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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l 08. 2021

낯선 연기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Bartosz Bielenia




<문신을 한 신부님(Bože Ciało)>(2019, 감독: 얀 코마사)

<프라임 타임(Prime Time)>(2021, 감독: 야쿱 피야텍)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위를 경계하던 탁하고 날카로운 눈, 토마시 신부를 바라보던 맑고 여린 눈, 약을 하고 춤을 추던 멍하게 확장된 눈, 피 묻은 얼굴 속 흰자위를 한껏 드러낸 눈, 두려움과 혼란에 흔들리다가도 사람들 앞에만 서면 뚜렷하게 빛나는 눈. 모두 다니엘의 눈이다. 약한 사람들을 변하게 만든 ‘토마시 신부’와 약한 그대로 변하지 않은 다니엘. 두 자아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타인의 약함을 감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이 있다면, 그와 인간 사이의 매개체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다니엘과 같이 판단할 수 없는 존재이자, 판단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무엇도 될 수 있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종류의 눈빛들을 보여주며, 그것이 한 사람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해내는, 속이 다 보이도록 흔들리다가 다음 순간 미스터리한 분명함을 드러내는 이 그늘지고 창백한 얼굴의 배우,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그의 낯선 연기는 누구도 다니엘을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준 핵심이었다.”



한 해 반 전에 완성한 글의 마지막 두 문단을 옮겼다. 제목을 ‘낯선 잣대’로 택했었다. 낯선 잣대를 지닌 다니엘을 연기한 배우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역시 낯설었다. 그를 <문신을 한 신부님>(2019)에서 처음 본 것은 맞지만 그 뜻이 아니라- 분위기가 생소했다. 잊히지 않을 독특한 인상이었다. 가느다란 코와 입, 마른 뺨과 넓은 이마, 얇고 창백한 피부. 연한 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무엇을 담으려 하지 않아도,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약한’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데, 병약하거나 불안정할 때도, 경건하고 차분할 때도 있다. 이 배우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저만의 표현법을 터득했다. 지치고 찌든 듯 보이다가도, 별안간 천진하거나 ‘성스러워’ 지고, 괴기하게 위협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감정의 변화색은 투명한 피부를 통과해 그대로 나타난다. 낯선 형상의 낯선 움직임은, 섬세하게 절제된 연출과 만나 마음을 뒤흔들었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다니엘은 상황이 부여한 역할에 본능적으로 임한다. 소년원 안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방관자가 된다. 재소자들이 집단적 폭력을 행사할 때, 망을 본다. 예민한 눈가가 고통의 소리에 살짝 일그러지지만, 이내 효율적으로 데굴거린다. 다른 역할은, 성실한 신자다. 토마시 신부의 말을 완전히 집중해 듣는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눈물을 글썽인다. 다른 의미로, ‘살아남기 위한’ 제스처다.


