 끌어낸다. 암에 걸린 리즈는, 호텔 친구들에게 부탁한다, 여러분 모두 함께 나를 죽여,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결국 그의 숨을 끊는 건 백작이지만-침대에 가지런히 놓인 자그마한 살인도구들,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기꺼이 집는 친구들-, 이상하게 마음을 울리는 그림 아닌가. 대개 여럿이 하나를 찌르는 최후는, 수많은 이들에게 원한을 산 빌런이 맞는 법인데, 이 경우는 정 반대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재탄생을 돕는다. AHS 세계관이고, 리즈 테일러이기에 가능한 전개다.


<AHS: Hotel>(FX). youtube 스크린샷.


결국 그때도 지금도,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에 머물기로 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누가 감히 리즈의 선택을 평가한단 말인가.(뭐, 굳이 여신이 움직여야 하나, 여신을 영접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저들이 찾아와야지.) 어떤 면에서, 비정상적인 건 호텔 밖 세상인 것을. 리즈는 호텔에서 자기 자리를 찾은 것 뿐이다. 자신도 찾고, 일도 찾고, 사랑도 찾고, 가족도 찾았다. 리즈가 유령이 된 직후, 트리스탄이 드디어 재등장함으로써, 작품은 리즈와 트리스탄 각각과 이 아름다운 관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마무리된다.

 
호텔의 진정한 주인은 제임스 패트릭 마치도, 백작도, 윌 드레이크도 아닌, 리즈 테일러였다. 그는 항상 거기 있었다. 유령도 뱀파이어도 아니면서, 바 한구석에 가만히 기대 책 너머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모두의 상처를 보듬고 정을 나눠주었다. 리즈 테일러는, 어떤 비극적인 전개나,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이용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고뇌하고 즐기고 싸우고 사랑하고 ‘살아남는’, 이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이었다.


<AHS: Hotel>(FX). youtube 스크린샷.


 
종교는 없으나 덕질로 섬기는 신은 여럿이다. 총체적 신은 데이빗 보위고, 프랜차이즈 판타지 세계관에서는 죽음의 여신 헬라를 섬긴다. AHS월드에서 내 수프림은, 코딜리아도 마이클도 아닌, 리즈 테일러다. 솔직해지자, ‘여신’의 공식을 가르친 건 백작이었지만, 그것을 제 스타일로 소화한 것은 물론, 가장 ‘여신다운’ 자태를 보인 것은, 리즈 테일러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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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가가의 ‘The Countess’, 오피셜 자막은 ‘백작 부인’이나, ‘백작’이라고 쓴 까닭:
‘countess’를 사전에 검색해 보니, ‘백작 부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count’의 여성형이기도 하더라. 제임스 패트릭 마치의 부인이니 ‘백작 부인’이 더 맞는가 고민했지만, 호텔의 ‘백작’ 마치는 이제 유령일 따름이다. 이 존재는 마치 부인도, 무성영화 시절의 배우 엘리자베스도 이미 아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부인 혹은 연인이었는지, 진짜 이름은 뭔지 이제 다 의미 없어진, 그저 피를 마시고 제 ‘창조물’들의 사랑 위에 군림하는 ‘countess’라고 할밖에 없지 않나, 하여, 백작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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