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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17. 2021

다 백수장이었다.

백수장




<뇌물>(2014, 감독: 지태경)

<내가 어때섷ㅎㅎ>(2015, 감독: 정가영)

<범죄의 여왕>(2016, 감독: 이요섭)

<4학년 보경이>(2014, 감독: 이옥섭)

<얼굴들>(2017, 감독: 이강현)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육 년쯤 전, 극장에 갔다. 세 작품을 <오늘영화>(2014)라는 이름으로 묶어 개봉했었다. 결과적으로 2X9필름의 <연애다큐>와 구교환이 그 무렵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돌이켜보니 <뇌물>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한 배우의 존재였다. 대일은 ‘홍상수 영화의 남자 주인공’ 같은 스스로를, 어설프게 카메라로 담는 인물이다. 허세 있는데 소심하기까지 한, 예민한데 섬세하지는 못한, 질투는 심한데 용기는 없는. 자만과 열등감, 질투와 피해의식이 뒤섞인, 최고로 찌질한 남자. 멋진 구석이라곤 없는데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이후 다른 작품들에서 백수장을 목격했고,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뇌물>(2014). 출처: 다음영화.


휘청휘청한 걸음걸이. 취하기라도 하면, 툭 치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다. 무릎에 손을 올리고, 움츠린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한다. 피드백을 들으면 변명하기 바쁘다. 에이/아우 따위 효과음, 어이없다는 듯 피식 새는 웃음, 큰 한숨을 자주 섞는다. 지나치게 짜증을 내며 ‘내 이야기’ 임을 강조한다, 인신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우습다. 왜저래,가 절로 나온다.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그런데, 정우가 걱정하는 척 은근히 그의 흉을 보기 시작하자, “대일이 건드리지마! “라고 외치고 싶어 진다.  


소은과 있는 대일은 다른 방향으로 뻔하다. 눈치를 보는 뉘앙스가 다르다. 상황/지위 요인 때문이 아닌, 소은의 존재 자체로부터 오는 긴장이다. 작품 이야기를 하며 생기 있는 빛을 띠던 눈동자는, 곧바로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갈 곳을 잃는다. 늘 그랬듯 ‘에이 그게 아니야’라고 반박하지 못한다. 더듬거리며 굳고, 조심스럽게 설득을 시도하지만, ‘난 별루’라는 소은에게 지고 만다. 세운 허리에 손을 얹고 준비한 자료를 내려다보며 웅얼웅얼. 소은은 술을 먹여달라고 요구한다. 그가 마시는 데에만 집중하는 와중, 술잔을 들어주는 대일은 자연히 상대의 얼굴에 눈을 고정하게 된다. 잔을 놓고도 떨어지지 않는 대일의 시선과, 공기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이리저리 구르는 소은의 시선은 대조된다. 손을 잡고 걸어갈 때도, 소은은 당당하게 몸을 쭉 펴고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는다. 대일은 팔다리와 목 관절을 완전히 펴지 못한 채 어쩐지, 자발적으로 끌려가듯 걷는다.


<뇌물>(2014). 출처: 다음영화.

 

그 분위기는 이후에도 이어진다. 작품 이야기를 할 때는 밝게 높아졌다가, 사심을 드러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소은의 능청스러운 ‘고백’에 말을 잃는다. 눈을 굴리고 머리를 흩뜨린다. 데굴거리는 속마음이 들린다. 정우의 등장은 다른 종류의, 불쾌한 긴장을 입힌다. 고개를 쭈뼛거리고, 입을 벌린 채 비죽 내민다. 눈 밑의 그늘이 두드러진다. 어깨는 더 움츠러든다. 소은을 몰래 살핀다. 열등감 뭉치가 되어버렸다. 홀로 담배를 피우며 욕을 뱉는 씬이 등장하기 전 이미, 관객은 그의 속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축하의 리액션 후, 옆으로 식 돌며 ‘되게잘나가ㅅ’ 하고 말끝을 흐린다. 구겨진 등에서, 열등감으로 구겨진 마음이 보인다.


몇 번째 마트료시카인지 모를 곳에서, 결국 대일은 소은을 정우 옆에 앉힌다. 역시 어둡지만, 전처럼 날 서 있지 않다. 체념한 깊이의 그늘이다. 바로 그 전개에 대한 소은의 피드백을 듣는다. 긴장으로 주름진 뺨, 금방 눈물이 고일 듯 푹 꺼진 눈밑, 굽은 등. 시선을 똑바로 맞추지 못하며, 괜히 팔다리를 모아 꾹꾹 누르며 우물거린다. 소은은 묻는다, “근데 지금 이거 영화예요 현실이에요?”. 대일은 답한다, “몰라요.” 눈알이 위로 구르고, 약간 웃음기가 비친다. 자조적인데- 장난기가 반짝인 건 착각일까- 진지하다. 비로소 멀찍이 눈을 맞추며 쭈뼛쭈뼛 말한다, “어쨌든… 진짜예요.” 이제까지 중 가장 어린, 또 가장 진심 어린 목소리다. 백수장은 애매한 눈가와 입가로, 자주 쭈그러드는 온 몸으로, 영화 속의 영화 속의…..영화 속, 대일의 찌질한 기분들 사이 순수한 진심을 골라 슬쩍 꺼내 놓았다.