출소한 그는 자유로운 젊은이의 모습으로 기꺼이 온갖 것에 중독된다. 술을 마시고, 약을 하고, 클럽에서 만난 사람과 섹스하고, 잔뜩 취한 채 몸을 격하게 흔든다. 있는 힘껏 뜨고 있는 눈 한가운데가 탁하다. 오랜만의 일들이겠으나, 관성적이다. 감정의 흔적이 별로 없다. 멍하게 주먹질을 하고, 길거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샌드위치를 우물거린다. 버스에서 마주친 형사는 말한다, ‘너 같은 새끼’.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별로 맞추지 않던 눈을, 살짝 내리깐다. 이미 낙인찍힌 다니엘의 온몸이 무기력해진다. 보는 사람마저 찌뿌둥하게 만드는 태도다. 살아남기 위해 적당히 불성실한 노동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매일이 벌써 지겹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내키는 대로, 일단 성당을 찾은 다니엘은, 얼떨결에 ‘신부’가 된다. 사기 치려는 의도는 당연히 없었다. 매초의 표정에 솔직하게 드러난다. 웃음기 없이 입을 다물고 엘리자를 응시하던 그는, 혼자 남자 안절부절못하며 도망가려다 실패하고, 욕을 뱉는다. 패닉은 오래가지 않는다. 고해성사를 받을 ‘기회’가 생기자, 눈이 묘한 긴장으로 빛난다. 형식은 몰래 찾아봐야 하지만, 핵심은 제 언어로 내놓는다. 잠시 불안한 소년의 얼굴을 했다가도, 사람들 앞에 서면 ‘신부’가 된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목소리는 꾸밈없이 나직하고, 눈빛과 몸짓은 차분하고 분명하다. 노래와 함께 기쁨의 미소가 우러나온다. 약과 죄, 긴장에 찌든 기색을 드러내는 데에 적합했던 낯빛은, 창백한 그대로 깨끗하고 경건해진다. 신기하다. 두 종류의 얼굴은 한 사람의 것이며, 그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이 점이 이야기와 캐릭터에 매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바르토시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이 ‘역할’을,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시적일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진심으로 수행한다. 열정적으로 말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한다. 그에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다. 관객은 다 파악했다고 여겼던 이 인물이 낯설어진다. 걱정하다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설교를 할 때는 ‘연기’의 태도가 있지만, 억지로 지어내는 것은 아니다. 내면에서 나오는 힘에 스스로를 맡겨, 몰입한다. 가득 찬 우수를 곧게 내뻗는 눈빛. 내리깔았다가, 저 위를 응시한다. 나직하게 읊는 톤, 곧은 자세, 흐트러짐 없는 손짓은, 핀스헤르마저 감동하게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것 같더라.” 형식은 연기이나, 그 바탕은, 진심이다. 바르토시가 내보내는 다니엘의 솔직한 에너지는, 얕은 헷갈림 대신 묵직한 고민을 안긴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신변에 관한 거짓말을 할 때마다 다니엘은, 잊고 있던 족쇄가 발에 채인 듯한 표정을 한다. 마지못해 하는 뉘앙스다. 자신 없어지는 눈가나, 한시름 놓는 입가의 움직임은, 관객만이 알아챌 정도로 초조하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정말 잊은 듯, ‘신부’가 된다. 젊은이들과 섞이면서도, 선을 긋는다. 섣불리 무언가를 하지 않고 그늘진 얼굴로 전부 보고 듣는다. 클럽 음악이 흘러나오자 심각한 상태 그대로 자동으로 리듬을 탄다. 영정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예상치 못했다는 듯 슥 닦는다. 다음 장면, 음악을 틀어 놓고 모토사이클을 손보며 온 힘을 다해 춤을 춰도, 위화감이 없다. 그의 입장에서 술, 담배, 섹스, 음악 같은 건,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이 아니다. 대놓고 즐기진 않지만, 딱히 숨기지도 않는다. 바르토시의 거리낌도 허세도 없는 적당한 태도가, 특이한 방향의 존경을 끌어냈다.


최선을 다해 놀다가도, 결정이 필요할 때는 진지해진다. 홀로 있을 때는 머리를 감싸고 패닉해 있다가도, 사람들 앞에만 서면 흔들림이 멎는다. 핀스헤르와 둘만 있을 때도, 경계 없이 역할을 오간다. 가석방자 다니엘이 되어 술을 들이켜다가, 가족 이야기는 ‘신부’의 얼굴로 듣는다. 협박하고, 거부하고,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두 사람은 틀어놓은 랩을 함께 따라 부른다. 고래고래 내뱉는 와중 눈은 젖어 있다. 한 감정에서 다른 감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존재한다. 바르토시는 매초의 솔직한 표정을, 예민하고 깔끔하게, 필요에 따라 복합적으로 입는다. 때론 몹시 불안하게 흔들리고, 때론 떨리는 채로 굳건하다. 한 사람의 상태라는 데에 위화감은 들지 않는다. 작품도 바르토시도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로 드러낸다. 판단할 수 없게 만들면서도, 결국 항상 진심이었음을 의심치 않게 한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그때그때의 이끌림으로 하는 행동에 일관성이 있는 까닭은, 본능적인 잣대가 있어서다. 사람들 앞에서 똑바로 허공을 응시하면서도 속은 고뇌로 요동친다. 그러나 홀로 불안에 덜덜 떨면서도 그 잣대만큼은 쓰러지지 않는다. 낯선 잣대의 존재를 수긍하게 해 준 것은 바르토시였다. 몰입하면서도 자동으로 다니엘을 평가하려고 하던 관객을, 끝내 실패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연기였다.


어떤 공기를 삼키든 금방 숨 쉬는 법을 알아내기 때문일까- 타인과 맺는 관계의 모양보다는 홀로 내는 에너지가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주변에서 끌어모은 것을, 즉시 소화해 제 스타일로 내보낸다고 할까. 그런 그가 달리 대하는 이는, 엘리자다. 가장 처음 ‘신부’라는 거짓말을 한 사람과 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본래의 다니엘이 나온다. 그를 향한 눈빛은 무방비하고, 맑다. 로맨스적 끌림이 전부는 아니다. 엘리자의 노래를 들으며, 진실된 눈물이 고이고, 순수한 웃음이 어린다 -‘신부’의 것도 범죄자의 것도 아닌. 엘리자가 마을을 떠나는 장면은, 그에게 있어 다니엘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드러내는 모먼트였다. 이야기 전개상 짚을 여유는 없었으나, 다니엘에게도 엘리자는 ‘어떤 의미’였을 것이다, 어쩌면 토마시 신부보다 특별한. 잣대가 흔들릴 때, 붙잡아 준 존재. 엘리자의 그늘진-티없는 눈빛은, 망설임을 멈추고 옳은 결정을 하게 도왔다. 섬세한 각본, 깔끔하고 정교한 연출, 그 속에 녹아든 배우들의 깊고 솔직한 눈빛이 들려준 해석이다. 엘리자 리쳄벨과의 아름다운 호흡에, 바르토시의 다른 얼굴이 궁금해졌다. 보다 타인과 입체적으로 감정이 얽히는 인물이라면 어떨까. 찍지도 않은 작품 속 연기에 두근거렸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몸을 불안하게 흔들며 눈물을 흘리던 다니엘은, 얼굴을 찌푸리고 십자가 앞에 멈춘다. 말없이 상의를 벗고 문신이 가득한 맨살을 내보인다. 괴로움이 가득하나 명료한 눈빛이다. 그 간단하고 짧은 제스처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고백 이상. 나는 신 앞에 옷을 벗었다, 문신이 보이는가,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가. 내가 살아남기를 바라는가, 무엇이기를 바라는가. 다니엘이, 작품이, 바르토시의 연기가, 질문을 던졌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그건 결국 코스튬을 벗는 의미와도 같았을 거예요. 앞서 토마시 신부가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거든요, “누가 알고 있니? 핀츠헤르 말고.” 다니엘은 답하죠, “아니오, 핀츠헤르만 알아요.” 그러니까, 그건 그에게 있어 결정의 시간이었던 거예요, 속해 있던 곳의 사람들 앞에서 정직해질 시간이 온 거죠. 정직의 순간이었고, “이게 내가 그대들 앞에 서는 모습입니다. 이제껏 나를 보호하고 있던 이것을 벗습니다, 날 신부로 만들어 준 것을요. 그 아래 누가 있는지 보십시오.” 그 아래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가요? 그게 이 장면의 끝에 그가 남긴 물음인 거예요: 당신이 무엇을 입고 있는가가 중요한가요?”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interview by [theitalianreve.com]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소년원으로 되돌아간 다니엘은 꼭 해탈한 것 같다. 공허한 눈은 보란 듯이 당당하다. ‘회개’했는가? ‘깨달음’을 얻었는가? 다음 장면을 보면, 머릿속이 다시 뒤엉킨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반복해 주먹질을 하고 도망친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 속, 커다랗게 뜬 눈이 도드라진다. 초반 약에 취해 리듬을 탈 때와 유사하게- 멍하게 확장돼 있다.


작품은 끝까지 다니엘이 무엇인지 답을 내리지 않는다. 바르토시 역시 캐릭터를 정의하지 않은 채, 순간순간의 진심을 내보였다. 관객이 결국 평가에 실패하도록, 평가는 애초에 불가능했음을 깨닫도록 도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이해하고 터득한 배우의 감각,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니엘의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운 감독의 안목. 가장 적절한 호흡을 위한 그들의 노력이, 어디에도 없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여러 얼굴을 오갔다, 살인자, 소년, ‘신부’ -어떤 옷을 입고 있든 그는 항상, 다니엘이었다. 여러 모로 ‘다른’ 작품 속의 인물이었지만, 세바스티안에게도 유사한 데가 있었다. 인질범이었다가, 스무 살 애였다가, 상처받은 아들이 됐다.