<내가 어때섷ㅎㅎ>(2014). 출처: 다음영화.


여기, 다른 식으로 뻔한 남자가 있다. <내가 어때섷ㅎㅎ>(2014), 수장은 터벅터벅 걸어 곧 쓰러질 듯 방문을 연다. 입을 어 벌리고 털썩 앉아 사 온 것들을 주섬주섬 꺼낸다. 가영이 들어온다. 불편하고 어색한 기색. 피곤한 상태로 낯선 이를 마주쳐서 이겠으나, 언제나 그렇게 데면데면할 것 같다.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움츠려 대충 낯가림의 인사를 건네며, 예의상의 눈웃음을 던진다. 눈 아래의 주름들로 기운만 입히는 웃음이다. 백수장의 포인트 중 하나다. 진심이 담겨 활짝 펴지기도 하고, 곁눈질과 만나 비웃음으로 번지기도 한다.


가영이 의도를 서서히 드러내면서부터, 오히려 수장의 긴장은 풀어진다. ‘난 널 파악했어’라는 자신감이 은근히 덧붙는다. 단순히 거절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평가하기 시작한다. 와중 귀찮다는 듯 뒤로 물러나 있는 태도는 유지한다. 가르치려 들면서도, ‘상대해 주고 있다’는 뉘앙스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척’, 본인의 상태를 설명하려는 듯 차분하게 말문을 열더니, 멋대로 넘겨짚는 말들이 이어진다. 문장을 내보내는 힘은 머뭇거리나 일관성 있고, 말끝은 종종 흐린다. 피곤에 취기가 덧붙은 탓도 있겠으나,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지 싶다. 유진에겐 분명 사랑스럽고 자상한 애인일 테지만, 가영에겐 꼰대다. 가영을 ‘뻔한 여자’라고 깎아내리는 행위는, 스스로의 뻔함을 드러낸다.


뭐 꼰대짓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 점점 수장의 피로도는 높아진다. 한숨을 푹푹 쉬고, 눈을 치켜뜨고, 입은 쭉 내민다. 가영이 옆에 와 앉자, 사람이 아니라 오뚝이 같은 것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식 기울인다. 정말로 지쳐서 못 일어나고 있는 인상이다.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앉아 있다가 대놓고 혐오하는 눈빛을 보내며 이마를 구긴다. 대꾸하거나 움직일 힘조차 떨어진 이 모습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다.

 

<내가 어때섷ㅎㅎ>(2014). 출처: 다음영화.


“정가영 감독의 영화를 볼 때는 정가영의 시선을 따라 남자들이 멋져 보이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정가영 밖에 남는 게 없다.” 그렇게 적은 적이 있다. 캐릭터에 한정된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이제 와 백수장만큼은 예외였다고 고백한다. ‘수장’은 적당히 평범하게 멋진, 또 평범하게 전형적인 미소지니를 지닌 남자였다. 그러나 그를 연기하는 배우는, 매력적이었다.



<범죄의 여왕>(2016). 출처: 다음영화.


대일과 수장이 뻔한 ‘남성성’을 드러냈다면, <범죄의 여왕>(2016) 덕구의 성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데다 기능적인 조연, 분장으로도, 성격으로도, 가장 ‘덜 꾸미는’ 종류의 인물이다. 언뜻 음침하나 셋 중 가장 무해하다.


양말에 슬리퍼를 신은 발이 꿈지럭거린다. 찌뿌둥한 한숨.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와, 푹 양반다리로 걸터앉는다. 책이 든 종이봉투가 그렇게 (무거워가 아니라) 버거워 보일 수가 없다. 늘어진 티셔츠, 칙칙한 추리닝. 뿔테 안경 위로는 인상을 써 팔자가 된 눈썹이, 밑으로는 우그러진 입술이 보인다. 비스듬한 각도로 잡힌 순간, 이거 몹시 백수장이잖아 하고 웃음이 터졌다. 가벼운 실랑이를 하는 모자를 지켜보다, 미경이 돌아보자, 얼른 피한다. 미경이 다가오자 어쩔 줄 몰라하며 책을 끌어안고, 무릎을 약간 세워 몸을 뒤로 뺀다. 입은 당황 해 어 모양으로 굳는다. 이미 눈은 다 마주쳤고, 도망칠 곳도 없는데, 고개를 애써 책으로 내린다. 미경이 말을 건다. 안경 너머 눈이 생기 없는 긴장으로 굴러가고, 입은 애매하게 벌어진 채 완전치 못한 발성을 내보낸다. 그저 간단한 물음에 대한 답을 할 뿐인데, 머리를 긁적이며 초조해한다. ‘그’, ‘어’, ‘뭐지’ 따위의 군더더기가 덧붙고, 단어 사이사이 차오르는 숨이 들린다.