<문신을 한 신부님>은 플롯과 연출, 연기가 어울려 독특하게 완벽한 결과물이 나온 경우다. <프라임 타임>(2021)은, 배우의 힘이 스토리를 끌고 간다고 느꼈다. 뒤섞이는 TV 화면들을 보면 당시 폴란드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상징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건가 싶은데, 공권력이나 자본을 건드리는 정도는 미적지근하다. 여성 캐릭터들은 조금 멋지려다 말고 패닉해 엉엉 운다. 흥미로운 인물은 그제고시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애매했다. 내가 본 까닭이야 당연히, 바르토시의 연기였지만, 작품을 만든 까닭도 그의 연기를 담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끝까지 세바스티안이 말하고자 한 바는 알 수 없다. 오락가락하는 행동 패턴은 종종 당황스럽다. 허나 대강의 성향이나 성격은, 배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에게 레나는 묻는다, “세바스티안이 누굴 해칠 만한 사람인가요?”. ‘내가 어떻게 알겠냐’는 말이 돌아온다. 어떤 면에서는 정확한 답변이었지만, 관객은 그가 적어도 ‘의도적으로’ 타인을 해할 사람은 아니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프라임 타임>(2021). IMDB 이미지.


세바스티안이 위험한 까닭은 폭력적이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불안정해서다. 전형적인 방법으로 위협을 가하고는 있으나, 얼굴엔 긴장이 가득하다. 투명한 눈, 그 아래 짙은 그늘, 창백하고 얇은 피부, 가는 실루엣. 근육의 작은 변화로도, 긴장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가 다음 순간 서늘하게 차분해지는 상태를 표현해낸다. 한쪽 눈가나 뺨을 움찔거리고, 눈을 이리저리 굴려 일반적이지 않은 예민함을 드러낸다. 경계를 담아 올려다볼 때는, 시선이 사선으로 뻗는다. 눈동자의 방향이 미세하게 양옆으로 퍼져 있어 묘한 분위기를 더한다. 그는 숨기고 속이는 연기자 스타일 범죄자가 아니다. 계획은 세우고 왔지만, 변하는 상태와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제고시가 쓰러졌을 때, 미라가 다쳤을 때, 패닉해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은 백 퍼센트 진심이다.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던 와중에도 일관성 있는 빌런이 되질 못하는 모습. 자칫 어수선하게 겉돌 수도 있었을 텐데, 바르토시의 연기를 통해 어떤 직관적 설득력을 입었다. 세바스티안은, 총과 불안정의 조합- 제 의도에서 약간 빗나간 이미지로 방송국을 통제한다. 바르토시는 그의 옷을 입고 홀로 공간을 장악하며 쇼를 통째로 이끌었다.


아버지가 등장하자,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담배를 꺼내 문다. 눈썹이 우울하게 처진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심한 모욕을 뱉는다. 참다못한 그제고시가 일어나 소리를 지르자, 차분하게 손을 들어 제지한다. 몸을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작품 속 카메라가 곧 실제 카메라다. 관객은 그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 무방비한 눈빛이다. 보는 사람도 무방비하게 만든다.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린다. 시선이 비스듬해졌고,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그대로다. 몹시 여려진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입술을 떨고, 더듬으며, 집중해 단어들을 뱉는다. 힘이 더욱 들어가 얼굴빛이 점점 진해지고, 뺨이 온통 진동한다. 목소리는 둔하게 뭉쳤다가 가늘게 요동친다. 눈물범벅인 채로 피식 웃으며,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담배를 입으로 가져간다. 완전히 벌게진 얼굴, 웃음은 다시 울음이 된다. 닦지 않고 눈을 내리깐다. 아버지와 대면시켜 상처를 끌어내는 전개는, 솔직히 작위적이었다- 그러나 이 씬을 목격한 것 만으로 영화를 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바르토시의 연기는 아름다웠다.


<프라임 타임>(2021). IMDB 이미지.


장면의 깊이는 오로지, 예리하게 터지는 연기와 그것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카메라로부터 나왔다. 오프닝은 세바스티안이 방송국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씬이다. 아래서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카메라가, 모자로 인해 그늘진 얼굴을 미묘한 각도로 담는다.


엔딩 역시, 세바스티안의 단독샷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느낌은 알겠다, 겨우 끝났구나~ 하며 긴장을 풀고 관람하다, 별안간 속이 서늘해졌다. 한밤중, 그는 경찰차에 실려 가는 중이다. 상처 난 얼굴이 흔들린다.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다가, 붉은 불빛이 어둡게 비치며 그림자를 만들기를 반복한다. 연속 촬영한 사진의 나열 같기도 하다. 정신이 드는 듯,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뜬다. 생기 없이 멍하게 부릅뜬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이제까지, 그를 파악했다고 여겼는데, 그 공허를 보는 순간, 다시 알 수 없어졌다. 바르토시 비엘레니아는, 감정적 이해를 건넸다가, 마지막 순간 다시 거두어갔다, 의도한 대로.  


<프라임 타임>(2021). IMDB 이미지.



픽션 속 인물들은 대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혼합된 색을 내지만, 고유색이 강렬해 주위 에너지를 다 흡수하는 주인공도 있다. 내가 본 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의 역할은 둘 다 후자였다. 압도적이었고,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이 캐릭터가, 이 배우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했다. 선악을 판단할 수 없- 아니 선악의 판단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 ‘낯선 잣대’ 글에, 다니엘에게 소질이 있다고 적은 바 있다. 바르토시에게도 독보적인 ‘소질’이 있었다. 단순히 연기에 재능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서사와 캐릭터를 그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그리하여 관객을 긍정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능력이다.


폭력적이거나 중독적 충동만이 남은 채 텅 비어 있거나, 곧은 확신이 차올라 고요하게 뚜렷하거나, 불안에 흥분한 채 번들거리거나, 상처가 터져 그렁그렁하게 흔들리거나. 각각의 순간 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의 눈동자에는 고유한 빛이 어른거렸다. 마치 다니엘의 연설처럼.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

다니엘은 무엇이었을까, 작품에 관해 쓴 글에서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음이 핵심이라고 적은 바 있다. 허면 배우는 그를 무엇으로 보고 연기했을까. 결과물을 보고 짐작할 뿐인 입장이라서, 이것 저것 적어보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대개 내 글은 주관적인 근거에 기반한 대량의 짐작인데도, 이번에는 이상하게 시원치 않은 기분이 들어,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감독과 배우의 말에 내 해석과 유사한 데가 있어 한시름 놓았다.



“이 캐릭터는 주로 그 순간의 행동을 하거든요acting more on the moment. 문제가 다가오면 결정을 하죠,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아무런 계획도 없고, 그냥 당장 하고 싶은 걸 해요.”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매우 흥미로운 측면인데, 다니엘에겐 두 스타일이 있거든요: streetwise 하고 약간 spiritual 하죠 동시에.(streetwise: 세상 물정에 밝은, spiritual: 영적인, 인데 둘 다 뭔가 어감이 어울리지 않아 그대로 옮겼다.) 젊은 배우들 가운데서 다니엘 역할을 고려할 때, 스피리츄얼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스트릿와이즈 한 사람을 찾기는 훨씬 쉬웠고요.

(중략) 그러니까, 난 바르토시의 스킬을 알고 있고, 배우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봤고, 매우 깊고 또 굉장히 많이 단단한rooted 그의 스피리츄얼 사이드를 알고 있어요- 그는 책을 많이 읽고, 종교에 관심이 있거든요. 그게, 스피리츄얼한 핵을 갖고 있는 그가, 이 캐릭터를 창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도움을 줬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그 핵 주위로 (캐릭터를)쌓아 올렸죠.”

-얀 코마사


-interview by [theitalianreve.com]



픽션의 옷을 벗고 편안하게 미소 짓는 그는, 순수하고 차분하고 건강하고 경건해 보였다. 무엇을 담으려 하지 않아도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느낌이 사뭇 다른 방향으로 들었다. 그의 페이스가, 퍼포먼스가 지닌 가능성의 깊이가, 새삼 아득하게 다가왔다.



*참고 인터뷰

https://www.google.co.kr/amp/s/www.theitalianreve.com/corpus-christi-interview-jan-komasa-bartosz-bielenia-finding-answers-in-a-lie/amp/


*위 인터뷰 번역

https://m.blog.naver.com/yonnu/22242440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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