덕구의 경계는, 고기로 풀어진다. 쩝쩝거리며 먹다가, 슬금슬금 불판 옆으로 와 앉아 어깨를 움츠린 채 어정쩡하게 빈 접시를 내밀고 가만히 있는다. 부끄러우리만치 솔직한 자세다. 미경이 “더주까?” 하고 어르듯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고기가 들어가자, 말이 술술 나온다. 약간 어눌하고 데데거리는 말투. 어깨를 식 올리며 엉거주춤 헤 하고 웃는다. 어느 정도 어른의 예의가 있으나, ‘애같다’. 몹시 없어 보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덕구를 연기하는 백수장의 모습에 답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여 귀여운 이는, 백수장뿐이다.


 

<4학년 보경이>(2014). 출처: 다음영화.


보너스처럼 묘사하고 싶은 캐릭터는, <4학년 보경이>(2014)백선배. 보경이가 반한 남자다. 이 스토리에서 백은 그냥, 영문을 모르는 채, 아련한 예술가 분위기로 있으면 된다. 힘을 별로 싣지 않고 나직하게 말해, 비음이나 쇳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시선과 몸의 움직임을 줄여, 신비로운 분위기가 묻어난다. 외에는 거의 그대로다. 머리카락마저 삐죽삐죽한데, 멋지다. 헐렁헐렁한 작업복이 몹시도 어울린다. 구부정한 등, 주로 살짝 삐딱한 고개와 어깨, 심기가 불편한 듯 툭 나와 있거나 어정쩡하게 벌어져 있는 입, 웃음기와 그늘이 섞여 있는 눈 밑의 선, 분명하고 시원스럽기보단 애매하고 머뭇거리는 표현법. 백수장의 매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쓸데없는 취미가 있다. 절대 보지 않을 작품의 소개를 살피곤 한다. 원작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한- <치즈 인 더 트랩>(2015, tvN)이 방영되고 있던 시기, 출연진을 훑다 백수장의 이름을 보았다. 그가 맡은 캐릭터를 알게 되었을 때 생각했다, 어울린다. 최근에는 지인으로부터, <미쓰백>(2018)에서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울린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었다. 이제껏 목격한 그의 조각들이, 믿음을 주었다. 4학년 보경이가 좋아하는 선배, 찌질한 감독, 뿔테 안경을 쓴 고시생, 가영을 평가하는 남자, 맑은 택배 기사. 다 그답게 흐물흐물 어울렸다.


뻔해도 독특하다. 대사와 설정이 식상해도, 그것을 입은 배우의 마스크와 표현법의 개성이 캐릭터를 흥미롭게 만든다. 방향이 선하면 한없이 무해하다. 찌질하고 평범하면 그냥저냥 미워할 수 없다. 악하다면, 무겁게 위협적이진 않으나 기분 나쁘게 소름돋는다. 배우는 눈이라고 했던가. 백수장을 보면 그 말이 와닿는다. 특유의 자세와 표정 그대로 눈빛만 바꿔, 법 없이 살 해맑은 청년도 되고, 음침한 범죄자도 된다.



그렇게 백수장은 서서히 내 마음에 쌓였다. 그날 영화관으로 향했던 가장 큰 까닭은, 포스터에 담긴 그의 비스듬한 얼굴이었다. <얼굴들>(2017)현수는, 침착하고 프로페셔널하게 상자와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여전한 걸음걸이로. 그 사이에 어쩐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슬쩍 보였다. “제가 따낸 거에요 이거.” 성실하게 한 길로 걷고 있는 것 같더니, 갑자기 쓸쓸한 투로 오늘이 마지막 근무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은 알 것도 같았다. 드라마틱한 서사와 선명한 캐릭터가 없는 픽션, 관객을 납득시키는 건 배우의 얼굴이다. GV가 이어졌다. 백수장은 앞머리를 묶어 이마를 드러낸 채 등장했다. 관객석을 향해 세상 해맑게 웃어 주었다. 주변 공기를 정화시키는 미소였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리도 순수한 이가, 작품 속에서 뿜던 배우의 눈빛이 새삼스러웠다. 백수장의 얼굴들은 그렇게 다 달랐고, 다 어울렸고, 다 백수장이었다.


<얼굴들>(2017). 출처: 다음영화.


 


+

<뇌물>, 술에 취해 꼬부라지는 혀로 대일은 혼자 중얼거린다, “소은씨 꼬리가 좋아요.” 누군가가 대사로 적었다고 생각하면 약간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는데, 백수장이 하니 그저 귀엽다. ‘당신의 입꼬리도, 눈꼬리도, 말꼬리도 좋다.’는 그 말을, 백수장에게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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